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8년~10년
8년 봄에 아마(阿麻)233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0 順天都護府 山川條에 “阿麽島 在金鰲島西 周百里”라 하였으므로, 현재의 여수 남쪽의 어느 섬인 듯하다.닫기가 와서 항복하였다. 원기(元器)와 함께 연정토(淵淨土)234 고구려의 관리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이다.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보장왕 24년(665)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 3형제가 분쟁을 일으켜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곧이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간 뒤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를 당나라에 보냈는데, 연정토(淵淨土)는 그곳에 머물러 돌아오지 않았고 원기(元器)만 돌아왔다. 이후로 여인을 바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는 칙명이 있었다.
파진찬(波珍湌) 23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지경(智鏡)236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었던 김지경(金智鏡, ?~?)을 말한다. 김개원(金愷元)의 형이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伊湌)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 파진찬(波珍湌)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670년 12월까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닫기을 중시(中侍)237 신라의 관직으로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집사부의 장관으로 설치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이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에 해당하는 자들만 맡을 수 있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닫기로 삼았다.
비열홀주(比列忽州)238 지금의 함남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진흥왕 17년(556)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진흥왕 29년(568)에 달홀주(達忽州)로 바뀌었으며, 문무왕 8년(668)에 다시 설치되었다.닫기를 설치하고 이에 파진찬(波珍湌) 23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용문(龍文)을 총관(摠管)240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하였다.
여름 4월에 꼬리별이 천선(天船)241 왕양(王良) 별자리 옆의 8개 별로 이루어진 성좌로 은하수를 가로 지르고 있다. 천황(天潢) 또는 천횡(天橫)이라고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5쪽).닫기을 지켰다.
6월 12일에 요동도(遼東道) 안무부대사(安撫副大使) 요동행군부대총관(遼東行軍副大摠管) 겸 웅진도(熊津道) 안무대사(安撫大使) 행군총관(行軍摠管) 우상(右相)42 옛부터 재상에는 左相과 右相이 있었는데, 당대에는 尙書省의 右丞相 혹은 中書令을 右相이라 하였다.닫기 검교(檢校) 태자좌중호(太子左中護)243 太子左中護는 태자를 호위하던 동궁의 무관직이고, 檢校는 관직을 임시로 겸임한다는 뜻이다.닫기 상주국(上柱國) 낙성현개국남(樂城縣開國男) 244 唐代의 봉작으로는 國王, 郡王, 國公, 郡公, 開國郡公, 縣公, 開國侯, 伯, 子 등 9등급이 있었다고 하는 데(《通典》 권19, 직관1 封爵條), 開國男은 그 아래의 봉작이었을 것이다.닫기유인궤(劉仁軌)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숙위(宿衛)인 사찬(沙湌) 245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김삼광(金三光)246 신라의 장군이자 김유신의 맏아들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문무왕 6년(666)에 김한림(金漢林)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서 숙위(宿衛)하였고, 문무왕 8년에는 당나라 장군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며, 신문왕 3년(683)에는 파진찬(波珍粥)으로 일길찬(一吉粥)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때 김흠운의 집에 가서 결혼 일자를 정하였다.닫기과 함께 당항진(党項津)에 도착하였다. 왕이 각간(角干) 24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김인문(金仁問)에게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右相)은 약속을 마치고는 천강(泉岡)으로 향하였다.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에게 성대한 예식(禮式)으로 인도하여 맞이하게 하였다. 이에 우상(右相)은 약속을 마치고는
21일에 대각간(大角干) 249 신라 17관등의 제1위인 각간(角干)보다도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金庾信)에게만 특별히 내렸다.닫기김유신(金庾信)250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을 대당(大幢)251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대총관(大摠管)으로 삼았고, 각간(角干) 252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김인문(金仁問)253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과 흠순(欽純) 254 신라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인 김 흠순(金欽純, ?~?)을 말한다.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품일(品日)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과 싸웠는데, 이때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여 몸을 바쳐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문무왕 3년(663)에는 백제 부흥군이 머물렀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문무왕 8년(668)에는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669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황제에게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한 사실을 사죄하고 다음해 돌아왔다.닫기천존(天存) 255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문충(文忠)56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태종무열왕 5년(658)과 문무왕 1년(661)에는 각각 이찬(伊飡)과 상주(上州) 장군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에서 백제 부흥군과 맞서 싸웠다.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2년 뒤에는 품일(品日)·중신(衆臣) 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닫기 잡찬(迊湌) 25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간(迊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진복(眞福)258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진복(眞服)이라고도 쓴다. 문무왕 1년(661)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백제의 유민을 물리쳐 상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부장군(副將軍)으로 인문(仁問)·양도(良圖)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 근처에 머물고 있었던 소정방(蘇定方)에게 군량을 전하여 역시 상을 받았다. 문무왕 5년(665) 2월에는 이찬(伊飡)으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문무왕 8년(668) 3월까지 재임하였고, 곧이어 대당(大幢) 총관에 임명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여한 공을 세웠다. 신문왕 1년(681) 8월에 상대등(上大等)에 임명되어 효소왕 3년(694)까지 재임하였던 듯하다.닫기 파진찬(波珍湌) 25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지경(智鏡)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었던 김지경(金智鏡, ?~?)을 말한다. 김개원(金愷元)의 형이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伊湌)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 파진찬(波珍湌)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670년 12월까지 중시(中侍)를 역임하였다.닫기 대아찬(大阿湌) 261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양도(良圖) 26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양도(金良圖, ?~670)를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대아찬(大阿飡)이 되었는데, 이때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에게 백제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지만 사양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품일(品日)·충상(忠常)과 함께 백제 유민의 공격으로부터 사비성(泗沘城:扶餘)을 지켰다. 문무왕 8년(668)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웠다. 이듬해 김흠순(金欽純)과 함께 백제의 땅을 함부로 사용하였다는 당나라 황제에게 사실을 알리러 갔다가 문무왕 10년(670)에 당나라 서경(西京)의 감옥에서 죽었다. 신라의 대표적인 문장가로도 알려져 있다.닫기개원(愷元) 263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었던 김개원(金愷元, ?~?)을 말한다. 예원(禮元)이라고도 한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伊飡)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아찬(大阿飡)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대당(大幢)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왕명을 받아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효소왕 4년(695)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닫기흠돌(欽突)264 신라의 삼국통일에 기여한 장군 김흠돌(金欽突,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7월에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김유신을 도와 시이곡정(始飴谷停)까지 진격하였고, 668년 6월에는 대아찬(大阿飡)으로 고구려 정벌에 공을 세워 파진찬(波珍飡)으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신문왕 1년(681)에 파진찬 흥원(興元), 대아찬 진공(眞功) 등과 모반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을 대당(大幢)265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총관(摠管)266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삼았으며, 이찬(伊湌) 26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진순(陳純) 혹은 진춘(陳春)268 진순(眞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관리로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죽지(竹旨)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닫기과 죽지(竹旨)269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竹旨)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닫기를 경정(京停) 총관(摠管)으로, 이찬(伊湌) 품일(品日)270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 잡찬(迊湌) 문훈(文訓)271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닫기 대아찬(大阿湌) 천품(天品)272 신라의 장군으로 문무왕 1년(661)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귀당총관(貴幢摠管)으로 참전하였고, 668년에도 귀당총관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각간 김인문(金仁問)과 대아찬 조주(助州)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곧바로 신라로 돌아왔다.닫기을 귀당(貴幢)73 신라 지방군단의 하나이다. 수도 경주 부근에 설치한 대당(大幢)과 더불어 6정(停)에 속하였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이찬(伊湌) 인태(仁泰)274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태(金仁泰, ?~?)를 말한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각찬(角粲)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7천 명의 군사로 사비성(泗泌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문무왕 8년(6688)에는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서,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왕자 등을 데리고 당나라고 돌아갈 때, 김인문(金仁問)을 수행하여 함께 당나라에 들어 갔다.닫기를 비열도(卑列道) 총관(摠管)으로, 잡찬(迊湌) 군관(軍官)275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 대아찬(大阿湌) 도유(都儒)6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문무왕 11년조에 실려 있는 문무왕의 《答薛仁貴書》에서는 朴都儒라 하였다. 그는 문무왕 8년에 대아찬으로서 한성주 행군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에 참가하였으나 후에 당과 내통하여 신라 땅을 습격하려던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닫기 아찬(阿湌) 27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용장(龍長)278 문무왕 8년에 한성주 행군총관이 되어 고구려 정벌전에 참가하고 곧이어 國原京 사신이 되어 귀경하던 문무왕에게 褥突驛에서 사사로이 주연을 베풀었다. 당시 그의 관등은 대아찬이었다.닫기을 한성주(漢城州)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삼았고, 잡찬(迊湌) 숭신(崇信), 대아찬(大阿湌) 문영(文穎)279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 아찬(阿湌) 복세(福世)28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문무왕 8년(668)에 비열성주(卑列城州) 행군총관(行軍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신문왕 5년(685)에 대아찬(大阿湌)에 올라 청주(菁州) 총관(摠管)이 되었다.닫기를 비열성주(卑列城州)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삼았으며, 파진찬(波珍湌) 선광(宣光), 아찬(阿湌) 장순(長順) 순장(純長)을 하서주(河西州)81 신라 중고기에 지금의 강원도와 경상북부 북부지역을 다스리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이다. 곧 지증왕 6년(505)에 실직(悉直)이 설치되었고 그 뒤 하슬라(何瑟羅)에도 주(州)가 두어졌다. 하서주는 언제 설치되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8세기에도 계속 쓰였다.닫기 행군(行軍) 총관(摠管)으로, 파진찬(波珍湌) 의복(宜福)282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하주(下州) 장군으로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지만 뒤늦게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던 ‘의복(義服)’과 문무왕 8년(668)에 당나라 군대에 맞서 싸웠던 ‘의복(義福)’은 모두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과 아찬(阿湌) 천광(天光)283 문무왕 8년에 誓幢 총관으로서 고구려 정벌에 참가하여 9월 21일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 등을 사로잡아 당으로 돌아갈 때 김인문·助州 등과 함께 이른바 ‘立功軍將’으로서 입당하였다. 문무왕 13년 8월에 중시가 되었다.닫기을 서당(誓幢)284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를 두었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아찬(阿湌) 일원(日原)과 흥원(興元)85 문무왕 8년에 罽衿幢 총관으로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 등을 사로잡아 귀환할 때 김인문·助州 등과 함께 이른바 ‘立功軍將’으로서 입당하였다. 문무왕 10년 7월 백제 부흥군 토벌시에 퇴각하였다가 면직되었으며, 신문왕 원년 8월에는 흠돌·진공 등과 함께 반란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을 계금당(罽衿幢)286 태종무열왕 1년(654)에 설치되었으며, 누런 빛깔의 계색(罽色) 군복을 입었다. 대대감(隊大監, 領騎兵) 아래 제감(弟監), 감사지(監舍知), 소감(少監, 領騎兵), 화척(火尺, 領騎兵), 삼천당주(三千幢主), 삼천감(三千監) 등이 편제되었는데, 기병을 이끌었던 기병 중심의 부대였다.닫기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22일에 부성(府城)의 유인원(劉仁願)이 귀간(貴干)287 신라의 지방세력가가 받은 외위(外位) 가운데 제4위의 관등으로, 경위(京位)로는 대나마(大奈麻)에 상당하였다. 문무왕 13년(673)에 신라에 들어온 백제인에게 관위를 주었는데, 멸망 전 달솔(達率)에게 귀간의 관등을 주었다.닫기 미힐(未肹)을 보내 고구려의 대곡(大谷)288 지금의 황해 평산 일대를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3쪽).닫기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귀순하여 항복하였음을 알렸다. 왕은 일길찬(一吉湌) 28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일길간(一吉干)·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닫기진공(眞功)290 문무왕 11년에 당과 백제군이 신라를 침입해온다는 정보를 듣고 대아찬으로서 甕浦를 지켰다. 그 후 신문왕 원년 8월에 欽突, 興元 등과 반란을 꾀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을 보내 축하하였고, 인문(仁問) 291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천존(天存) 29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도유(都儒) 등은 일선주(一善州)93 지금의 경북 선산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진평왕 36년(614)에 사벌주(沙伐州)를 폐지하고 설치하였다.닫기 등 일곱 곳의 군과 한성주(漢城州)의 군사와 말을 이끌고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7일에 왕이 서울(京)을 출발하여 당나라 군영으로 나아갔다.
29일에 여러 도(道)의 총관(摠管)들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왕은 유신(庾信)295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이 풍병(風病)을 앓았으므로 서울에 남도록 하였다. 인문(仁問)296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 등은 영공(英公)을 만나서 영류산(嬰留山)97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4쪽).닫기 아래로 진군하였다. 영류산(嬰留山)은 지금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94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들이 행군을 시작하였다. 왕은 유신(庾信)295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이 풍병(風病)을 앓았으므로 서울(京)에 남도록 하였다. 인문(仁問)296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 등은 영공(英公)을 만나서 영류산(嬰留山)297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4쪽).닫기 아래로 진군하였다. 영류산(嬰留山)297 지금의 평양 대성산(大城山)으로 비정하기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4쪽).닫기은 지금 서경(西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가을 7월 16일에 왕이 한성주(漢城州)에 이르러서 여러 총관(摠管)298 신라의 행정구역인 주(州)의 행정과 군정(軍政)을 관장하던 장관(長官)으로 군주(軍主)라고도 한다. 군주는 지증왕 6년(505)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문무왕 1년(661)에 총관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원성왕 1년(785)에는 다시 도독(都督)으로 불렸다. 이찬(伊飡)에서 급찬(級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들에게 가서 당나라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였다. 문영(文穎)299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 등이 사천(蛇川)300 현재의 평남 평양시 동쪽의 合掌江이 아닐까 하는 견해가 있다(井上秀雄 譯註, 《삼국사기》 1, 1980, 188쪽).닫기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만나 맞서 싸워 크게 무찔렀다.
9월 21일에 당(唐)나라 군사와 합하여 평양(平壤)을 포위하였다. 고구려 왕은 먼저 연남산(淵男産)301 고구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세 아들 가운데 막내아들로, 생몰연도는 639~701이다. 보장왕 27년(668)에 형인 연남건(淵男建)과 함께 평양성(平壤城)에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과 맞서 싸우다가 패배하여 아버지, 형들과 함께 당나라에 끌려갔다.닫기 등을 보내 영공(英公)에 이르러 항복을 요청하였다. 이에 영공(英公)은 보장왕(寶臧王)과 왕자(王子) 복남(福男)302 보장왕의 아들로 666년에 당나라 고종이 國威를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泰山에서 거행한 封禪儀式에 고구려 대표로서 참석하였다.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男福’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잘못이다.닫기, 덕남(德男), 대신(大臣) 등 20여만 명을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각간(角干) 30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김인문(金仁問)304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과 대아찬(大阿湌) 30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조주(助州)가 영공(英公)을 따라갔고, 인태(仁泰) 306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태(金仁泰, ?~?)를 말한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각찬(角粲)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7천 명의 군사로 사비성(泗泌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문무왕 8년(6688)에는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서,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왕자 등을 데리고 당나라고 돌아갈 때, 김인문(金仁問)을 수행하여 함께 당나라에 들어 갔다.닫기의복(義福) 307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에 하주(下州) 장군으로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는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지만 뒤늦게 빈골양(賓骨壤)에 이르러 백제 부흥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여 벌을 받았던 ‘의복(義服)’과 문무왕 8년(668)에 서당(誓幢) 총관(摠管)이었던 ‘의복(宜福)’과는 모두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수세(藪世) 308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70이다. 문무왕 1년(661)에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의 백제 유민을 무찔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각간 김인문(金仁問) 등과 함께 고구려의 보장왕을 데리고 당나라에 들어갔으며, 670년에 한성주(漢城州) 총관으로 있으면서 반란을 꾀하였다가 김진주(金眞珠)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닫기천광(天光) 흥원(興元) 등도 좇아 갔다. 처음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평정할 때 왕은 한성(漢城)을 출발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힐차양(肹次壤)에 도착하였는데, 당나라의 여러 장수가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한성에 이르렀다.
겨울 10월 22일에 유신(庾信)309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金庾信, 595~673)을 말한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310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위인 각간보다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대각간(大角干)을 받았던 김유신(金庾信)이 문무왕 8년(668)에 처음으로 받았다.닫기을, 인문(仁問)311 신라의 장군·외교가인 김인문(金仁問)을 말한다. 그는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로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에게 대각간(大角干)312 신라 17관등의 제1위인 각간(角干)보다도 높은 특별한 지위로,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金庾信)에게만 특별히 내렸다.닫기의 관등을 내렸다. 그 외에 이찬(伊湌)31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과 장군(將軍) 등을 모두 각간(角干)31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으로 삼았고, 소판(蘇判)315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3관등이다. 잡찬(迊湌)의 다른 이름으로 잡판(迊判), 잡간(迊干)으로도 부른다.닫기 이하에게는 모두 한 등급씩 더해 주었다. 대당(大幢)316 신라 6정(停)의 하나로, 진흥왕 5년(544) 경주 부근에 배치된 군대조직이다. 장군 4명 아래에 대관대감(大官大監) 5명, 대대감(隊大監) 3명, 제감(弟監) 5명, 감사지(監舍知) 1명, 소감(小監)·대척(大尺) 각 21명, 군사당주(軍師幢主)·대장척당주(大匠尺幢主) 1명, 보기당주(步騎幢主) 6명,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 30명, 군사감(軍師監) 2명, 대장척감(大匠尺監) 1명, 보기감(步騎監) 6명 등을 두었다.닫기 소감(小監) 317 신라의 무관인 소감(少監)의 잘못이다. 소감은 진흥왕 32년(562)에 제감(弟監)과 같이 처음 두어졌다. 6정(六停)·9서당(九誓幢)을 비롯하여 10정(十停)·5주서(五州誓) 등에도 배속되었는데 그 수는 모두 372명에 이르렀다.닫기본득(本得)은 사천(蛇川)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고, 한산주(漢山州) 소감(小監) 318 少監은 진흥왕 23년(562)에 설치한 무관직으로, 停과 誓幢 등에서 기병과 보병을 통솔했으며 관등이 大舍 이하인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武官條에 의하면, 大幢에는 15명의 少監이 있었다고 한다.닫기박경한(朴京漢)은 평양성(平壤城) 안에서 군주(軍主) 술탈(述脫)을 죽였던 공이 첫째였으며, 흑악령(黑嶽令) 319 黑嶽縣의 현령이라는 의미인 듯한데, 흑악현의 현재 위치는 알 수 없다.닫기선극(宣極)은 평양성 대문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모두 일길찬(一吉湌)320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일길간(一吉干)·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닫기의 관등을 주고 조(租) 1천 섬을 내렸다. 서당(誓幢)321 국왕의 직속부대이자 중앙의 군단으로 모두 9개가 부대가 있었다. 진평왕 5년(583)부터 신문왕 7년(687)까지 조직되었는데 신라 사람 뿐만 아니라,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백제·말갈의 유망인들까지를 포함하였다. 곧 녹금(綠衿)·자금(紫衿)·비금(緋衿) 서당은 신라 사람으로 편제하였고, 황금(黃衿)·벽금(碧衿)·적금(赤衿) 서당은 고구려인으로, 백금(白衿)·청금(靑衿) 서당은 백제인으로, 흑금(黑衿) 서당은 말갈인으로 편성되었다. 각 서당은 옷깃의 금색(衿色)에 따라 각기 부대를 구분하고, 거의 같은 숫자의 군관과 군사로 편성되었다.닫기 당주(幢主) 322 신라의 군사조직인 당(幢)의 우두머리를 말한다.닫기김둔산(金遁山)은 평양군영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323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의 관등과 조 7백 섬을 내려 주었다. 군사(軍師) 324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남한산(南漢山)의 북거(北渠)는 평양성 북문(北門)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325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2위로 경위(京位)의 사찬(沙湌)에 상당하였다.닫기의 관등과 벼 1천 섬을 주었고, 군사(軍師) 326 신라의 관직으로, 지방의 유력자가 군단(軍團)에 편제되어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닫기부양(斧壤)327 지금의 강원 평강 일대를 말한다닫기의 구기(仇杞)는 평양 남교(南橋) 싸움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술간(述干)의 관등과 벼 700섬을 내렸다. 가군사(假軍師) 328 《삼국사기》의 잡지 직관조에는 보이지 않는 관직이다. 명칭으로 보아 그 기능은 軍師와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임시직인 점에서는 다르다고 하겠다. 군사와 마찬가지로 지방민에게 준 관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닫기비열홀(卑列忽)의 세활(世活)은 평양소성(平壤小城) 전투에서 공이 첫째였으므로 고간(高干)329 신라 외위(外位) 가운데 제3위로 경위(京位)의 급찬(級湌)에 상당하였다.닫기의 관등과 벼 5백 섬을 내려 주었다. 한산주(漢山州) 소감(小監) 김상경(金相京)은 사천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공이 첫째였으므로 일길찬(一吉湌)의 관등을 추증하고 조 1천 섬을 내려 주었다. 아술(牙述)330 지금의 충남 아산 일대를 말한다.닫기의 사찬(沙湌) 구율(求律)은 사천전투에서 다리 아래로 물을 건너 나아가 적과 싸워 크게 이겼는데, 군령(軍令)을 받지 않고 스스로 위험한 길로 들어갔기 때문에 공은 비록 제일이었으나 포상되지 않았다. 분하고 한스럽게 여겨 목을 매어 죽고자 하였지만 주위 사람들이 구하여 죽지는 못했다.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
2월 21일에 대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교서(敎書)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서 북쪽은 정벌을 당하고 서쪽은 침략을 당하여 잠시도 편안할 때가 없었다. 병사들은 해골을 드러내어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경계에서 서로 나뉘어 뒹굴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의 잔혹한 피해를 불쌍히 여겨 천승(千乘)의 귀하심을 잊고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황제께 군사를 요청하셨다.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이 없게 하고,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한을 설욕하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온전히 하려는 것이었다.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지만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려는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군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이미 모두 상을 받았고, 싸우다 죽어 혼령만 남은 이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이들도 아직 새롭게 시작하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 생각하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줄 것이니, 총장(總章)341 戰時에 戰車 1천 대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신라왕을 의미한다. 전차 1대에는 甲士 3명, 步兵 72명, 車士 2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본문에서 천승의 몸으로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갔다는 것은 진덕왕 초에 김춘추가 아들 文王과 함께 입당한 사실을 말한다. 그러나 당시 김춘추는 아직 千乘의 지위 곧 신라왕에 즉위하기 전이었다.닫기의 귀하심을 잊고서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황제께 군사를 요청하셨다.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이 없게 하고,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한을 설욕하며 백성들의 남은 목숨을 온전히 하려는 것이었다. 백제는 비록 평정하였지만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려는 유업(遺業)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안정되고 편안해졌다. 군영에 나아가 공을 세운 사람들은 이미 모두 상을 받았고, 싸우다 죽어 혼령만 남은 이들에게는 명복을 빌 재물을 추증하였다. 다만 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은 죄인을 불쌍히 여겨 울어주는 은혜342 《說苑》의 “禹出見罪人 下車問而泣之”라는 말에 연원한다.닫기를 받지 못하였고, 칼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이들도 아직 새롭게 시작하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이러한 일들을 말하고 생각하니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지 못하다. 나라 안의 죄수들을 풀어줄 것이니, 총장(總章)343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68~669년에 사용하였다.닫기2년 2월 21일 새벽 이전에 5역(五逆)344 임금과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를 죽이는 죄악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17쪽).닫기의 죄를 범하여 사형을 받는 죄목 아래로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죄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모두 다 풀어준다. 앞서 사면을 받은 뒤에 또다시 죄를 범하여 관작을 빼앗긴 사람들도 모두 이전과 같게 하라. 남의 것을 훔친 사람은 다만 그 몸을 풀어주되, 재물이 없어 훔친 물건을 돌려줄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징수하지 말라. 백성들이 가난하여 다른 사람의 곡식을 빌려 쓴 사람 중에 흉년이 든 곳에 사는 사람은 이자와 원금을 모두 갚을 필요가 없고, 풍년이 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올해 곡식이 익어 거둘 때에 단지 원금만 갚고 그 이자는 갚을 필요가 없다. △△ 30일을 기한으로 하여 담당 관청에서는 받들어 행하라.”
3월에 사찬(沙湌) 368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太大兄) 369 고구려 14관등의 하나로 제2위에 해당하였다.닫기고연무(高延武)370 고구려의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문무왕 10년(670)에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 이북에 설치된 당나라의 도독부(都督府)와 말갈족(靺鞨族)을 격파하면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보덕국(報德國)의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으로 문무왕 20년(680)에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의 조카를 보덕국왕 안승(安勝)의 왕비로 맞게 해준 답례의 편지를 전하였다.닫기와 함께 각각 정예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 말갈군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러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에 맞서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가히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唐)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371 지금의 경기 안성 일대를 말한다.닫기을 지켰다.
6월에 고구려 수임성(水臨城)372 신라의 漢州 開城郡 臨津縣의 고구려 때 지명인 臨津城과 같은 곳으로,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지역으로 추정된다.닫기 사람인 대형(大兄) 373 고구려 14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힐지(纈支)라고도 하였다.닫기모잠(牟岑)374 고구려의 관리인 검모잠(劍牟岑, ?~670)을 말한다. 겸모잠(鉗牟岑)이라고도 한다. 안승을 맞아 고구려의 부흥을 꾀하였고, 신라에 협조하여 당나라 군사를 내모는데 힘썼다가 안승과의 불화로 피살되었다.닫기이 남은 백성들을 모아서 궁모성(窮牟城)으로부터 패강(浿江)375 패강은 시대와 사용자에 따라 압록강, 대동강, 임진강 등 여러가지로 사용되었다. 여기서의 浿江은 大洞江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닫기 남쪽에 이르러 당(唐)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376 지금의 덕적도 부근에 있는 소야도(蘇爺島)를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3쪽 주6).닫기에 이르러서 고구려 대신(大臣) 연정토(淵淨土)377 고구려의 관리로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동생이다.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보장왕 24년(665)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아들 3형제가 분쟁을 일으켜 남생(男生)이 당나라에 항복하자 곧이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그 뒤 문무왕 8년(668)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간 뒤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의 아들인 안승(安勝)378 安勝은 安舜이라고도 하였다. 안승은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史耶島에 피신해 있던 중 670년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劒牟岑 등에 의하여 漢城(현재의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안승은 小兄 多式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문무왕이 그를 고구려 왕으로 봉하여 주었다. 그 후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는 안승 집단을 金馬渚에 안치하고 674년에 그를 報德國王으로 봉하였다. 그리고 680년에는 문무왕이 姪女를 보내어 안승의 아내로 삼게 하였고 683년에는 王都에 초청되어 소판의 관등과 金氏의 성을 받고 왕경에 거주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대하여 이듬해에 금마저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었다. 한편 安勝의 出系에 대하여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27년조에는 안승을 보장왕의 庶子라 하였고, 《신당서》 권220 고려전에는 보장왕의 外孫이라 하여 신라본기와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안승을 연정토의 아들이라 한 신라본기의 내용이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문무왕 10년 7월에 문무왕이 안승에게 내린 冊文으로 보아, 신라본기에서처럼 안승이 연정토의 아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닫기을 보고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들여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 소형(小兄) 379 고구려 14관등 가운데 제10위의 관등으로, 실지(失支)라고도 하였다.닫기다식(多式) 등을 보내어 슬피 아뢰었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세대를 잇게 하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것을 바랄 뿐입니다. 우리 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을 보았지만, 지금 우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는 것은 변방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금마저(金馬渚)380 지금의 전북 익산시 지역을 말한다.닫기에 머물게 하였다.
한기부(漢祗部) 여자가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벼 2백 섬을 주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들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大阿湌) 82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유돈(儒敦)383 신라의 관리인 김유돈(金儒敦)을 말한다. 그의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김인문을 보좌하며 숙위(宿衛)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과 함께 귀국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 뒤 문무왕 10년(670)에는 백제의 유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신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들어가 강화를 요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닫기을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보내 화친을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곧 사마(司馬) 예군(禰軍)384 문무왕 10년에 신라에 억류되었다가 문무왕 12년 9월에 兵船郞將 鉗耳大侯 등의 당나라 병사들과 함께 풀려났다. 한편 《日本書紀》 권27 天智 4년 9월조에 唐使 劉德高 등과 함께 일본에 갔던 百濟 禰軍과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을 보내 우리를 엿보았다. 왕은 우리를 도모하려는 것을 알고 예군을 붙잡아 두고 보내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쳤다. 품일(品日) 385 신라의 장군이자 화랑 관창(官昌)의 아버지이다. 생몰년은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김유신(金庾信)·흠순(欽純)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백제의 계백(階伯)을 자신의 아들 관창을 나아가게 하여 물리치는데 공을 세웠다. 다음해에는 대당(大幢) 장군에 임명되어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 하주(下州) 장군 의복(義服) 등과 함께 백제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다가 오히려 패배하여 왕에게 벌을 받았다.닫기문충(文忠) 386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중시(中侍)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태종무열왕 5년(658)과 문무왕 1년(661)에는 각각 이찬(伊飡)과 상주(上州) 장군이 되어 사비성(泗沘城)에서 백제 부흥군과 맞서 싸웠다. 문무왕 8년(668)에는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2년 뒤에는 품일(品日)·중신(衆臣) 등과 함께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닫기중신(衆臣) 387 신라의 관리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이 출정할 때 진흠(眞欽)·자간(自簡) 등과 함께 하주(下州) 총관(摠管)에 임명되어 출전하였다가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는 백제의 남은 무리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 공을 세웠다.닫기의관(義官)88 원성왕의 曾祖父인 義寬과 동일인이다. 義官의 딸은 보덕왕 안승의 처가 되었다.닫기 천관(天官) 등이 63곳의 성을 쳐서 빼앗고 그곳의 사람들을 내지(內地)로 옮겼다. 천존(天存)389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과 죽지(竹旨)390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竹旨)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닫기 등은 일곱 성을 빼앗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 군관(軍官)391 신라의 장군인 김군관(金軍官, ?~681)을 말한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과 문영(文穎)392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문영(金文穎,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라와 당나라가 백제를 공격하려 할 때 독군(督軍)을 맡았는데, 신라의 군사가 합군(합군)의 날짜를 어겨 소정방(蘇定方)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였다가 김유신의 만류로 살았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사천(蛇川)의 들판에서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찌르는 공을 세웠다. 신문왕 3년(683)에는 왕비 간택에 참여하였다가 효소왕 3년(694)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되었다.닫기 등은 12성을 빼앗고 오랑캐 군사를 쳐서 7천 명을 목 베었는데 빼앗은 말과 병기들이 매우 많았다. 왕이 돌아와서 중신(衆臣) 의관(義官) 원성왕의 曾祖父인 義寬과 동일인이다. 義官의 딸은 보덕왕 안승의 처가 되었다.닫기 달관(達官) 393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달관(達官)·문영(文潁)과 함께 수약주(首若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옹산성(甕山城)에 머물고 있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여 제거한 공을 세워 창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10년(670)에는 장군 품일(品日)·문충(文忠)·중신(衆臣)·천관(天官) 등과 함께 출전하여 백제 부흥군이 장악하였던 75성을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전투 중 후퇴하였다 하였다는 이유로 면직되었다.닫기흥원(興元) 등은 △△△사(寺) 군영에서 퇴각하였으므로, 그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용서하고는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창길우(倉吉于) △△△△일(一)에게 각각 급찬(級湌)의 관등을 주고 조(租)를 차이있게 주었다.관등 중 제9의의 관등으로 급벌찬(級伐湌)이라고도 한다.닫기
사찬(沙湌) 395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수미산(須彌山)을 보내어 안승(安勝)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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