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 국보 326호
소 재 지; 서대문구 이화여대길 52(대현동 11-1)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청자(靑磁) 순화4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壺)」는 고려 태조(太祖)를 비롯한 선대 임금들의 제사를 위해 건립한 태묘(太廟)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제작된 왕실 제기(祭器)다. 굽 안쪽 바닥면에 돌아가며 ‘「순화4년 계사태묘제일실 항기장최길회조(淳化四年 癸巳太廟第一室 享器匠崔吉會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으며, 이를 통해 993년(고려 성종 12년) 태묘 제1실의 향기(享器, 제기)로 쓰기 위해 장인 최길회(崔吉會)가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청자(靑磁) 순화4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壺)」는 1910년경 세상에 처음 공개되었으나, 발굴경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며, 일본인 소장가들을 거쳐 1957년 이화여대가 구매해 전해지고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에 위치했던 태묘(太廟)는 송나라 제도를 참고해 992년(고려 성종11) 12월에 건립되었고, 제1실에는 태조와 태조비의 신주(神主)가 봉안되었다고 한다. 이 항아리는 문양이 없는 긴 형태로서 입구(口緣)가 넓고 곧게 서 있으며, 몸체는 어깨 부분이 약간 넓은 유선형(流線形)이다. 표면에 미세한 거품이 있으나, 비교적 치밀한 유백색의 점토를 사용하여 바탕흙(태토, 胎土)의 품질이 좋다.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과 함께 미세한 빙렬(氷裂, 마치 얼음이 깨진 듯 도자기 표면에 유약이 굳으면서 생긴 미세하게 갈라진 금)이 있고, 군데군데 긁힌 사용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1989년~1990년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황해남도 배천군 원산리 2호 가마터에서 발굴한 「‘순화3년’명’(淳化三年‘銘) 고배(高杯)」를 비롯해 여러 파편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청자(靑磁) 순화4년’명‘(淳化四年’銘‘) 항아리(壺)’ 역시 원산리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태묘(太廟)의 제기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향후 북한 지역 청자 가마터와 비교연구 등을 통해 우리나라 청자 생산의 기원에 대해 더욱 명확하고 종합적인 확인을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순화3년’명’(淳化三年’銘’) 고배(高杯)는 높은 굽다리를 붙인 접시로, ‘순화3년’명(淳化三年’銘’) 고배(高杯)의 굽 안바닥에 ‘순화3년(992) 임진년에 태묘 제4실 향기로서 장인 왕공탁이 만들었다(淳化三年 壬辰 太廟第四室 亨器 匠王公托 造)’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가 고려 초 태묘(太廟)에서 사용한 왕실제기의 제작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청자 ‘순화4년’명 항아리」는 현전하는 초기청자 가운데에서 드물게 크기가 큰 대형 항아리로 바탕흙(胎土)의 품질이 우수하고 형태가 비슷한 사례가 없는 유일한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그리고 굽 안쪽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연도, 기명의 용도와 사용처,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또한, 황해남도 원산리 가마터에서 발굴된 순화’명(淳化’銘‘) 파편들과 비교하여 고려 왕실 제기 생산 가마터를 비롯해 다양한 제작여건이 추가로 밝혀짐으로써, 초기청자를 대표하는 유일한 편년자료로서의 가치와 위상이 매우 높다. 우리나라 청자 발달사를 밝히는데 필수적인 유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출처;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