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쌍지암 마애불입상
자비미소 머금은 마애불 중생아픔 보듬네
마을 지키던 '비석'으로 있다가
2019년 쌍지암으로 이운 보관
조선초기 세조 때 조성 명문
기록으로 남아있는 드문 마애불
보관 쓴 모습의 보살상 형태
"조사 통해 보존 필요한 성보"
조선초기 세조 임금 시대인 1465년에 조성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예산 쌍지암 마애불입상.
이 땅에 불교가 전래되고 난 뒤 어느 때부터 마을에는 미륵부처님이 살았다. 불교가 마을로 내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국가 차원에서 사찰이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왕권에 의한 국가주도의 사찰건립도 왕성했지만 호족들도 불교를 숭상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신흥자산가에 의해 불상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사찰이 건립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민초들이 사는 마을에도 부처님이 나투기 시작했다.
'부처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조차 부담스러웠던지 '미륵님'이라고 부르기도 하면서 백성들은 그들만의 신앙으로 '마을로 온 미륵님'을 찾았다. 그러한 흔적은 전국 사찰이 아닌 마을에 산재해 있는 석불들이 대변해 준다. 아직도 일부에서는 '미륵님' 혹은 '미륵부처님'으로 불리며 마을의 안위를 기원해 주고 있다. 다 종교 국가인 대한민국에 이러한 존재는 어떤 위상을 갖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미륵(부처님)을 마음속에 두고 신앙하는 이들에게는 종교로 깊이 자리하고 있다.
충남 예산군 광시면 쌍지암에 위치한 '쌍지암 마애불입상'은 대표적인 미륵불 신앙의 형태로 남아 있는 흔적이다. 이 미륵부처님이 언제부터 마을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마애불 불신(佛身)에 새겨져 있는 '성화 원년(成化 元年) 을유 정월 27일'이라는 글귀에 의해 조선초기 세조 임금 시대인 1465년에 조성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화(成化)'라는 글귀는 명나라 헌종이 사용한 연호로 조선시대에는 명나라의 간섭을 심하게 받고 있었던 시기여서 이러한 연호를 사용해 마애불에 조성연대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을 안내하고 있는 표지판은 단순하다. 마애불의 조성연대와 함께 "조선시대 불상으로 높이 257cm 바위 면에 불상의 높이 180cm, 폭 65cm의 선각으로 새겨져 있으며, 두발은 양 옆으로 향하여 연화대좌 위에 서 있다. 이 마애불은 예산 광시면 장신리 마을 입구에 있던 것을 2019년 5월5일 쌍지암 경내로 옮겨왔다"고 기록돼 있다.
쌍지암 마애불입상은 사연 많은 부처님이다. 표지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마애불은 원래 광시면 장신리 신흥천 장신교를 지나 논과 야산 사이의 구릉지 입구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과 길흉화복을 같이 했다. 이 미륵부처님은 예경만을 받아온 것은 아니었다.
오가는 이들에게 신앙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액땜의 방편으로도 삼기도 했다. 행려자가 죽으면 이 근처에 묻는다든지 쓰레기나 오물을 버리는 곳으로 방치돼 온갖 흉사를 떠받아 안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한 때는 마을에서 산림을 벌목하는 과정에서 피해를 입어 미륵부처님이 균열이 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러한 모습을 보기 힘들어했던 쌍지암 측이 묘안을 냈다. 마애불입상이 자리한 토지를 매입해 보존대책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2019년 쌍지암 신도 108명이 자발적으로 시주해 미륵불이 소재한 토지를 구입했다. 외지에 노출돼 있어 보존하기도 어렵고 특히 도난우려가 있는 마애부처님을 쌍지암으로 이운해 오는데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한동안 신경전이 팽팽하게 전개됐고 급기야 법적다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애부처님은 쌍지암으로 이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쌍지암 주지 선묘스님은 "미륵부처님 주변에 있던 숲이 사라지면서 풍화가 심해져 부처님의 모습이 변형되고 지정문화재로 등재되지 않아 행정관청이 나서서 대책을 세울 수 없는 상황이어서 마땅히 사찰로 이운해 보존할 수 밖에 없었다"며 "부처님은 마땅히 불자들로부터 공양을 받아야 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야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기에 사찰로 모셔왔다"고 했다.
측면에서 본 쌍지암 마애불입상.
쌍지암으로 모셔온 마애부처님은 중심전각인 무량수전 좌측 잔디밭에 자리를 잡아 평온한 모습으로 중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아직 마애부처님에 대한 정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조선초기에 조성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어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마애불을 관찰한 석불조각가 오채현 씨는 "조각수법이 투박하고 선각으로 새긴 점으로 볼 때 조각한 장인은 유명인이라기보다는 당시에 마을 사람들과 연관된 지역의 무명 장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며 "상호도 투박하고 보관을 쓰고 있는 모습은 보살상의 형태를 띠고 있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쌍지암 마애부처님은 언제나 대접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배척을 받기도 했고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공양을 받는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런 마애부처님을 사찰로 모셔 올 때 일부 신도들 사이에서는 '흉사를 온 몸으로 받은 비석(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불렸던 명칭)을 절에 모시고 오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 지 걱정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쌍지암 측은 마애부처님에 대해 신앙의 대상으로 마땅히 공양을 받아야 할 존재(應供)임을 분명히 하고 3년 여에 걸쳐 이운해 올 방안을 강구했다는 전언이다. 결과적으로 사찰에 모셔온 부처님은 이운해 온 취지에 잘 부합해 사부대중들로부터 공양을 받으며 성보(聖寶)의 위상을 갖추고 있다.
성화 원년(成化 元年)이라는 조성연대가 보이는 탁본 모습.
쌍지암 주지 선묘스님은 "쌍지암은 야생화를 많이 가꾸고 있는 농촌사찰이다. 철마다 피어나는 꽃물결 따라 쌍지암 마애부처님은 음습했던 신흥천 언덕을 벗어나 꽃향기 가득한 사찰 경내에서 중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줄 수 있게 됐다"며 "쌍지암 마애불입상에 대한 조사가 조속히 이루어져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었으면 한다"고 피력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미륵부처님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취재를 간 날에도 간간이 미륵부처님을 찾아 간절하게 기도를 올리는 모습을 본다. 중생의 비원은 끝이 없어 보현보살의 행원도 그렇지 않았던가. 일심기도의 모습을 보며 쌍지암 마애불입상은 불교가 대중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다가가야 하는 지에 어렴풋한 해답을 보여주는 듯하다.
예산=여태동 기자 [불교신문 37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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