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婆娑) 이사금(尼師今)

 

일성(逸聖)은 적통의 자식이지만 위엄과 지혜가 파사(婆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드디어 그를 추대했다. 파사(婆娑)는 검약하며 씀씀이를 아끼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나라 사람들이 가상히 여겼다.
2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3월 주군(州郡)을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죄인들을 조사하여 두 가지 사형죄가 아니면 모두 풀어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지금 창고가 비어 있고 무기가 무뎌졌는데 혹시라도 홍수·가뭄 같은 재난이 있거나 변방이 위태로워지면 어떻게 대응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관계 기관에 명령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만일에 대비하라.”
5년 봄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波珍湌)으로 삼았다.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이 즉위했다. 유리왕(儒理王)의 둘째 아들이다.

혹은 유리(儒理)의 동생인 나로(奈老)의 아들이라 한다.

비(妃)는 김씨(金氏) 사성부인(史省夫人)이며 허루갈문왕(許婁葛文王)의 딸이다. 처음에 탈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신료들이 유리(儒理)의 태자 일성(逸聖)을 추대하려 했다. 어떤 사람이

일성(逸聖)은 적통의 자식이지만 위엄과 지혜가 파사(婆娑)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니, 드디어 그를 추대했다. 파사(婆娑)는 검약하며 씀씀이를 아끼고 백성들을 사랑하여 나라 사람들이 가상히 여겼다.
2년 봄 2월에 친히 시조묘(始祖廟)에 제사지냈다.
3월 주군(州郡)을 돌며 위무하고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죄인들을 조사하여 두 가지 사형죄가 아니면 모두 풀어 주었다.
3년 봄 정월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지금 창고가 비어 있고 무기가 무뎌졌는데 혹시라도 홍수·가뭄 같은 재난이 있거나 변방이 위태로워지면 어떻게 대응할 수가 있겠는가? 마땅히 관계 기관에 명령하여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하고 군사를 단련하여 만일에 대비하라.”
5년 봄 2월에 명선(明宣)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윤량(允良)을 파진찬(波珍湌)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고타군주(古陁郡主)가 푸른 소를 바치고 남신현(南新縣)의 보리가 가지를 쳤다. 크게 풍년이 들어 다니는 사람들이 식량을 휴대하지 않았다.

6년 봄 정월에 백제가 변경을 침범했다.

2월에 길원(吉元)을 아찬(阿湌)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객성(客星)이 자미(紫微)에 들어갔다.

8년 가을 7월에 명령을 내려 말했다.

“짐(朕)이 부덕함에도 나라를 다스리는데,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경계하여 덕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은 경외감을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하다. 마땅히 성루(城壘)를 수리하여 침입에 대비하라.” 이 달에 가소성(加召城)마두성(馬頭城)을 쌓았다.
11년 가을 7월에 사자(使者) 10인을 나누어 보내 주주(州主)·군주(郡主)가 공적인 일에 힘쓰지 않고 전야(田野)가 많이 황폐하도록 방치한 자는 자리에서 내치도록 했다.
14년 봄 정월에 윤량(允良)을 이찬(伊湌)으로 삼고 계기(啓其)를 파진찬(波珍湌)으로 삼았다.

2월에 고소부리군(古所夫里郡)에 순행하여 나이 많은 사람들을 친히 위문하고 곡식을 하사했다.

겨울 10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지진이 일어났다.

15년 봄 2월에 가야(加耶) 적(賊)이 마두성(馬頭城)을 포위하니 아찬(阿湌) 길원(吉元)을 보내 기병 1천을 이끌고 격퇴하게 했다.

가을 8월에 알천(閼川)에서 열병(閱兵)을 했다.

17년 가을 7월에 갑자기 바람이 남쪽으로부터 불어와 금성(金城) 남쪽의 큰 나무를 뽑아 버렸다.

9월에 가야(加耶) 사람들이 남쪽 변경(鄙)을 습격하니, 가성주(加城主) 장세(長世)를 보내 막게 했는데 적에게 죽임을 당했다. 왕이 노하여 날쌘 군사 5천을 이끌고 출전하여 패배시키니 포로로 잡은 숫자가 심히 많았다.

18년 봄 정월에 군대를 일으켜 가야(加耶)를 정벌하려다가 그 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여 중지했다.

19년 여름 4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가뭄이 들었다.

21년 가을 7월에 우박이 쏟아져 날던 새가 죽었다.

겨울 10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지진(地震)이 일어나 백성들의 가옥을 무너뜨려 죽은 자가 생겼다.

22년 봄 2월에 성을 쌓고 월성(月城)이라 이름했다.

가을 7월에 왕이 월성(月城)으로 거처를 옮겼다.

23년 가을 8월 음즙벌국(音汁伐國)실직곡국(悉直谷國)이 강역을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그에 대한 결정을 요청했다. 왕은 이를 곤란하게 여겨

금관국(金官國)의 수로왕(首露王)이 연로하고 지식이 많다.”라고 하고서 그를 불러 물었다. 수로왕이 논의를 일으켜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音汁伐國)에 속하게 했다. 이에 왕은 6부에 명해 함께 모여 수로왕(首露王)에게 향연을 베풀도록 했다. 5부는 모두 이찬(伊湌)으로 접대를 주관하게 했으나, 한기부(漢祇部)만은 지위가 낮은 자로 이를 주관하게 했다. 수로왕(首露王)은 노하여 종(노, 奴) 탐하리(耽下里)에게 명해 한기부(漢祇部)의 우두머리 보제(保齊)를 죽이고 돌아갔다. 그 종은 음즙벌(音汁伐)의 우두머리 타추간(陀鄒干)의 집으로 도망해 의탁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종을 찾았으나 타추(陀鄒)는 보내지 않았다. 왕이 노하여 군사로 음즙벌국(音汁伐國)을 정벌하니, 그 우두머리와 무리가 스스로 항복했다. 실직(悉直)·압독(押督)의 두 국왕이 항복해 왔다.

겨울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피었다.

25년 봄 정월에 많은 운석들이 비처럼 쏟아졌는데 땅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가을 7월에 실직(悉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내어 평정하고 그 나머지 무리를 남쪽 변경(鄙)으로 옮겼다.

26년 봄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했다.

2월에 서울(경도, 京都)에 눈이 3척(尺)이나 내렸다.

27년 봄 정월에 압독(押督)에 행차해 빈궁한 자들을 진휼했다.

3월에 압독(押督)으로부터 돌아왔다.

가을 8월에 마두성주(馬頭城主)에게 명해 가야를 정벌하게 했다.

29년 여름 5월에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이 굶주렸다. 사자(使者)들을 10길로 나누어 보내 창고를 열어 진휼을 베풀었다. 군대를 보내 비지국(比只國)·다벌국(多伐國)·초팔국(草八國)을 아울렀다(并).

30년 가을 7월에 누리(蝗)가 곡식을 해쳤다. 왕이 산천에 두루 제사지내 기원하니 누리(蝗)가 사라지고 풍년이 들었다.

32년 여름 4월에 성문이 저절로 무너졌다.

5월부터 가을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33년 겨울 10월에 왕이 세상을 떠나니 사릉원(蛇陵園) 안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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