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읍국가시대부터 시작된 줄구들과 굴뚝
우리나라 온돌난방의 시원양식인 ‘줄구들’2)은 성읍국가시대부터 만들기 시작하였다. 줄구들 난방법은 방안에 한줄, 또는 두세 줄로, ‘두둑’을 쌓아 ‘구들고래’를 만들고 ‘구들장’을 덮고, 방안 구들고래 시작점에 불 때는 ‘아궁이(噴火口)’를 만들었다. 그리고 구들고래가 끝나는 지점 밖에, 구들고래를 통과한 연기를 내보내는 ‘굴뚝(煙突)’을 만들었다.
‘세죽리집터’는 움집안에서는 ‘아궁이’, ‘구들고래’ 자리들이, 집밖에서는 ‘굴뚝’자리가 확인되었다. 줄구들을 계승 발달시킨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의 ‘동대자집터’, ‘부소산성안의 집터’ 등에서 방안의 아궁이와 구들고래, 방밖의 굴뚝 자리들이 발굴되었고, 다음 남북국시대에서는 ‘황룡사지 동편 시가지 집터’, 발해의 ‘궁성안 침전터’ 등에서 방안의 아궁이와 구들고래, 방 밖의 굴뚝자리가 발굴되었다.
고구려의 부엌간에는 독립된 부뚜막과 굴뚝이 있었다
고구려의 건축은 ‘부엌간’, ‘오양간’, ‘마구간’ 등이 하나의 독립된 채(棟)로 지어져, 기능에 의한 채(棟)의 공간분화가 이루어진다. 고구려 안악제3호무덤 벽화는 이러한 채(棟)의 공간분화를 입증하여 주고 있다. 이 벽화의 ‘부엌간’ 그림은 맞배집 안에 부뚜막과 부뚜막 아궁이에 불 지피는 시녀, 시루에 음식을 담는 시녀, 상 차리는 시녀, 그리고 아궁이 앞의 두 마리 개들이 그려져 있고 부엌간 측면 벽에는 출입문과 부뚜막 굴뚝이 그려져 있다. 이 부엌간 그림이 한국건축사 최초의 굴뚝그림이다. 한편 고구려의 ‘철제부뚜막’이나 ‘도제부뚜막’은 부뚜막과 한 몸으로 이루어진 굴뚝을 보여준다.
줄구들은 온돌로 발달하고, 여러 모습의 굴뚝을 세우게 되었다
줄구들 난방법은 삼국시대를 거쳐 12세기경의 고려시대에 이르면, 이미 방안 바닥 전체에 ‘바닥구들’3)을 놓아 난방을 하는 ‘온돌(溫突)’로 발달하게 되었고, 자연히 굴뚝도 여러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고려시대 말(12세기 경)의 회암사 절터(檜巖寺址)는 조선 성종3년 정희대비(貞憙大妃, 세조의 왕후)가 중창(重創)한 절터이다.4) 이 절터의 아궁이, 구들고래, 굴뚝자리들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다양한 굴뚝들을 살펴 볼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땔감은 여러 가지 굴뚝을 만든다
농촌집이나 산간집의 땔감은 연기가 많이 나는 짚, 마른 풀, 수수깡, 나뭇가지 등이고, 중상류주택, 관아, 향교, 서원, 궁궐의 주된 땔감은 장작이다. 그간 궁궐에서는 ‘숯’만을 땔감으로 하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는 잘못된 주장이라고 이미 말한바 있다. 경복궁 교태전터(交泰殿址) 발굴 때, 발굴된 굴뚝이 서있는 아미산 화계 첫째 단까지 이르는 연도(煙道)와 창경궁 통명전(通明殿) 바닥 보수때의 구들고래에서도 ‘검댕’들이 짙게 끼여 있었다. 또한 창덕궁 후원 기오헌(寄傲軒) 온돌방 보수 때에도 ‘분화석(焚火石)’5)과 구들고래, 방 밖 굴뚝자리까지 이어진 연도(煙道)가 온통 검댕으로 그을려 있었다. 이는 바로 숯보다는 장작이 주된 땔감이었음을 입증하여 주는 것이다. 더욱이 궁궐 굴뚝의 지붕 위에는 집 모양 토기인 ‘연가(煙家)’를 여러개 얹어, 이 연가의 창구멍으로 연기를 내뿜게 하고 있는것이나, 『 경국대전(經國大典)』, 「 공전(工典)」에 “각사(各司)에 땔감을 마련하는 ‘시장(柴場)’을 두도록 한다” 한 것 모두는, 숯만을 땔감으로 한것이 아니라, 장작을 주된 땔감으로 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굴뚝을 설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간이형 굴뚝(簡易形煙突)은 방밖 처마 밑이나, 툇마루 밑, 또는 마당 한곳에 설치하는 굴뚝이다. 주택이나 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의성김씨 대종가집의 안방 툇마루 밑 간이형 굴뚝은 땔감이 연탄으로 바뀌면서 독립형의 높은 굴뚝으로 개조되었다. 원래 아침저녁 끼니를 잇기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여, 안방 툇마루 밑 기단위에 굴뚝을 만들어, 아침 저녁 부엌 부뚜막 밥 짓는 연기가 찬 공기와 만나 안마당에 낮게 퍼지게 한 것이라는 말이 전하여 오나, 경주 최부자집(慶州崔植氏家) 가훈(家訓)을 생각하면 궁색한 이야기라 생각한다. 한편 내소사(來蘇寺) 승방 마당가에 설치하였던 간이형 굴뚝은 아예 철거되었고, 오어사(吾魚寺) 굴뚝은 남아있다. 이들 굴뚝들의 연기들도 마당을 낮게 덮어 구름바다(雲海)를 이루면서, 한편 마당을 소독하는 기능도 있었다고 한다.
독립형 굴뚝(獨立形煙突)은 주택과 궁궐, 서원, 향교 등, 건축의 몸채와 떨어진 곳에 독립된 건축물로 설치한 굴뚝이다. 중인주택인 다동 백씨가(茶洞白氏家)나 무교동신씨가(武橋洞 辛氏家)는 물론, 연경당의 굴뚝은 모두 검정벽돌을 쌓아 만든 독립형 굴뚝들이었다. 경주 최식씨가(속칭 최부자집) 안마당에서는 벽돌담을 낮게 쌓은 장고(醬庫)와 함께 높게 서 있고, 해남 녹우당 안마당에서는 화단과 함께 서 있다. 경복궁 교태전 아미산이나,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화계(花階)위에 세웠다. 기와지붕을 덮고, 연가(煙家) 여러 개를 얹어 놓아 연가 창구멍으로 연기를 배출한다. 굴뚝의 면에는 문채판(紋彩板)을 두어 장식하기도 한다.
복합형 굴뚝(複合形煙突)은 담장과 굴뚝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굴뚝이다. 연경당 안채의 굴뚝은 뒷마당 반빗간채와의 사잇담에 세웠고, 경복궁 대비전인 자경전 굴뚝은 뒷마당 담장과 담장 사이에 세웠다. 특수형 굴뚝(特殊形煙突)은 벽면이나 기단면에 연기구멍(排煙口)을 설치한 굴뚝이다. 벽면 설치의 예는 연경당 중문간 행랑채 방화벽과 강령전 행랑채벽의 예들이 있고, 또 정자나 누의 고설식 온돌(高設式溫突) 굴뚝은 누마루 밑 벽면에 설치한다. 기단면 설치 굴뚝은 주합루와 성균관 명륜당의 굴뚝들이다. 특히 주합루 굴뚝은 북쪽 기단의 동, 서 두 곳에 각각 아궁이에 이르는 함실아궁이(函室焚口) 입구와 나란히 배연구(排煙口)를 두어, 구들고래를 돌아 연도(煙道)를 통하여 나오는 연기를 배출한다. 아산 건재고택의 사랑채 기단 면에 도배연구가 있어, 구들고래를 돌아 나온 연기들이 아침 저녁의 찬공기와 만나 마당을 온통 구름바다로 덮는다. 한편 까치구멍집의 합각면 ‘까치구멍’도 특수형 굴뚝의 하나로, 지붕이 파란 하늘에 연기를 피어오르게 하듯 한다.
우리의 굴뚝은 여러 가지로 쌓아 다양한 몸새를 이루고 있다6)
① 흙+막돌 쌓기 : 지방 농가의 일반적인 굴뚝이다. 크고 작은 막돌들을 흙 반죽으로 쌓아 올려 만든 굴뚝으로 처마 밑에 설치한다. 굴뚝 연기구멍위에는 점토로 빚 어 구은 항아리 모양의 연가(煙家)를 얹어 센 바람에도 연기를 잘 뿜어 낼 수 있게 한다.
② 막돌과 기와조각 쌓기 : 막돌과 기와조각들을 회진흙반죽이나 회반죽으로 쌓아 올리고 지붕을 덮은 굴뚝이다, 배연구는 굴뚝지붕 중앙에 설치하고 암키와로 덮은 것과 굴뚝 면에 설치한 것 이있다. 해인사, 운문사의 굴뚝은 암키와로 배출구를 덮은 것이고, 마곡사의 것은 굴뚝 벽면에 배연구를 뚫은 것이다.
③ 검정벽돌+기와조각 쌓기 : 검정벽돌, 기와조각들을 회진흙반죽이나 회반죽으로 쌓아 올리고, 기와지붕을 덮고, 연가(煙家)를 얹어 연기를 배출한다. 중인주택이나 제택(第宅, 양반집과 궁집), 궁궐의 독립형 굴뚝이나 복합형 굴뚝은 이렇게 쌓는다. 기와지붕과 연가를 얹고, 굴뚝 면에는 만자무늬(卍字紋), 아자무늬(亞字紋) 등과, 길상문자무늬(吉祥紋), 화초무늬(花草紋) 등으로 치장한다.
④ 빨강벽돌 쌓기 : 궁궐의 굴뚝 쌓기이다. 조선시대에는 빨강벽돌이나, 주칠(朱漆)한 가구들은 궁중에서만 사용가능하였다. 지붕을 덮고 지붕 가운데에 연가(煙家)들을 얹어 연기를 배출한다. 경복궁 교태전 뒤뜰 아미산 화계(花階)위에 선 굴뚝은 육모 평면의 화강석기단위에 빨강벽돌을 층층이 쌓아 굴뚝 몸통을 이루고, 몸통 각 면문채판에는 화초무늬와 동물무늬로 장식하고, 문채판 아래 위로는 더 작은 빨강벽돌들을 끼워 넣어 마무리 하였다. 지붕을 덮고 여러개의 연가를 놓아 연가 창구로 연기를 배출한다. 또 자경전 뒤뜰 굴뚝은 담장과 담장 사이에, 장대석 지대석(地臺石)위에 빨강벽돌을 쌓아올리고, 지붕과 연가(煙家)로 마감하였다. 굴뚝 벽면에는 장방형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테두리 안에 십장생무늬를 수놓아 장식하였다.
⑤ 검정벽돌+빨강벽돌 쌓기 : 검정벽돌과 빨강벽돌로 띠를 이루어 쌓은 굴뚝이다. 창덕궁 대조전 뒤뜰 화계(花階)앞의 굴뚝이 바로 이런 굴뚝이다. 굴뚝 면의 아래 위 두 곳에 문채판을 두어 장식하였고 지붕과 연가를 설치하였다. 이들 자경전과 대조전 굴뚝은 창호와 난간 살대짜임, 각종 석물들, 또한 주합루와 기오헌의 분화석(焚火石) 등과 함께, 모두가 공예품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굴뚝은 뜰(庭園)을 구성하는 대석(臺石), 정료대(庭燎臺), 담장들과 함께 수직적 구성요소의 하나로, 우리의 뜰이 여러가지 표정을 짓게한다
우리 집터 둘레는 담장과 행랑채로 둘러막고, 그 안에 안채, 사랑채, 별당, 정자, 사당, 곳간채 등을 연이어 짓거나, 서로 떨어진 별채로 지어서, 여러개의 크고 작은 마당들을 이룬다. 이들 마당들, 특히 뒷마당과 이어진 동산에는 화계를 쌓고, 화계 앞이나 화계 위에, 물확(水確), 석연지(石蓮池), 석함(石函)등 여러가지 석물(石物)들을 늘어놓고, 화초와 나무를 심고, 굴뚝과 담장을 세워 시각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풍요롭게 한다. 더욱이 몸채의 창호나 난간의 살대짜임 무늬가 담장과 굴뚝의 무늬로 반복되고, ‘수(壽)’, ‘복(福)’과 같은 길상문자무늬나 화초무늬, 나아가 십장생무늬를 담장과 굴뚝에 수 놓음으로서, 공간마다 서로 다른 공간정서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 통일되게 한다. 즉 같은 주제가 장소를 달리하여 나타남으로서 변화를 이루고, 같은 주제의 반복으로 통일성을 이루게 한다. 곧 ‘통일성에서의 변화’를 손쉽게 이루는 것이다.
또한 뜰(庭園)의 수평적 요소들이나 수직적 요소들은 하나의 공간속에서 연속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흐름으로, 밝은 면과 그늘진 면의 대비, 크고 작은 그림자들의 변화를 이루어 더더욱 풍요로운 표정을 짓게 한다.
한편 천은사 승방 굴뚝이나, 내소사 승방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나, 아산 건재고택 사랑채 기단면의 배연구로 아침 저녁 배출되는 연기가 이루는 구름바다는 바라보는 이를 피안(彼岸)의 세계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1) 김홍식, [암사동움집 복원고(復元考)],≪문화재≫, 제18호, 문화재관리국, 1985. 43쪽. 강원도산골방언.
2)‘줄구들’은 ‘ㄱ자형구들’ 주남철, [온돌과 부뚜막의 고찰] ≪문화재(文化財)≫ 20호, 1987. 또는 ‘쪽구들’ 송기호 ≪한국고대의 온돌≫, 서울대출판부, 2006. p2로 이름 지은 것을, 주남철. ≪새로 쓴 한국의 주택건축≫(가제, 고대 출판부 출간 준비 중)에서 새로 지은 이름(용어)이다.
3) (주2)에서와 같이, 새로 지은 이름[용어]이다. ‘바닥구들’은 방바닥 전체에 ‘구들고래’와 ‘구들장’을 놓은 구들로, 바로 ‘온돌’을 말한다.
4) 주남철, ≪한국건축사≫ 고려대학교출판부, 2010 개정판2쇄 358-359쪽
5) 기오헌과 주합루의 아궁이에는 두꺼운 방형의 돌판 상면을 움푹하게 파낸, 불 지피는 받침돌을 놓아 불기와 연기를 구들고래로 보낸다. 이 판돌을 ‘분화석(焚火石)’이라 이름 짓는다. 주남철
6) 주남철, ≪한국건축의장≫ 일지사, 2014. 제3판11쇄. 180-188쪽. 주남철, ≪한국의 정원≫ 고려대학교출판부, 초판4쇄, 2015. 103-105쪽.
글. 주남철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유산 > 한국의 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온돌과 아랫목 (0) | 2015.12.17 |
---|---|
한국의 뒷간 (0) | 2015.11.16 |
품격과 예술혼이 집결된 기록문화, 디자인의 결정체. 편액·주련·기문 (0) | 2015.09.07 |
한옥에서만 볼 수 있는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건축부재 보(樑) (0) | 2015.08.10 |
뒷산을 닮은 선, 우리 집이 가진 심성을 보여주는 지붕 (0) | 201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