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속에서 피어난 싱할라 불교

 

촐라왕국에 의해 파괴된 싱할라 불교문명

갈 비하라 바위사원의 열반상과 유례가 없이 팔장 낀 입상.

 

스리랑카가 ‘불국토의 섬’이 된 것은 결코 평화롭지 않는 고통 속에서 얻은 결과물이다. 불국토의 서원과 그 결실은 결코 손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은 섬나라 옆에 강력한 군대를 거느리고 힌두로 무장한 이민족 세력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인도아대륙에서 바다를 건너온 타밀 세력에게 압박과 공격을 받았다. 

당대 해양은 촐라 세력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촐라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279년까지 남인도에 강구한 세월동안 존재했다. 기원전 3세기의 아소카 기둥 비문에서 촐라는 마우리아에 종속되지는 않았지만 우호 관계를 맺은 왕국 중 하나로 언급된다. 대제국을 건설한 아소카도 인도아대륙 남쪽 타밀나두 영역에는 제한적 영향력만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촐라는 기원전에도 타밀에서 강건한 나라였다. 

기원전 2세기, 스리랑카를 정복하여 근 50년 간 아누라다푸라 왕국을 지배한 적도 있다. 스리랑카에서 잡아온 포로 1만2000명을 동원해 카베리강에 1600m에 이르는 거대한 제방을 쌓아 관개농업을 국가적으로 주도했다. 불교도인 포로들은 노동 착취라는 고난을 당하면서 촐라왕국의 국가 기반시설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당시 인구 규모로 볼 때 1만2000이라는 숫자는 대단했다. 

싱할라왕국은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를 남동쪽 폴론나루와로 옮겼다. 그러나 10세기에는 촐라왕조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자나나타망갈람(Jananathamangalam)으로 개칭했다. 촐라는 한동안 타밀의 강국 세 나라 틈바구니에서 명맥만 유지하다가 힘을 키워 9세기부터 해양강국으로 부상했다. 싱할라왕국으로서는 대단히 불행한 일이었다. 이웃의 행운은 약소국에게는 불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대륙 바다 건너의 스리랑카 북부 평야에서 불교문명이 체계적으로 파괴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유산은 박해를 피한 최소한의 잔존물이다. 촐라왕조는 폴론나루와에 시바 사원 마하데비스바람(Mahadevisvaram)을 세웠다. 스리랑카의 북부와 중부는 라젠드라 촐라 1세가 직접 통치했다. 불교가 명맥을 끊길 상황에 처했다. 1070년, 남쪽 불교도 비자야바후가 촐라를 공격하여 마침내 폴론나루와의 새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1214년에는 벵골만을 따라 내려온 해양세력 칼링가의 침공으로, 고도 아누라다푸라와 폴론나루와가 불타서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옛날 부처님치아사리(佛齒)를 보냈던 칼링가는 일찍이 힌두왕조로 변해 있었고, 스리랑카의 불교 문명을 철저히 파괴했다. 불과 7년 뒤인 1231년에 시작된 몽골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지가 불태워지는 등 막대한 전란을 겪던 것과 같은 상황이 스리랑카에서 벌어진 것이다. 

바타다게 양식의 둥근 벽돌담으로 이루어진 싱할라 고유의 사원.

 

불치는 떠났어도 건축은 남아
이처럼 고난의 역사 속에서도 싱할라 사람들은 불교에 대한 신심을 거두지 않았고, 불사를 강행했다. 무엇보다도 먼저 아누라다푸라의 불치사를 옮겨왔다. 당연히 그 불치사도 사라졌으나, 건축의 흔적은 남았다. 불치사 지붕을 받치던 돌기둥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후대에 만들어진 석조 입상도 나란히 서있다. 

현존하는 폴론나루와의 대표적 불교 유산은 바타다게(Vatadage)다. 바타다게는 원으로 빙 둘러서 지어진 건축양식을 뜻한다. 작은 스투파(탑)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다. 벽돌을 원으로 쌓아올려 정교하게 원형 사원을 만들었다. 주변에는 정교하게 다듬은 석주들이 남아 있는데, 본디 지붕을 씌어서 보호하던 버팀기둥이다. 지붕은 목재를 이용했을 것이다. 당대 싱할라 불교가 도달한 뛰어난 건축술과 조형미를 함축적으로 전달해 준다. 건축양식에서 단단함과 세련미를 보여주며, 입구 사천왕상 등에서 세세한 조각술을 엿볼 수 있다. 이 독특한 싱할라 양식의 바타다게는 61~111년 무렵 아누라다푸라에 있는 투파라마(Thuparama) 사원에 채택된 이래 12세기 폴론나루와에서 그 전성기를 보여준다. 

바타다게 주변 공간은 일종의 ‘종교 박람회장’ 같은 느낌이 든다. 칼링가 세력이 세운 오랜 힌두사원 유적이 같이 붙어 있다. 힌두와 불교는 한편으로는 갈등하면서도 같이 공존했다는 증거다. 산스크리트 비문이 곳곳에 서있다. 12세기에 폴론나루와에서 100여 ㎞ 떨어진 미힌탈레에서 옮겨온 거대한 바위에 패엽경을 각인한 독특하면서도 웅장한 불경이 땅 위에 놓여 있다. 

진신치아는 어떤 적이 침략을 해올 경우에도 그 적들조차 이를 소중히 여겨 다치지 않게 했다. 아(我)와 적을 떠나서 부처님 진신치아의 소중함을 모두 각별하게 이해했다는 증거다. 훗날 풀론나루와에서 세 번째 수도를 캔디로 옮겨 무사히 안착하고 오늘에까지 전해온다. 불치는 떠났어도 이를 모신 건축물은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보호 전각인 지붕은 사라지고 기둥과 기단부만 남았지만 불치의 정신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 

폴론나루와의 부처님 치아사리가 모셔졌던 사원터.

 

팔짱 낀 독특하고 유례없는 불상 
폴론나루와 근교의 갈 비하라(Gal Vihara) 불상군을 찾아간다. 거대한 대리석 바위에 좌상과 입상, 열반상 등을 동시에 병렬적으로 각인한 12세기 바위사원이다. 좌상과 열반상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입상은 팔짱을 낀 독특하고 유례없는 양식이다. 연꽃 모양의 낮은 받침대 위에 서있는 입상은 높이 7m에 달한다. 아주 편안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양팔을 가슴에 포개고 있다. 

팔짱을 낀 입상은 갈 비하라에서 처음 본다.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양식이다. 서 있는 이미지는 부처상이 아니라는 일반적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역사가와 고고학자 사이에서 많은 논란이 있다. 입상 바로 옆에 부처님 열반상이 놓여 있고, 입상의 얼굴이 슬픈 표정이기 때문에 열반을 슬퍼하는 아난존자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졌으나 입상과 열반상 사이에 벽이 존재했고, 각각의 방으로 구분되어 존치되었다는 고고학 증거가 있기 때문에 현존하는 두 불상의 존재 양태를 가지고 픽션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어찌 되었건 많은 방문객은 슬픈 입상과 열반에 든 부처님 상을 바라보면서 아난존자를 떠올리는 중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대한 슬픔’을 묘사한 부처님상이라 믿기도 한다. 하여간 이같은 양식은 싱할라 조각에서 거의 사용되지 않는 제스처다. 12세기의 번창하던 싱할라 불교의 고졸한 중세 미학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주강현 해양문명사가 [불교신문37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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