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국보322-1호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선서원길 216-27(옥산리 7) 옥산서원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 1145년(고려 인종 23년)에 삼국시대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편찬한 것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와 함께 삼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로 인식되고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1573년(선조 6) 경주부(慶州府)에서 인출(印出)하여 옥산서원에 보내준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새긴 원판(原板)과 조선 태조 때에 개각(改刻)한 것, 중종 때 다시 개각한 것 등 3종의 판(板)이 종류별로 섞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총 9책으로 구성된 완질본(完帙本)이자 인출상태와 보존상태도 양호하다. 또한 1573년 당시 유통경로와 더불어 사용한 종이와 장정(裝幀) 양식 등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 조선시대 학술 동향은 물론 목판인쇄 사정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삼국사기 국보322-2호
소 재 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136(태평로1가 84) 성암고서박물관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인종 23년(1145)경 김부식(金富軾)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정치적인 흥망과 변천을 중심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인종의 명에 따라 김부식(金富軾)의 주도하에 11명이 참여하여 편찬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는 우리나라 최초의 관찬사서(官撰史書)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반영된 역사의식의 객관성과 민족자아의식에도 높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1512년까지 증보된 보각판에 기초하여 찍은 인출본으로, 인출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총 9책의 낙장이 없는 완질본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판각본이 혼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고려 및 1394년 잔존 목판본의 조성형식과 보존상태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간행한 경위는 경주부윤(慶州府尹) 이계복(李繼福)의 『삼국유사』중간에 밝힌 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우리나라의 삼국본사(三國本史)와 유사(遺事) 두 책이 다른 데서는 간행된 적이 없고 본부(경주부)에 판이 있기는 하지만 오래되어 판이 망가져 한 줄에 겨우 4∼5자 밖에는 알아볼 수 없다’고 한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책의 크기는 가로 20.7㎝, 세로 30.2㎝이며, 원판이 닳아서 복구할 수 없는 곳, 잘못된 글자, 빠져 있는 글자 등의 결점은 있지만삼국사기발(三國史記跋)에는, '경주에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인본(印本)이 연대가 오래되어 망가져서 세상에는 사본(寫本)만이 돌아다니고 있다. 안렴사(按廉使) 심효생(沈孝生)이 한 벌은 구하여 전부사(前府使) 진의귀(陳義貴)와 간행할 계획을 세워 계유칠월(癸酉七月)에 간행에 착수했다가 모두 이임(離任)하고 그 해 10월에 김거두(金居斗)가 관찰사(觀察使) 민개(閔開)의 명을 받들어 사업을 계속하여 갑술(甲戌, 1394)에 일을 마쳤다' 라고 하였다. 이 두 개의 발(跋)에 의하여 『삼국유사』는 조선조에 와서 태조(太祖) 3년(1394)에 처음 간행하였고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종(中宗) 3년(1512)에 중간(重刊)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