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영릉(寧陵)

영릉(寧陵)

17대 효종(孝宗)

- 위치 : 경기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 조성시기 : 1673년(현종 14)

- 능의구성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孝宗)과 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의 쌍릉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혈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릉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릉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왕릉의 봉분 주위로는 곡담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왕비의 능에는 곡담이 없어 두 능이 한 영역 안에 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이 없으며 난간석의 기둥에 방위를 표시하는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 놓았다. 이는 간소화된 능제로서, 세조 광릉 이후 사라졌던 조선 초기 십이지신상을 새긴 병풍석이 성종의 선릉에서 다시 나타났다가, 이곳 효종의 영릉에서부터 없어진 것이다.

 

- 능의역사

      효종이 1659년(효종 10) 5월 4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29일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1673년(현종 14) 병풍석에 틈이 생겨 광중에 빗물이 스며들었을 우려가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능을 옮겨야 한다는 천장론이 불거졌다. 따라서 현재의 위치인 세종의 왕릉 영릉 동쪽으로 입지를 정하고 능을 열어보았는데, 그동안의 우려가 무색하게 물이 들어온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결국 영릉은 천장하였으나 이에 연루된 자들은 면직을 당해야 했다.
영릉 천장 다음 해에 인선왕후가 승하하여 효종 왕릉 아래에 인선왕후의 능을 조영하였다.

 

- 효종(孝宗) 생애이야기

      효종은 16대 인조와 인렬왕후의 차남이다. 1626년(인조 4) 봉림대군에 봉해지고, 1636년의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8년 간 머물렀다. 귀국 후인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은 후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 강화 등에 힘쓰며 청나라를 향한 북벌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청나라의 국세가 더욱 일어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고, 1654년 러시아 ·청나라의 충돌사건이 일어나자 청나라의 강요로 오히려 그들을 도와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효종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인한 사회의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동법을 실시하고 상평통보를 주조하였으며,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을 시켜 서양식 무기를 제조하게 하기도 하였다.
1659년(효종 10) 41세의 나이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1636년(인조 14) 청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불과 며칠 만에 강화도까지 점령하였다.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하는데,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해 있다가 청나라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세 번 찧는 굴욕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두 아들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러나 청나라에서 두 사람의 삶은 매우 달랐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의 군대를 의지와 상관없이 큰 고생을 해가며 따라다녀야 했다. 게다가 조선과 우호적이었던 명나라가 점령당하는 것을 목격하여 청나라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반면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조선의 외교관 역할을 하며 국제 감각을 키웠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는 귀국 후 급서하였으며,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등극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청나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가진 자들을 중용하여 은밀히 북벌 계획을 수립하였다.

 

-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생애이야기

      17대 효종의 비 인선왕후는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로 1618년(광해군 10) 12월 15일 경기도 안산에서 태어났다. 1631년(인조 9) 효종이 봉림대군으로 있던 시절, 그와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에 봉해지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심양에서 8년간의 볼모생활을 하고 돌아와 세자빈이 되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에 진봉되었다. 1659년(효종 10) 효종이 죽고 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왕대비로서 효숙(孝肅)의 존호를 받았다. 소생으로는 현종과 6명의 공주를 두었다.

 

-일화

숙경이는 내일 출가시키게 되었다. 그 아이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하겠지 생각하니 가지가지 마음을 진정치 못하겠구나. 언제 너희가 들어올까 눈이 감기도록 기다리고 있다.
위의 편지글은 인선왕후가 출가한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막내딸을 품에서 떠나보내면서 느끼는 쓸쓸한 심정과, 이미 혼인한 딸을 그리워하는 모정을 담고 있다. 인선왕후가 한글로 써서 자신의 딸과 친지들에게 보냈던 언간은 현재 약 70여 점이 전해지고 있다. 이 언간에는 왕실에서의 생활이 잘 드러날 뿐만 아니라 위의 편지와 같이 평범한 일상과 가족애를 느낄 수 있는 인간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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