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사막길 향해서 ⑫ 베제클리크 천불동
탐사꾼들의 끊임없는 표적이 됐던 ‘아름답게 장식한 집’
베제클리크 9굴 사신도. 사진=위키피디아.
이름 덕분인지 일찍이 유럽 열강 내
유물 탐사꾼들의 약탈과 파괴에 노출
떼어낸 석굴 벽화들은 박물관에 전시
20개월 걸쳐 옮긴 유물로 벽면 가득차
정부·지역민들로부터 보호 받지 못해
어느 성한 것 없는 베제클리크 유적
베제클리크 천불동(중국어: 柏孜克里 千佛洞, 병음: Bózīkèlǐ Qiān Fó Dòng)은 투루판 화염산 근처 절벽에 위치한 5세기에서 9세기에 걸친 불교 벽화가 있는 석굴 유적이다.
지리적으로 투루판과 선선(누란)의 중간에 있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동쪽 입구 무토우 계곡의 가오창 유적지, 화염산 등과도 가깝다. 화염산 아래의 서쪽 무토우 계곡의 절벽 높이 위치하고 있다. 베제클리크 천불동에는 77개의 바위를 깎아 만든 석굴이 있다. 대부분 사각형의 공간에 둥근 아치형 천장을 가지고 있으며, 종종 불화 석벽이 있는 네 부분으로 나뉜 것도 있다.
이 동굴들에는 전체 천장이 수천 점 불화가 그려진 벽면으로 되어 있다. 어떠한 천장은 인도인, 페르시아안, 유럽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규모의 부처를 채색한 불화도 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걸쳐 많은 부분이 도굴되고 파손되었지만, 여전히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불화들로 채워져 있다.
위구르어로 ‘아름답게 장식한 집’이라는 뜻의 베제클리크 석굴은 그 이름 덕분인지 일찌감치 유럽 열강 유물탐사꾼들의 표적이 됐다. 독일은 1902~1914년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타클라마칸사막 주변 실크로드에 ‘탐험대’를 파견해 베제클리크를 짓밟았다. 이어 1909~1910년에는 러시아의 올덴부르그가, 1915년엔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베제클리크에 나타났다. 정토 진종을 이끄는 종교적 지도자에 해당하는 오타니 고즈이도 1902~191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실크로드 유물탐사에 나서며 베제클리크를 빠뜨리지 않았다.
스벤 헤딘, 오렐 스타인, 폰 르콕, 펠리오, 랭던 위너, 오타니 고즈이는 유명한 약탈가들이다. 각국의 유물탐사 꾼들은 베제클리크 뿐만 아니라 투루판 주변에 밀집해 있는 석굴들을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며 유물을 쓸어 모았다. 독일 탐험대의 폰 르콕은 ‘새롭고 흥분되는 유물을 단 하루도 발굴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라고 후일 회상할 정도였다.
유물탐사 꾼들은 어느 곳에서 고대 도시의 흔적이 발견됐다거나 유물이 나왔다는 소문이 들리면 경쟁자들보다 앞서 도착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며 발길을 재촉했다. 유물의 양은 많았고 고대 도시의 유적과 석굴사원 등은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 상자의 유물을 챙겨 들고 귀국하면 그들은 영웅 대접을 받았으며 박물관에서 벽화와 조각상 등을 자랑스럽게 전시했다.
27굴 천불도. 사진=위키피디아.
31굴 공양도.
총 네 차례 탐험대를 파견한 독일은 1차 탐험대가 46상자의 유물을 싣고 귀국한 후 이곳 베제클리크를 집중적으로 공략했던 2차 탐험에서 103상자, 3차에서는 더 많은 128상자의 유물을 자국으로 실어 날랐다. 4차 탐험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중단되지만 않았다면 더 많은 유물을 노획할 수 있었을 것이다.
베제클리크 약탈에 있어 르콕은 독보적인 존재였다. 1만2000루블의 금화를 넣은 주머니 위에 앉아 한 손에는 라이플 권총을 든 채 실크로드에 도착한 르콕은 투루판에 4개월 여를 머물며 베제클리크를 비롯한 일대의 석굴사원 들을 마음껏 드나들었다. 떼어낸 석굴 벽화들은 베를린박물관에 전시됐다. 그는 이러한 행동이 유물 보호를 위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라 여긴 듯하다. 르콕은 “오랜 시간 힘들여 작업한 끝에 벽화를 모두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20개월 걸려 그것들은 무사히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 벽화들은 박물관의 방 하나를 가득 채웠다. 그 방은 모든 벽화가 완벽히 옮겨온 하나의 작은 사원이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고단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정성을 다해 유물을 ‘약탈’했으며, 그 유물들을 박물관에 완벽하고 안전하게 ‘유폐’시켰다는 자부심 말이다.
실크로드에서의 유물 약탈 행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던 유물탐사 꾼은 비단 르콕 만은 아니다. 이는 당시 실크로드의 정치·문화적 상황과도 무관치 않다. 신장웨이우얼 지역 대다수는 당시 이슬람교가 장악하고 있어 특히 불교사원과 유물에 대한 파괴행위가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또 유적지에서 금붙이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된 도굴꾼들도 많았다. 그들은 벽화나 조각상 안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금을 찾기 위해 ‘돈이 안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주저 없이 헤집었다.
무지하기는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 시기 둔황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본 중국 관리들은 ‘그냥 있던 자리에 보관하라’라고 할 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 당국이 자국 내 유물의 해외 반출을 금지한 것은 1930년에 이르러서다. 그때까지 실크로드, 특히 당시 유럽인들이 ‘중국령 투르키스탄’이라 부르던 톈산 남로와 사막남로 상에 산재했던 고대 도시와 유적, 특히 석굴사원 들은 정부로부터도, 지역주민들로부터도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버려진 과거였다.
하지만 20세기 초반 실크로드 일대를 짓밟았던 유물탐사꾼들의 행위는 분명 ‘탐험’ ‘조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약탈이었고 ‘보호’ ‘구출’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문명파괴’였다고 감히 단언하고 싶다. 앞서 지나온 쿰투라 석굴과 키질 석굴, 키질 카르가 석굴에 이어 ‘아름답게 장식한 집’ 베제클리크 석굴에 도착했을 때 그러한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베제클리크 석굴이 개착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말부터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 석굴은 이 지역이 위구르 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9~10세기 왕가의 지원으로 조성됐다. 대부분 벽화도 이 시기의 것이지만 석굴과 벽화 조성은 14세기까지도 계속됐다. 왕에 의한 조성으로 규모나 안료가 다른 석굴들과는 다르다.
20호 굴은 10세기, 베제클리크 석굴 조성이 절정에 달했던 위구르 왕국 시기의 벽화가 발견된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말 그대로 텅 비어있다. 벽화를 옮기기 쉽게 네모반듯한 모양의 여러 조각으로 잘라낸 흔적들만 무수하다. 이곳에는 위구르 왕가의 왕과 왕비 귀족 등이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각종 공양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독일 베를린박물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이 베를린 박물관의 폭격으로 사라지고 도록에서만 볼 수 있었다. NHK의 신실크로드에서 그중 일부를 디지털 복원으로 살려냈는데 그 불화가 유명한 ‘서원도’다. 그나마 벽면에 남아있는 위구르 공주의 모습은 당시 위구르 왕가의 단면과 함께 이 석굴을 장엄했던 벽화들이 얼마나 섬세하고 우아하며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27호굴 천장엔 천불도가, 31호굴엔 흐릿한 색채의 공양도가 남아있어 벽화의 원래 모습을 상상하게 하지만 대부분 불보살상과 공양자들의 눈과 입은 여지없이 파헤쳐져 있다. 33호굴 정면엔 부처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각국 왕자들을 그린 벽화가 남아있다. 열반에 든 부처님의 모습은 누군가 떼어갔는지 흔적도 없고 법신 뒤로 보살과 호법신장들, 그리고 각국의 왕자들이 도열해 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신라의 조익관과 유사한 모자를 쓰고 있다.
베제클리크에서 답사한 6개의 석굴은 그 어느 것 하나 성한 것이 없다. 더 이상 석굴의 벽화가 훼손되지 않도록 벽 앞에 유리벽을 설치했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조차 무색하게 만드는 초라함이다.
문무왕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외래교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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