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8년~10년


8년 봄에 아마(阿麻)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와 함께 연정토(淵淨土)나라에 보냈는데, 연정토(淵淨土)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元器)만 돌아왔다. 이후로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칙명이 있었다.

파진찬(波珍湌) 지경(智鏡)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하고 이에 파진찬(波珍湌) 용문(龍文)을 총관(摠管)으로 하였다.

여름 4월에 꼬리별이 천선(天船)을 지켰다.

6월 12일에 요동도(遼東道) 안무부대사(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熊津道) 안무대사(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 검교(檢校) 태자좌중호(太子左中護)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유인궤(劉仁軌)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숙위(宿衛)인 사찬(沙湌) 김삼광(金三光)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에게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右相)은 약속을 마치고는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21일에 대각간(大角干) 김유신(金庾信)대당(大幢) 대총관(大摠管)으로 삼았고,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흠순(欽純) 천존(天存) 문충(文忠) 잡찬(迊湌) 진복(眞福) 파진찬(波珍湌) 지경(智鏡) 대아찬(大阿湌) 양도(良圖) 개원(愷元) 흠돌(欽突)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삼았으며, 이찬(伊湌) 진순(陳純) 혹은 진춘(陳春)죽지(竹旨)를 경정(京停) 총관(摠管)으로, 이찬(伊湌) 품일(品日) 잡찬(迊湌) 문훈(文訓) 대아찬(大阿湌) 천품(天品)을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이찬(伊湌) 인태(仁泰)비열도(卑列道) 총관(摠管)으로, 잡찬(迊湌) 군관(軍官) 대아찬(大阿湌) 도유(都儒) 아찬(阿湌) 용장(龍長)한성주(漢城州)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삼았고, 잡찬(迊湌) 숭신(崇信), 대아찬(大阿湌) 문영(文穎) 아찬(阿湌) 복세(福世)비열성주(卑列城州)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삼았으며, 파진찬(波珍湌) 선광(宣光), 아찬(阿湌) 장순(長順) 순장(純長)을 하서주(河西州)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파진찬(波珍湌) 의복(宜福)과 아찬(阿湌) 천광(天光)을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아찬(阿湌) 일원(日原)과 흥원(興元)을 계금당(罽衿幢)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22일에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大谷)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진공(眞功)을 보내 축하하였고, 인문(仁問) 천존(天存) 도유(都儒) 등은 일선주(一善州) 등 일곱 곳의 군과 한성주(漢城州)의 군사와 말을 이끌고 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7일에 왕이 서울(京)을 출발하여 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道)의 총관(摠管)들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왕은 유신(庾信)이 풍병(風病)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도록 하였다. 인문(仁問) 등은 영공(英公)을 만나서 영류산(嬰留山) 아래로 진군하였다. 영류산(嬰留山)은 지금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주(漢城州)에 이르러서 여러 총관(摠管)들에게 가서 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였다. 문영(文穎) 등이 사천(蛇川)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9월 21일에 당(唐)나라 군사와 합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英公)보장왕(寶臧王)과 왕자(王子) 복남(福男), 덕남(德男), 대신(大臣)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나라로 돌아갔다. 각간(角干)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大阿湌) 조주(助州)가 영공(英公)을 따라갔고, 인태(仁泰) 의복(義福) 수세(藪世) 천광(天光) 흥원(興元)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庾信)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을, 인문(仁問)에게 대각간(大角干)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伊湌)과 장군(將軍) 등을 모두 각간(角干)으로 삼았고, 소판(蘇判)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大幢) 소감(小監) 본득(本得)은 사천(蛇川)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漢山州) 소감(小監) 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平壤城)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였던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모두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 1천 섬을 내렸다. 서당(誓幢) 당주(幢主) 김둔산(金遁山)은 평양군영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의 관등과 조 7백 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 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北門)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주었고, 군사(軍師) 부양(斧壤)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렸다. 가군사(假軍師) 비열홀(卑列忽)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高干)의 관등과 벼 5백 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漢山州) 소감(小監) 김상경(金相京)은 사천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의 사찬(沙湌) 구율(求律)은 사천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 나아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는 못했다.

25일에 왕이 나라로 돌아오면서 욕돌역(褥突驛)에 도착하였는데, 국원(國原)의 사신(仕臣)인 대아찬(大阿湌) 용장(龍長)이 사사로이 잔치를 벌여 왕과 여러 시종하는 사람들을 대접하였다. 음악이 시작되자 나마(奈麻) 긴주(緊周)의 아들 능안(能晏)이 15살인데 가야의 춤을 추어 바쳤다. 왕이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는 앞에 불러서 등을 어루만지며 금으로 만든 술잔에 술을 권하고 선물을 자못 후하게 내려 주었다.
11월 5일에 왕이 포로로 잡힌 고구려 사람 7천 명을 이끌고 서울(京)에 들어왔다.
6일에 문무(文武)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을 찾아 아뢰고 다음과 같이 알렸다.
“삼가 선조들의 뜻을 이어 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같이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서 원흉(元凶)에게 벌하여 나라의 앞날이 크게 안정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아뢰니 신이시여 들으소서!”
18일에 전쟁에서 죽은 자에게 물건을 주어 위로하였는데, 소감(少監) 이상에게는 10△△필, 종자(從者)에게는 20필을 주었다.
12월에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9년 봄 정월에 신혜법사(信惠法師)를 정관(政官)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다.
당(唐)나라 승려 법안(法安)이 와서 천자(天子)의 명령을 전하고는 자석(磁石)을 구하였다.

2월 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교서(敎書)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북쪽은 정벌을 당하고 서쪽은 침략을 당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은 해골을 드러내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경계에서 서로 나뉘어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잔혹한 피해를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하심을 잊고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황제께 군사를 요청하셨다.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이 없게 하고,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한을 설욕하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온전히 하려는 것이었다.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지만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려는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군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이미 모두 상을 받았고, 싸우다 죽어 혼령만 남은 이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이들도 아직 새롭게 시작하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 생각하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줄 것이니, 총장(總章)

여름 5월에 천정군(泉井郡), 비열홀군(比列忽郡), 각련군(各連郡) 등 세 군의 백성이 굶주렸는데, 창고를 열어 진휼하였다.
급찬(級湌) 기진산(祇珍山) 등을 보내 나라에 들어가 자석 두 상자를 바쳤다. 또한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파진찬(波珍湌) 양도(良圖)를 보내어 나라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였다.
겨울에 나라 사신이 도착하여 조서를 전하고는 쇠뇌를 만드는 기술자인 사찬(沙湌) 구진천(仇珍川)과 함께 돌아갔다. 나무 쇠뇌를 만들게 명령하였는데, 화살을 쏘자 30보 쯤 나갔다. 황제가 “내가 듣기로는 너희 나라에서 만든 쇠뇌를 쏘면 1천 보를 나간다고 하는데, 지금의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으니 어찌된 일이냐”라고 물었다. “재목이 좋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 나라에서 나무를 가져온다면 그것을 만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가 사신을 보내 재목을 구하였는데, 곧 대나마(大奈麻) 복한(福漢)을 보내어 나무를 바쳤다. 이에 고쳐 만들도록 명령하고는 쏘았는데, 60보에 이르렀다. 그 까닭을 묻자 “신도 역시 능히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나무가 바다를 건너는 동안에 습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고 대답하였다. 천자(天子)는 일부러 제대로 만들지 않는다고 의심하고는 무거운 벌로써 위협하였지만 결국 자기의 재주를 모두 나타내 바치지는 못하였다.
말을 기르는 목장 174곳을 나누어 주었다. 소내(所內)에는 22곳, 관청에는 10곳을 속하게 하였고, 태대각간(太大角干) 유신(庾信)에게 6곳, 대각간(大角干) 인문(仁問)에게 5곳, 각간(角干) 일곱 명에게 각각 3곳, 이찬(伊湌) 다섯 명에게 각각 2곳, 소판(蘇判) 네 명에게 각각 2곳, 파진찬(波珍湌) 여섯 명과 대아찬(大阿湌) 열두 명에게는 각각 1곳씩 나누어 주고, 그 아래 74곳은 적절하게 나누어 주었다.
10년 봄 정월에 고종(高宗)흠순(欽純)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양도(良圖)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남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여 황제가 책망하고 성내면서 거듭 사신을 억류하였기 때문이다.

3월에 사찬(沙湌)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 말갈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唐)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을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임성(水臨城) 사람인 대형(大兄) 모잠(牟岑)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 남쪽에 이르러 당(唐)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다식(多式) 등을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을 보았지만, 지금 우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에 머물게 하였다.

한기부(漢祗部)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벼 2백 섬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大阿湌) 유돈(儒敦)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品日) 문충(文忠) 중신(衆臣) 의관(義官) 천관(天官)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군관(軍官)문영(文穎)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 베었는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衆臣) 의관(義官) 달관(達官) 흥원(興元)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고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 △△△△일(一)에게 각각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를 차이있게 주었다.

사찬(沙湌) 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 가을 8월 1일 신축일에 신라 왕은 고구려 상속자 안승(安勝)에게 명령을 내리노라. 공(公)의 태조 중모왕(中牟王)은 덕을 북산(北山)에 쌓고 공을 남해(南海)에 세워 위엄있는 풍모가 청구(靑丘)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를 덮었다. 자손이 서로 잇고 뿌리와 줄기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땅은 천리를 개척하였고 햇수는 장차 800년이나 되려고 하였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서 화가 집안에서 일어나고 틈이 형제간에서 생겨 집안과 나라가 깨지고 없어졌고 종묘와 사직이 없어지게 되었으며 백성들은 파도처럼 흩어져 마음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다. 공은 산과 들에서 위험과 곤란을 피하다가 이웃 나라에 홀몸을 맡겼다. 떠돌아다닐 때의 고생과 고통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와 같다. 무릇 백성에게는 임금이 없을 수 없고 하늘은 반드시 사람을 돌보아 주심이 있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계승자는 오직 공이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관하는데 공이 아니면 누가 하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一吉湌) 김수미산(金須彌山) 등을 보내 책명을 펼쳐 공을 고구려의 왕으로 삼을지니, 공은 마땅히 남은 백성들을 어루만져 모아 옛 영광을 잇고 일으켜 영원히 이웃 나라가 되어 형제처럼 섬겨야 할 것이다. 삼가하고 삼가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무늬를 넣은 비단 다섯 필, 명주와 가는 실로 곱게 짠 베 각 10필, 목화솜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12월에 토성(土星)이 달에 들어갔고 서울(京都)에는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중시(中侍) 지경(智鏡)이 물러났다.
왜국(倭國)이 이름을 바뀌어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해 뜨는 곳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붙였다”고 하였다.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백제의 ■■■■■■를 얻고 마침 일이 발각되어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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