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2(仁宗二) 14년

 

〈병진〉 14년(1136) 봄 정월 을해. 금에서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소수(蕭綬)를 보내와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2월 임인. 명인전(明仁殿)에서 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을 3일간 열었다.

병진. 금에서 사신을 보내 태황태후(太皇太后)의 상을 알려왔으므로 온 나라에서 3일간 소복을 입었다.

정사. 김부식(金富軾)이 모든 군대를 모아서 서경(西京)을 공격하였고, 성이 함락되자 조광(趙匡)이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죽었다.

무오. 김부식(金富軾)이 표문을 올려 승전을 알려왔다.

병인.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정묘. 전중감(殿中監) 윤언식(尹彦植)과 좌사간(左司諫) 최윤의(崔允義)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 조문하게 하였다.

3월 기사. 좌승선(左承宣) 이지저(李之氐)와 전중소감(殿中少監) 임의(林儀)를 보내 조서를 내려 서경(西京)을 정벌한 장수들을 격려하였다. 김부식(金富軾)에게는 의복, 안마(鞍馬), 금대(金帶), 금술잔과 향약(香藥)을, 김정순(金正純)에게는 금대를, 4군의 병마사와 병마부사, 병마판관 이하에게는 은(銀), 견(絹)과 능라(綾羅)를 차등 있게 내려주었다. 서경 내외에 거주하는 노약자와 환자, 어린이 중에서 스스로 생계를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쌀을 헤아려 나누어주고 구휼하였다. 또 성 안팎의 사원(寺院)과 사묘(祠墓)를 살펴 훼손된 것들을 모두 수리하게 하였다.

계미. 김부식(金富軾)을 검교태보 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檢校太保 守太尉 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임명하였다.

을유. 진숙(陳淑)을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겸 태자빈객(禮部尙書 同知樞密院事 兼 太子賓客)으로 임명하였다.

여름 4월 기해. 초하루 왕이 수창궁(壽昌宮)으로 돌아왔다.

경자. 김부식(金富軾)이 개선하여 돌아오자 왕이 경령전(景靈殿)을 참배하고 서경(西京)의 반란을 평정한 사실을 아뢰었다.

정미.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5월 갑술.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가 아뢰기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한유충(韓惟忠)이 국가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군사 행동을 문득 가로막아 방해하였습니다.”

라고 하였으므로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좌천시켰다.

기묘. 서경(西京) 반란 평정을 기념하여 사면하였다.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듣건대 고전(古典)에서는 ‘사면(赦免)이 없는 국가라야 형벌이 반드시 공평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국가에 재앙이 일어난 이유는 실로 짐이 부덕하여 일어난 것이다. 서경인들이 까닭없이 반란을 일으켰기에 부득이하게 군대를 동원하여 죄를 다스렸지만 군대를 동원한 노고와 폐단은 심히 무거웠고 인명 살상도 적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두렵고 위태로운 생각에 편안할 겨를이 없었으니, 바라건대 넉넉하고 두텁게 은택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미치게 하여 함께 유신(維新)함으로써 상서로운 일을 맞이하려 하노라.
이제 사형 이하의 죄를 범한 자는 모두 용서한다. 종군한 장교와 군졸 중에서 유공자와 전사자는 정해년(예종 2년, 1107년)에 행했던 논공행상 기준에 따라 처우할 것이며, 개경과 서경 사이에 있는 각 역의 역리(驛吏)는 1년간의 부역을 면제한다. 시어사(侍御史) 김부(金阜)와 내시(內侍) 황문상(黃文裳), 교위(校尉) 노자정(盧資挺)은 어명을 받들었으나 적도들의 함정에 빠져 해를 입었으니 그 아들에게 관작 1급을 내려주고, 아들이 없으면 그 조카나 사위 중 한 명에게 내려주도록 하라. 윤첨(尹瞻)과 위근영(韋瑾英)은 서경 성 안에 있으며 반란군에게 참여하지 않다가 살해되었으니 그 아들에게 관작 1급을 내려주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6월 무술.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신해.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기미. 태백성(太白星, 금성)이 낮에 나타나서 하늘을 가로질러 갔다.

8월 을묘. 왕이 장원정(長源亭)에 행차하였다.

9월 을해. 김치규(金稚規)와 유대거(劉待擧)를 송의 명주(明州)에 사신으로 보냈다. 첩(牒)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최근 상인 진서(陳舒)가 가지고 온 공문서를 살펴보니, ‘근자에 하국(夏國)에서 사신을 보내와서는 우리 사신과 함께 고려로 가서 일을 의논하고 싶다고 하기에, 진서를 파견하여 고려로 가서 고려의 담당 관부에 이 뜻을 은밀히 알리고 회답을 받아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삼한(三韓)은 한(漢)·당(唐) 이래 대대로 중원(中原)을 사대하여 복식도 바꾸고 예의를 익혀왔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귀부한지 지금 2백 년이 되었는데 역대 황제로부터 지극히 깊고 두텁게 후대 받는 은총을 입었으니 어찌 한결같은 마음으로 제후의 도리를 지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금과 국토가 서로 맞붙어 있는 관계로 어쩔 수 없이 화친하였는데, 만약 사신을 파견하여 하국 사람과 같이 일을 논의하였다 하면 필시 〈세 나라가〉 몰래 모의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 때문에 시기하고 분노하여 군대를 출정시킬 명분으로 삼는다면 저희 나라가 전쟁에서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나라가 제후국이 되지 않는다면 〈상국의〉 회수(淮水)와 절강(浙江)의 연안 지방까지가 바로 금과 인접하게 될 것이니 진실로 상국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또한 상국이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경유하여 공격한다면 저들 역시 우리나라를 경유하여 반격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연해의 여러 고을은 필시 경비할 겨를이 없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상서(尙書) 양응성(楊應誠)가 와서 상국은 다만 저들과 강화하려고 할 뿐 전쟁을 하지는 않겠다고 하였으나 사신이 온 뜻에 부응하지 못해서 지금까지도 온 나라가 대죄(待罪)하고 있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정세가 전에 진술한 바와 같기 때문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집사(執事)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깊이 헤아려 우리나라가 금과 원한을 맺지 않게 해 주시고 상국 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우려가 없도록 해주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송 명주(明州)에서 회답하는 첩문을 보내어 왔다. 대략 이르기를,
“추밀원(樞密院)에서 차자(剳字)로 황제폐하께 아뢰어 정한 바를 받들어 행하기를[奉行], 지난 번에 오돈례(吳敦禮)를 사신으로 보내 조서를 가지고 가게 하였고 아울러 상인 진서(陳舒)도 가도록 하였습니다. 대개 우리 조정이 대대로 여러 나라를 우대하며 은혜를 매우 후하게 베풀어왔건만 정강(靖康) 연간의 병란 이후로 사신 왕래는 점점 어렵게 되었습니다. 근자에 하국(夏國)의 밀사가 도독행부(都督行府)에 도착하였기에 오돈례를 사신으로 보내 예전의 우호관계를 확인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또 듣건대 그대 나라는 금과 바로 이웃하고 있으니 사신이 왕래하는 편에 〈금에 계신 휘종(徽宗)⦁흠종(欽宗)〉 두 황제를 문안하려 했을 따름입니다. 군사를 일으켜 응원한다든가 길을 빌려 정벌에 나선다다는 말은 모두 오돈례 등이 전적으로 한 말일 뿐 조정에서 지시한 바가 아니니 깊이 잘 헤아려서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을미. 초하루 대부소경(大府少卿) 신지충(申至冲)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것을 사례하였다.

신축. 도적이 원릉(元陵, 현종(顯宗)의 모후 헌정왕후(獻貞王后)의 릉의 제기를 훔치고 능지기[守陵] 3인을 살해하였다.

병오. 왕이 천수사(天壽寺)에 행차하였다.

갑인. 왕이 궁궐로 돌아왔다.

병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김부의(金富儀)가 사망하였다.

11월 병자. 왕이 인덕궁(仁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경(少卿) 이유개(李有開)를 금에 사신으로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였다.

기축. 예부시랑(禮部侍郞) 이인실(李仁實)을 금에 사신으로 보내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

경인.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항(鄭沆)이 사망하였다.

12월 신축.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경신. 최유(崔濡)를 태자태보(太子太保)로, 김극검(金克儉)⦁이자덕(李資德)⦁임원준(任元濬)을 참지정사(叅知政事)로, 진숙(陳淑)을 병부상서 지추밀원사(兵部尙書 知樞密院事)로 임명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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