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지 출토 사리기(청동제사리합)의 명문
왕흥사지 목탑지 사리공에 안치된 사리기 발견 상태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 국보327호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규암면 충절로 2316번길 34(외리 산 1-1) 국립부여문화유산연구소
「부여 왕흥사지(王興寺址) 출토(出土) 사리기(舍利器)」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 왕실 사찰인 왕흥사터(王興寺址)의 목탑지(木塔址)에서 발굴한 유물로,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사리기(舍利器, 부처나 승려의 참된 수행의 결과로 몸속에 생겼다는 구슬 모양의 유골인 사리를 보관한 용기. 합, 병, 호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사리기’로 통칭 함)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출토 당시 금당(金堂, 대웅전) 앞 목탑지의 사리공(舍利孔, 사리기를 넣은 네모난 구멍)에서 진흙 속에 잠긴 채 발견되었고, 이후 보존처리를 통해 지금의 찬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리기(舍利器)는 겉에서부터 순서대로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순의 3가지 용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동제사리합 겉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577년(위덕왕 24년)에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되었다. 명문에 의하면 이 사리기(舍利器)는 백제 위덕왕(威德王)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고자 발원(發願)한 왕실 공예품이다. 제작 시기가 명확한 사리기(舍利器)로서, 연대가 가장 빨라 우리나라 사리기(舍利器)의 선구적인 위치에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의의로 꼽힌다. 우선 청동제사리합은 바닥이 납작한 원통형 몸체의 위, 아래로 두 줄의 음각선을 둘렀고 사리함 뚜껑에도 두 줄씩 음각선을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 넣었다. 뚜껑 중앙에 솟아 있었던 연봉형의 손잡이는 부러진 채 발견되었는데, 복원되어 있다. 청동 합 안에 넣었던 은제사리호는 직립된 긴 목 아래로 둥근 몸체와 낮은 굽을 지닌 호의 모습을 하였다. 목 부분에 접합한 흔적이 보이는 것은 금제 사리병을 안치하기 위해 상부와 하부를 따로 만들어서 나중에 접합한 것으로 추측된다. 불룩하게 솟은 뚜껑 중앙의 연봉형 손잡이가 있고 그 주위에 연잎을 유려하게 새겼다. 특히 몸체의 안쪽 바닥에는 별도의 받침대가 있는데, 은제사리호 내부에 안치되는 금제사리병이 움직이지 않도록 계획된 것이다. 가장 안쪽의 굽 달린 금제 사리병은 아래쪽으로 갈수록 볼록해지는 호리병 형태로서 가장자리에는 음각선이 한 줄 새겨져 있다. 뚜껑 가운데로 보주형의 손잡이가 솟아있으며 역시 그 주위에 6엽의 연잎을 새겼다. 청동제사리합에는 6행 29자의 명문이 확인된다. “정유년이월 십오일백제 왕창위망왕 자립찰본사 리이매장시신화위삼(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神化爲三)” 즉, “정유년(丁酉年, 577년) 2월 15일에 백제왕 창(百濟王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刹)을 세우는데, 2매였던 사리(舍利)가 장시(葬時)에 신(神)의 조화로 3매가 되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명문은 사찰(刹)의 건립시기, 사리기(舍利器)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더불어 사찰의 건립 배경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왕흥사(王興寺)는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창건되었던 백제 왕실 사찰로,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창건 기록이 있다. 1996년부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을 진행해 가람배치와 기와터 확인, 사리기 발견 등의 성과가 있었다. 공예적인 측면에서도 안정되고 세련된 형태, 세부 구조물을 주조하고 접합한 기법, 표면을 깎고 다듬는 기법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어 백제 장인의 숙련된 솜씨가 엿보인다. 이처럼 6세기 전반 사리공예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 예술적 가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절대 연대를 가진 작품이라는 희소성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우리나라 공예와 조형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은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