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윤(金令胤) 흠춘(欽春) 반굴(盤屈)

 

김영윤(金令胤)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級湌)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角干) 흠춘(欽春) 혹은 흠순(欽純)진평왕(真平王) 때 화랑(花郞)이 되었다. 어짊이 깊고 신뢰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년에 이르자, 문무대왕(文武大王)이 관작을 올려 총재(冢宰)로 삼았다. 윗사람을 섬기는 데는 충성으로 하고 백성을 대할 때는 관대하게 하였다. 나라 사람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 일컬었다.

태종대왕(太宗大王) 7년 경신(庚申, 660)에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대장군(大軍) 소정방(蘇定方)에게 명령하여 백제(百濟)를 치게 하였다. 흠춘(欽春)이 왕명을 받들어 장군(将軍) 유신(庾信) 등과 함께 정예 군사 5만을 이끌고 그를 맞았다.

가을 7월에 황산벌(黄山之原)에 이르러 백제(百濟) 장군(将軍) 계백(階伯)을 만나 싸움이 불리해졌다. 흠춘(欽春)이 아들 반굴(盤屈)을 불러,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이 되어서는 효 만한 것이 없다. 위험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과 효가 모두 이루어진다.”라고 말하였다. 반굴(盤屈)

“예!”라고 하고, 곧 적진에 들어가 힘써 싸우다 죽었다.

영윤(令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였다.

신문대왕(神文大王) 때에 고구려(髙句麗)의 남은 적(賊)인 실복(悉伏)이 보덕성(報德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그것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영윤(令胤)을 황금서당(黃衿誓幢)의 보기감(步騎監)으로 삼았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 종족(宗族)과 친구(朋友)들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다.”고 말하였다.

실복(悉伏)이 가잠성(椵岑城) 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지금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하지면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솥 가운데서 노는 것과 같아서, 만 번 죽음으로써 나와 싸우더라도 하루의 목숨 밖에 되지 않는다. 옛말에 ‘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말라.’하였다. 마땅히 조금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였다. 여러 장수들이 그 말을 그럴 듯하다고 여겨 잠깐 물러났다.

오직 영윤(令胤)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싸우고자 하니, 따르는 자가 고하기를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다 살기를 엿보는 사람으로 죽음을 아끼는 무리이겠습니까? 그러나 지난 번의 말을 그러하다고 한 것은 장차 그 틈을 기다려 그 편함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대가 홀로 바로 나가겠다고 하니, 그것은 올바르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영윤(令胤)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기에서 경계한 바요,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는 것은 병졸의 떳떳한 분수이다. 장부는 일에 임하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지, 어찌 반드시 무리를 좇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적진에 나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런 아버지가 없었으면 이런 자식이 있을 수 없다. 그 뛰어난 충의가 아름답다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벼슬과 상을 더욱 후하게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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