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국보329호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송월길 52(송월동 1-1) 국립기상박물관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 측우기(測雨器)’는 조선 시대 충남 지역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公州監營, 錦營)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1915년 경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가 국외로 반출한 뒤 1971년 일본에서 환수되어 서울 기상청이 보관해 오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중앙정부에서 측우기를 제작해 전국의 감영(監營)에 보냈기 때문에 여러 점이 만들어졌으리라 예상되지만, 지금은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 측우기(測雨器)’만 유일하게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23년(1441년) 8월 18일자 기록에 의하면 서운관(書雲觀, 기상관측 기관)에  대(臺)를 설치해 비를 받아 강우량을 측정했다고 하며, 이듬해 1442년 5월 8일에 측정방식이 미진해 다시 원칙을 세웠다. 이때의 원칙대로 만들어진 것이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 측우기(測雨器)’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관측소장을 지낸 와다 유지(和田雄治)에 의하면, 1915년 경 국내에 알려진 측우기는 총 5기, 측우대는 총 10기였다고 한다. ‘공주 충청감영(忠淸監營) 측우기(測雨器)’의 제작시기와 크기 등에 대해서는 중단의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확인된다. 명문에 의하면 이 측우기(測雨器)는 1837년(헌종 3년)에 만들었으며 높이는 1자(尺) 5치(寸), 지름 7치, 무게 11근으로 오늘날 치수로 환산하면 높이 31.9cm, 지름 14.9cm, 무게는 6.2kg에 해당한다. 이는 세종 대에 처음 만들어진 측우기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또한, 바닥면의 명문을 통해 통인(通引), 급창(及唱), 사령(使令)의 직책을 가진 관리들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원통형 표면에 상단(上端)과 중간 두 곳에 융기된 마디가 있고, 중앙부의 두 마디 사이에 「금영 측우기 고일척오촌 경칠촌 도광정유제 중십일근(錦營 測雨器 高一尺五寸 徑七寸 道光丁酉製 重十一斤)」이라는 명문이 6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특히,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의 평균 치수인 높이 32.1cm, 지름 14.9cm를 주척(周尺, 1자 206~207mm)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高 1尺 5寸]와 직경 7치[經 7寸]’와 근사한 값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측우기는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측우기 각 동체(胴體)가 약 5치의 크기로 만들어져 굳이 자를 대지 않아도 몸체가 대력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서 기능을 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측우기의 명문은 15세기 세종대 강우량 측정제도가 19세기까지 계승되어 원칙에 맞게 꾸준히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형체 역시 자세히 보면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중‧하단 총 3개의 금속기로 구성되었으며 미세하게 상부가 넓고 하부가 좁아 서로 끼워 맞추도록 하였고 접합부는 대나무 마디처럼 만들어 기형(器形)의 변형을 막고자 했다. 이는 기존에 빗물의 양을 조선 시대 도량형 표준자인 주척(周尺, 문물제도가 중국 주나라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동아시아 이념에 영향을 받아 고려 시대부터 국가가 관리하는 도량형의 기본단위. 세종 때 척도의 근본으로 삼았으나,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주척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척도를 사용했음)을 사용해 별도로 쟀을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 온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공주박물관(公州博物館)에는 이 측우기를 받쳤던 것이라고 전해지는 높이 1.73m의 정사각형 대석(臺石)이 남아 있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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