의종1(毅宗一) 5년
〈신미〉 5년(1151) 봄 정월 계유. 초하루 조하(朝賀)를 생략하였다.
병술. 연등회(燃燈會)를 열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병신. 내전(內殿)에서 27위신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2월 무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김부식(金富軾)이 사망하였다.
신미.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3월 무인. 권정균(權正鈞)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고조기(高兆基)를 중군병마판사 겸 서북면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 兼 西北面兵馬判事)로 삼았다.
기축.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임진.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이 사망하였다.
여름 4월 임인. 초하루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치사(致仕)한 진숙(陳淑)이 사망하니 3일간 조회를 중단하였다.
갑진. 왕이 명인전(明仁殿)에 거둥하여 조회를 본 후 간신(諫臣)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제부터 매일 조회를 보려 하니, 조정에서 간쟁하는 일은 당분간 없도록 하라.”
라고 하였으므로, 간신으로 조정에서 간쟁하는 자가 없었다.
병오. 우박이 쏟아졌다.
기유. 왕이 침향목(沈香木)으로 공장(工匠)에게 명하여 관음상(觀音像)을 조각하게 한 다음 내전(內殿)에 두고, 아울러 반승(飯僧)하였다.
병진. 최유청(崔惟淸)을 판병부사(判兵部事)로, 문공원(文公元)을 판형부사(判刑部事)로, 유필(庾弼)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최함(崔諴)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문공유(文公裕)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김단(金端)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안정수(安正修)를 시형부상서(試刑部尙書)로 삼았다.
무진. 소부소감(少府少監) 한영신(韓令臣)이 일찍이 전해고판관(典解庫判官)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거친 베를 몰래 관청의 좋은 베 30필로 바꾸었으므로, 직전(職田)을 회수하고 전리(田里)로 추방 하였다.
계유. 평장사(平章事)로 치사(致仕)한 이중(李仲)이 사망하니, 조회를 3일간 중단하였다.
을해. 가뭄이 있자 명산(名山)과 대천(大川)과 여러 신사(神祠)에 비를 내려달라고 기도하였다. 수문전(修文殿)에서 7일간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병술. 〈왕의〉 셋째 누이를 창락궁주(昌樂宮主)로, 넷째 누이를 영화궁주(永和宮主)로 봉하였다.
정해. 왕비 왕씨(王氏)를 흥덕궁주(興德宮主)로 봉하였다.
5월 을사. 왕이 내전(內殿)에서 남두(南斗)에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정미. 좌간의(左諫議) 왕식(王軾) 등이 상소하여 정서(鄭敍) 등의 죄를 논하였다.
기유. 왕이 내전(內殿)에서 태일(太一)에 친히 초제(醮祭)를 지냈다.
신해. 선경전(宣慶殿)에서 5일간 소재도량(消灾道場)을 열었다.
병진. 간관을 전문(殿門)으로 불러 위로하고 회유한 뒤 특별히 간의(諫議) 왕식(王軾)을 편전(便殿)으로 인견하여 술자리를 베풀고는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갑자. 대간(臺諫)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시사(時事)를 간언하였다.
정묘. 김영관(金永寬)을 수사도 판국자감사(守司徒 判國子監事)로, 문공원(文公元)을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中書侍郞平章事 判吏部事)로, 유필(庾弼)을 참지정사 판병부사(參知政事 判兵部事)로, 김영석(金永錫)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최자영(崔子英)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로, 최함(崔諴)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최윤의(崔允儀)를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로, 임극충(任克忠)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유석(劉碩)을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로, 양원준(梁元俊)을 좌승선(左承宣)으로, 문공유(文公裕)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삼았다.
6월 경오.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임신.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대제(待制) 및 한림학사(翰林學士)에게 명하여 매일 정의당(精義堂)에 모여 『책부원구(冊府元龜)』를 교정하게 하였다.
병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임오. 금(金) 횡사사(橫賜使) 소부소감(少府少監) 소충(蕭忠)이 왔다.
갑신. 왕이 수문전(修文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을유. 밤에 내시(內侍) 이양윤(李陽允)과 사관(史官) 이인영(李仁榮) 등 13인을 봉원전(奉元殿) 뜰에 불러들여 좌석을 주고 종이와 붓을 지급한 뒤 왕이 운자(韻字)를 뽑아 석류화(石榴花)에 관하여 7언 사운시(四韻詩)로 짓게 하면서 양초에 금을 그어 시간을 제한하였다. 이양윤 등 7인이 합격하니 왕이 평대(平臺)에 나와 술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또 한림원(翰林院)에 술과 과일을 내려주고 이어 사견(絲絹)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기축. 금(金)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계사.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갑오. 왕이 비를 기원하는 즉흥시를 지어 여러 학사(學士)에게 보여주었다.
정유. 가뭄이 들어, 부채(扇) 사용을 금하였다.
가을 7월 경자. 조서를 내리기를,
“금년 들어 여러 달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곡식이 익지 않으니 안팎의 백성들이 장차 굶주리게 될까 크게 근심하노라. 길바닥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는데도 구휼미를 베풀 줄 모른다면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라 하겠는가? 도병마사(都兵馬使)와 재추(宰樞)는 백성을 구휼할 방도를 숙의(熟議)하여 우리 백성들이 혹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신축. 이식(李軾)을 상서좌복야 참지정사(尙書左僕射 參知政事)로 삼았는데, 얼마 안 되어 사망하였다.
임인. 정주(貞州) 배 위에서 용왕도량(龍王道場)을 열고 비를 내려달라고 7일간 기도하였다.
갑진. 문반(文班) 4품 이상과 무반(武班) 3품 이상의 관원에게 조서를 내려, 보제사(普濟寺)에서 오백나한재(五百羅漢齋)를 열고 비를 내려달라 기도하게 하였다.
을사. 내전(內殿)에서 72성(星)에게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오. 송(宋) 도강(都綱) 구통(丘通) 등 41인이 왔다.
정미. 비가 내렸다.
수문전(修文殿)에서 3일간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
병진. 유필(庾弼)을 보문각제거(寶文閣提擧)로, 김존중(金存中)을 동제거(同提擧)로 삼았다.
을축.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송(宋) 도강(都綱) 구적(丘迪) 등 35인과 서덕영(徐德英) 등 67인이 왔다.
8월 임신. 송(宋) 도강(都綱) 진성(陳誠) 등 97인이 왔다.
계유. 임대유(林大有) 등 99인이 왔다.
병자. 간관(諫官) 및 시어사(侍御史) 김양(金諹) 등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3일간 시사(時事)를 간언하였으나, 〈왕이〉 답하지 않았다.
계미. 성재(省宰)가 모두 죄(罪)를 청하며 업무를 보지 않으니, 문공원(文公元)·유필(庾弼)·김영석(金永錫)·최자영(崔子英)과 간관(諫官) 김자의(金子儀)·왕식(王軾)·박소(朴翛)·이원응(李元膺)·이양신(李陽伸)·윤인첨(尹鱗瞻), 대관(臺官) 최윤의(崔允儀)·김양(金諹)·민각(閔慤)·한정(韓靖)을 불러 위유(慰諭)하면서 업무를 보게 하였으나, 모두 조서를 받들지 않고 밤 2경[二鼓]이 되자 물러갔다.
을유. 내전(內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술. 성재(省宰) 및 대간(臺諫)이 왕의 부름으로 궁궐로 와 명을 기다렸으나, 모두 답을 하지 않자, 성재 및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먼저 퇴궐하였다.
왕이 후정(後庭)에서 기사(騎士)를 불러 북을 치며 격구(擊毬)를 하게 하니, 정언(正言) 이지심(李知深)이 합문 앞에 엎드려[伏閤] 2일간 극력 간쟁하였다.
정해. 왕이 북원(北園)에 놀러나가 기사(騎士)에게 명하여 격구하게 하였다.
경인. 왕이 성재(省宰)를 불러 말하기를, “이미 대간(臺諫)이 아뢴 바를 따르기로 하였으나 ,다만 정함(鄭諴)만은 쫓아내었다.”라고 하였다.
갑오. 최윤숙(崔允淑)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유방지(劉邦支)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았다.
9월 을사. 내전(內殿)에서 삼청(三淸)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병오. 왕이 경령전(景靈殿)에 배알하였다.
무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갑자.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겨울 10월 무진. 강안전(康安殿)에 거둥하여 국마(國馬)를 사열하였다.
임신. 선경전(宣慶殿)에서 백좌회(百座會)를 열고 구정(毬庭)에서 3일간 반승(飯僧)하였다.
을유. 태묘(大廟)에서 친히 협제(祫祭)를 지내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11월 기해. 송괴(宋瓌)를 보내어 금(金)에 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계묘. 조단신(趙端臣)을 보내어 횡사(橫賜)에 대해 사례하게 하였다.
무신. 오일취(吳日就)를 〈금(金)에〉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게 하였다.
경술.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하였다.
계축. 금(金)에서 소자민(蕭子敏)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서순(徐淳)을 보내어 금(金)에 가서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무오. 대관전(大觀殿)에서 금(金)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기미. 최응청(崔應淸)을 〈금(金)에〉 보내어 용흥절(龍興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12월 임오.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무자. 문공원(文公元)을 수사공(守司空)으로, 유필(庾弼)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임극충(任克忠)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왕식(王軾)을 어사대부 동지추밀원사(御史大夫 同知樞密院事)로, 이언림(李彦林)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김택(金澤)을 시형부상서(試刑部尙書)로, 안정수(安正修)를 시공부상서(試工部尙書)로, 이지무(李之茂)를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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