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화엄종 4조’ 칭송
청량징관(淸凉澄觀)
毘盧藏海 以普門慧
孰得其精 入法界經
橫傾甘露 遺像淸遠
遍飮群珉 凝眸幻形
豈獨七帝師表 實乃萬世儀型
비로자나회해에서 보문의 지혜를
누가 그 정신을 화엄경에서 얻었을까?
감로법을 기울여 남긴 모습은 맑고 영원해
두루 마시게 하니 모두가 아름답고, 환영을 눈여겨보면
어떻게 홀로 칠제의 사표이며 진실된 만세의 모범일까.
송광사 화엄전에 모셔진 청량징관(淸凉澄觀, 738~839)스님 진영에 적힌 영찬이다. 영찬을 지어 올린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찬문에는 화엄의 요체를 열어 후대에 감로법을 베푼 청량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존숭의 마음이 담겨 있다.
당대(唐代)에 활동한 청량스님은 776년 오대산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고 대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강의하면서 주석서를 지었으며, 또한 796년에 반야(般若)가 주관하는 40화엄경 번역에도 참여하고 이에 대한 주석서를 짓기도 했다. 이처럼 청량스님은 화엄사상에 뛰어난 업적을 남겼고 이런 연유로 중국의 화엄종 4조(祖)로 칭송받았다. 천년 전 중국에서 활동했던 청량스님의 진영이 시공간을 넘어 조선후기 송광사에 모셔지고 찬문을 지어 올렸던 것은 이 시기 만개한 화엄사상과 연관이 깊다.
조선시대에는 청량스님이 80화엄경에 주석을 단 화엄경소(華嚴經疏)와 화엄경소초(華嚴經疏鈔)가 유통되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7세기 전반 송광사에서는 임진왜란 피해를 복구하면서 2900여 판에 이르는 화엄경소(1625년 개판) 경판을 새기는 대규모 법보불사를 진행했다.
완성된 경판은 판전(版殿)인 화엄전에 모셔졌고 그 중심 불단에 비로자나불좌상과 화엄경의 ‘칠처구회’를 표현한 화엄탱화가 모셔졌고 주석자인 청량스님 진영도 전각에 함께 모셔졌다. 화엄사상이 성행하면서 스님들 사이에는 청량스님을 존숭하는 마음도 더해졌을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무경자수(無竟子秀, 1664~1727)의 <무경실중어록(無竟室中語錄)>에는 청량국사 진영을 보고 지은 상찬(像讚)이 전한다. “종이 위에 누가 공의 도리를 전하는 그림을 그렸는가? 국사의 진실하고 미묘한 참모습이여, 입은 불조의 산하를 다 마시고 눈은 하늘과 땅에 걸리니, 해와 달을 한가롭게 하며 도행은 우주에 현풍을 떨쳤다. 드높은 명망은 인천의 덕해에 너그러움이 되고 상이 없는 상 가운데 모범된 상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 면목을 반조하게 하네(紙上誰傳空裡畫 國師眞邈妙毫端 口呑佛祖河山沒 眼掛乾坤日月閑 道行宇宙玄風拂 望重人天德海寬 無象象中模一象 令人返照本來顏).”
해제=정안스님 설명=문화부 문화재팀장 이용윤 [불교신문32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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