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릉(懿陵)
의릉(懿陵)
20대 경종(景宗)
- 위치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산1-5번지
- 지정번호 : 사적 제204호
- 조성시기 : 1724년(영조 1)
- 능의구성
의릉(懿陵)은 20대 왕 경종(景宗)과 그의 (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봉분에는 난간석을 설치하였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망주석 세호는 모두 위를 향해 기어오르게 조각되어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옷을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하였다.
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 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 능의역사
1724년(경종 4) 8월 25일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하였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하였다.
사적 204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나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되었다.
- 경종(景宗) 생애이야기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 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르렀다.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사되는 일이 있었다. 이 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가 대신하여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1720년 6월 13일 경덕궁 숭정문에서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으나 재위 4년간의 재위시절에도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재위기간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창경궁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1721년(경종 즉위)과 1722년(경종 2) 신축, 임인 두 해에 걸쳐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큰 옥사가 일어났는데 이를 신임사화라고 한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되어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종은 1721년(경종 즉위) 8월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자 노론 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노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하였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하였다. 1722년(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고변을 기점으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의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 생애이야기
선의왕후는 1705년(숙종 31) 10월 29일 함원부원군 어유구의 딸로 태어났다. 경종이 세자 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병을 앓다가 1718년(숙종 44) 승하하자, 같은 해 9월 13일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720년 6월 13일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선의왕후는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소생없이 승하하였다.
- 일화
선의왕후와 경종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다. 경종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둘 희망이 없다고 여겨진 선의왕후는 종친 중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후사를 정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경종비를 중심으로 한 궁중의 일각에서는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의 아들 관석을 입양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종 즉위 1년 만인 1721년 8월의 어느 날, 하룻밤 사이에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아무리 병약하다고는 하나 즉위 1년 후 세제를 책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노론은 소론과의 알력 다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제 책봉 뿐 아니라 세제의 대리청청까지 주장하였고, 계속적인 당쟁과 숙청의 바람을 몰고 왔다. 이러한 어지러운 정국의 한 가운데에, 결국 선의왕후의 양자 입양은 무산되었다.
2.혜릉(惠陵)
혜릉(惠陵)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0-2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718년(숙종 44) 4월 19일
- 능의구성
혜릉(惠陵)은 동구릉 서측 능선 숭릉과 경릉 사이에 조성된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의 단릉이다. 비교적 낮은 구릉에 조성되었으며, 능역이 전반적으로 좁은 형태이다. 석물의 크기 또한 다른 왕릉 보다 작게 만들어졌다. 단의왕후가 승하 시에는 세자빈의 신분이었으므로, 원의 형식으로 단출하게 지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곡장 안의 봉분은 병풍석 없이 12칸의 난간석만 둘러져 있고, 봉분 주위에는 네 쌍의 석호와 석양이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문석인은 173cm의 키에, 눈을 치켜뜬 차가운 이미지로 조각되었다. 무석인은 문석인보다 약 10cm 큰 키에, 이목구비가 상당히 이국적인데 특히 치아를 잔뜩 드러내 놓고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망주석 역시 다른 능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만들었는데 조각된 세호의 좌우 방향이 다르게 되어 있다. 장명등은 현재 터만 남아 있고 사라진 상태이다.
- 능의역사
1718년(숙종 44) 경종의 비 단의왕후 심씨의 혜릉을 조성하였다. 단의왕후는 1718년(숙종 44) 2월 7일 소생이 없이 창덕궁 장춘헌에서 세자빈의 신분으로 승하하였다. 2월 8일에 소렴하고, 9일에 대렴하였다. 산역은 각 도에서 승군 1,000명을 징발하여 조성하였다. 4월 16일에 발인하여, 19일 현종의 능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하였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하여,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고 하였다.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는 서울 성북구 석관동의 의릉에 같이 모셔져 있으나, 일찍 승하한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은 이곳에 홀로 조성되었다. 6.25로 인해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타서 주춧돌만 남은 상태였으나 1995년 새로 복원하여 왕릉의 면모를 다시금 갖추게 되었다.
-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沈氏) 생애이야기
단의왕후는 1686년(숙종 12) 5월 21일 회현동에서 청은부원군 심호(沈浩)의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순하면서도 의젓하였으며 타고난 지혜로움이 있었다. 1696년(숙종 22) 11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간택에 참여하고 집에 돌아간 후에는 손수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집안의 여러 사람들에게 대접했으며 두 번째 간택하던 때는 종일토록 눈물을 흘리며 부모의 곁을 떠나는 것을 슬퍼했다고 한다.
별궁에 들어와 거처하게 되자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경종이 즉위하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 2월 7일 병을 앓다가 3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 해 4월 18일 숭릉 왼쪽 산줄기에 안장했으며,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추봉했다.
- 일화
단의왕후는 어려서부터 슬기롭고 의젓하면서도 유순했으며, 첫 돌이 지나기 전에 말을 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또한 놀이를 하더라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으며, 3세 때 할머니를 공양하는데 정성과 효도가 돈독하고 지극했다고 한다. 말은 항상 단정하고 조심스럽게 했고, 물건을 처음 보면 희귀한 것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어른에게 먼저 바쳤으며, 비록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어른이 먹으라고 명하지 않으면 멋대로 음식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렸다.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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