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15년
〈정사〉 15년(1137) 봄 정월 기사. 금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 오격(吳激)을 사신으로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2월 무신.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3월 정묘.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무진. 임원애(任元敱)를 검교태보 수사도 판비서성사(檢校太保 守司徒 判秘書省事)로 임명하였다.
을해. 서경(西京)에 지진이 일어났다.
무자. 이신(李信) 등을 급제시켰다.
임원준(任元濬)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판형부사(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判刑部事)로, 이자덕(李資德)을 판호부사(判戶部事)로, 강후현(康侯顯)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 판공부사(吏部尙書 知門下省事 判工部事)로 삼았다.
여름 4월 신축. 왕이 경천사(敬天寺)에 갔다.
계묘.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나아갔다.
갑인. 왕이 궁으로 돌아왔다.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가 송에서 돌아왔다. 조서에 이르기를,
“전쟁으로 시끄러운 중에 노소 백성들이 떠돌고 있는데 이전에 맺은 우호를 잊지 않고 우리 백성들이 오랫동안 객지에 있는 것을 민망히 여겨 배를 제공해 준 덕분에 귀국하여 머무는 곳에서 안정된 삶을 얻게 되었다. 아직도 유랑민이 많이 있어서 염려되니 다시 애달픈 마음으로 은혜를 베풀어 바다를 건너 멀리 갈 수 있도록 해줄 것을 당부한다. 영토를 확정하여 각자 다스리므로 영역은 서로 다르지만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은 남과 북이라고 하여 서로 나누어지지 않을 것이니, 아름다운 정성으로 짐의 뜻에 부응해주기 바란다.”
라고 하였다.
을묘. 우박이 쏟아졌다.
5월 을해. 시장을 옮기고 거리에서 임시로 시장을 열었다.
기묘. 종묘사직(宗廟社稷)에 비를 빌었다.
기축.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 비를 빌었다.
경인. 큰 비가 내렸다.
6월 임진.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경자.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을사. 명인전(明仁殿)에서 보살계도량(菩薩戒道場)을 열었다.
가을 7월 병자.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한 이공수(李公壽)가 사망하였다.
9월 을축.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병인.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정축.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나가 머물렀다.
겨울 10월 을묘.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윤10월 무인. 선경전(宣慶殿)에서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사흘간 열고, 전국에 명하여 승려 3만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게 하였다.
11월 계사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유묘(柳昴)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것을 사례하였다.
경자.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 노수(魯洙)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신년을 하례하였다.
무신. 예부낭중(禮部郎中) 이량(李亮)을 금에 보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정사. 푸른색과 붉은색의 햇무리가 해를 관통하고,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 하늘을 가로질렀다.
12월 갑자. 최유(崔濡)를 수사도 태자태부(守司徒 太子太傳)로, 김극검(金克儉)을 수사공 참지정사 태자소사(守司空 叅知政事 太子少師)로, 이자덕(李資德)과 임원준(任元濬)을 참지정사 태자소보(叅知政事 太子少保)로, 진숙(陳淑)을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 知樞密院事)로, 최진(崔溱)을 좌산기상시 추밀원부사 태자빈객(左散騎常侍 樞密院副使 太子賓客)으로 삼았다.
임신. 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 문공인(文公仁)이 사망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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