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명릉(明陵)
명릉 왕릉, 인현왕후릉
인원왕후릉
명릉(明陵)
19대 숙종(肅宗)
-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 조성시기 : 1701년(숙종 27)
- 능의구성
명릉(明陵)은 19대 숙종(肅宗)과 그의 첫 번째 계비(繼妃)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두 번째 계비(繼妃)인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명릉은 숙종의 명에 의해 능역에 드는 인력과 경비를 절감하여 부장품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하는 등 간소한 제도로 조영하였는데, 이는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게 되었다. 8각 장명등도 4각으로 바뀌었으며, 능침에는 병풍석을 두르지 않았다.
- 능의역사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가 1701년(숙종 27) 승하하자 숙종은 능호를 명릉이라 하여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영하였다. 조영 당시 능의 오른쪽을 비워두라는 우허제(右虛制)를 전교하였다. 1720년(숙종 46) 60세의 나이로 승하한 숙종은 생전에 바라던 대로 인현왕후의 오른쪽 빈자리에 잠들게 되었다.
한편 인현왕후 승하 후 두 번째 계비로 들어왔던 인원왕후는 사후 부군인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하여 인현왕후와 숙종이 잠든 명릉에서 약 400보 떨어진 언덕에 자신의 능지를 미리 잡아두었다.
그러나 인원왕후가 1757년(영조 33) 71세로 승하하였을 때, 영조는 미리 정해둔 자리를 두고 지금의 자리에 그녀를 모셨다. 인원왕후가 정해둔 자리에 능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넓은 소나무 숲을 벌채하는 등 막대한 인력과 국고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연으로 인원왕후는 생전에 소원했던 것보다 숙종과 더 가까운 곳에 묻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숙종의 능보다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에 잠들게 되었다.
- 숙종(肅宗) 생애이야기
숙종은 1661년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현종과 명성왕후의 원자로 태어났다. 1667년(현종 8) 세자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승하한 1674년(현종 15)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은 46년이었다. 숙종 시대에는 당파 간의 정쟁이 극에 달하여, 붕당정치가 파경을 맞을 위기에 처했다. 숙종 즉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을 통해 대거 실각하였고, 남인을 물리치고 실세를 얻은 서인은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대립하였다.
이 때 숙종과 중전인 인현왕후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는데,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가 아들을 낳았다. 남인은 이를 기회로 삼고자 소의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추대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노론의 무리들을 처결,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은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군사제도를 정비하는 등의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1720년(숙종 46) 6월 8일 경덕궁의 융복전에서 6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 일화
사료가 밝히는 사실과는 거리가 있지만, 숙종과 인원왕후의 능이 이곳으로 정해진 연유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숙종이 하루는 평상복을 입고 민심을 살피기 위해 궐을 벗어나 어느 냇가를 지나가고 있었다. 그 때 냇가에서 한 젊은이가 울고 있는 것이 보여 연유를 물으니, 갈처사라는 유명한 지관이 이곳에 무덤을 쓰면 좋다고 해서 땅을 파는데, 아무리 파도 물이 고이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숙종은 그 지관이 장난을 쳤다고 여기고, 젊은이를 불쌍히 여겨 관청에 가서 쌀 300석을 받아올 수 있도록 적은 서신을 쥐어주었다.
그리고는 지관이 살고 있는 허름한 오두막집을 찾아가 청년의 일을 따져 물었다. 그러자 지관은 “모르면 잠자코 계시오. 저 땅은 무덤자리로 들어가기도 전에 쌀 300석을 받고 명당자리로 들어가는 자리라오!”라며 따져 묻는 숙종에게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그의 신통함에 놀라 자신이 국왕인 것을 밝히고, 훗날 숙종이 묻힐 묘자리를 골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명릉 자리가 바로 신통한 지관 갈처사가 택한 입지라고 한다.
-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 생애이야기
인현왕후는 1667년(현종 8) 4월 23일 여양부원군 민유중의 딸로 태어났으며,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함에 따라 1681년(숙종 7) 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당시 조정은 당파간의 분쟁이 한참이었는데, 왕의 여인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는 암투마저 벌어졌고, 인현왕후는 한 때 이러한 싸움의 희생양이 되었다.
인현왕후와 숙종 사이에 아이가 없던 차에 숙종의 총애를 받던 소의 장씨(훗날 희빈 장씨)가 득남을 하였고, 당시 열세였던 남인 세력은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이에 반대하는 서인 세력들을 숙청하였다. 인현왕후는 이 때 함께 폐위당하여 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갑술환국을 통해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음과 동시에 복위되어 궐로 돌아왔다. 1700년(숙종 26) 원인 모를 병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는데, 승하 후 희빈 장씨의 거처 부근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이 발견되었다. 숙종은 이에 분노하여 총애하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 일화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소설가인 김만중이 그의 말년에 유배지에서 쓴 한글 소설이다. 소설의 주인공 사씨는 성품이 곱고 후덕한 인물이지만, 남편 유연수의 교활한 첩 교씨의 모함을 받아 결국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유연수의 첩 교씨가 아들을 낳은 후 정실부인이 되기 위해 갖은 계략을 꾸미며 그녀를 몰아낸 것이다.
소설은 한림학사 유연수의 처 사씨의 바른 품행과 그녀를 시기하는 악한 첩 교씨가 그녀를 음해하기 위해 꾸미는 악행들, 그리고 소설 끝에 가서는 누명을 썼던 사씨가 귀양지에서 돌아오고 악행이 들통난 교씨는 처형당하는 권선징악 구조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출 사건을 모델로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다. 서인이었던 김만중은 이 소설로서 인현왕후를 폐비하는 것이 부당함을 밝히고, 스스로의 영화 역시 되찾길 바라던 것으로 여겨지나, 그는 끝내 인현왕후가 복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유배지에서 세상과 하직하였다.
- 인원왕후(仁元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숙종의 두 번째 계비 인원왕후는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로 1687년(숙종 13) 태어났으며, 첫 번째 계비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남편인 숙종이 먼저 승하한 후 1720년(경종 즉위)에 대비가 되었고, 1724년(영조 즉위)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1757년(영조 33) 71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명릉의 오른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 일화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었던 인원왕후가 당시 궁중 생활을 기록하여 엮은 『선군유사(先君遺事)』와 『선비유사(先妣遺事)』가 세간에 소개되었다. 선군유사는 아버지에 관한 회상, 『선비유사』는 어머니에 관한 회상을 말한다. 『선비유사』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궁 안에 머무르시면 새벽에 일어나시어 문 밖에 오셔서 내가 잠에서 깨기를 기다리시고 내가 청하여 “누운 자리에 들어오소서.” 하면 “황송 하노라.” 사양하시고, 내가 청하여 자리를 한 가지로 하고자 하면 반드시 머뭇거려 사양하셨다.
이 두 권의 기록에서 인원왕후는 궁에 들어와 부모님을 그리는 마음과, 중전으로서 부모님과 사사로운 정을 나눌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선군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15세에 이르되 항상 무릎에 두시고 이마를 어루만져 잠깐도 버려두지 않으시더니 내가 이 지위에 오르자 …… 내가 그 좌석이 너무 멂이 민망하여 가까이 옮겨가고자 하면 아버지께서는 종종걸음으로 물러나 사양하셔서 내가 감히 사사로운 정을 펴지 못했다.
훗날 인원왕후는 이 기록을 친정으로 보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이 두 권의 문집과 더불어 발견된 세 권의 문집은 인원왕후가 노년에 썼을 가능성이 높으며, 단아하고도 기품있는 글솜씨가 당시 그녀의 학문과 독서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2.익릉(翼陵)
익릉(翼陵)
-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 조성시기 : 1680년(숙종 6)
- 능의구성
익릉(翼陵)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단릉이다. 봉분에는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다른 왕릉과는 조금 다르게 석주가 아닌 동자석 상단부에 십이간지를 글자로 새겨 놓았다. 문석인은 조관을 쓰고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있다. 뒷면의 관대에는 꽃문양이 보인다.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표정이 살아 있다. 짧은 목에 얼굴을 앞으로 내밀어 턱을 홀 바로 위에 올려 놓은 형상이다. 무석인은 투구에 있는 상모를 뒤로 넘겼다. 갑옷의 어깨 부분에는 아주 작은 도깨비 문양을 넣었고, 소매는 활동하기에 편리하도록 터져 있다. 흉갑 부분은 구름으로 장식되어 있다. 대부분의 석물이 임진왜란 이후의 조선 왕릉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정자각은 능침 언덕 아래에 있다. 현종의 숭릉 정자각과 같이 당시 유행하던 익랑이 딸려 있는 것이 특이하다.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의 참도는 직선으로 경사가 졌으며, 참도 중간에 계단을 두어 지형에 따라 설치하였다.
- 능의역사
1680년(숙종 6) 10월 26일 인경왕후가 승하하자 현재의 위치에 능호를 익릉이라 하여 조영하였다. 숙종 연간에는 왕릉의 능제를 단순화하고 석물을 간소하게 제작하도록 명하였으나, 그 이전에 조영된 능이므로 기본적으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 생애이야기
인경왕후는 광성부원군 김만기의 딸로 1661년(현종 2) 9월 3일 태어났으며, 10세 때인 1670년(현종 11)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어의동 별궁에 들어갔고, 이듬해 4월에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리고 1674년 현종이 승하하고 숙종이 조선 19대 왕으로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20세 때인 1680년(숙종 6) 10월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했다. 전염을 우려한 숙종은 경덕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하였으며, 인경왕후는 발병 8일 만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두 명의 공주가 있었으나 모두 일찍 죽었다.
-일화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는 왕비의 자리에 오르고 머지않아 짧은 생애를 마치게 된다. 그 이후 당파 싸움과 맞물려 숙종을 둘러싼 궁중여인들의 암투가 구중궁궐을 혼란에 빠지게 하는데, 이러한 현실을 소설화한 것이 『사씨남정기』이다. 사씨남정기의 저자는 당대 내로라하는 벼슬길에 오르다 남인의 탄핵으로 인해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 김만중이다. 관료이자 학자였던 그는 바로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김만중은 유배 생활 중에 『사씨남정기』이외에도 여러 편의 글을 저술하였는데, 그 중에는 자신의 어머니 윤씨 부인의 일대기를 그린 『윤부인 행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는 인경왕후가 어렸던 시절, 친할머니인 윤씨 부인의 손에서 길러졌는데, 그 행실을 반듯하게 가르친 덕에 세자빈에 간택되었을 때 주선하고 응대하는 것이 어른 같아 궁중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따랐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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