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왕(聖德王) 1년~20년
성덕왕(聖德王)091 신라의 제3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712~737년이다.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친형 효소왕을 이어 즉위하였다. 성덕왕은 나당전쟁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소원해졌던 나당관계를 다시 긴밀히 하였고 백성들에게 丁田을 지급하여 민생을 안정시켰으며, 북쪽에 長城을 축조하고 동쪽에 毛伐郡城을 쌓아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였다. 그리고 당으로부터 패강 지역을 賜與받아 원산만에서 대동강 이남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또한 성덕왕대에는 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였으나 성과없이 되돌아왔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9쪽)닫기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흥광(興光)이다. 본명(本名)은 융기(隆基)였는데, 당 현종(玄宗)과 이름이 같아 선천(先天)092 중국 당나라 현종의 연호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12)닫기 연간에 고쳤다.093 성덕왕(聖德王왕) 11년條(조) 참조. 《구당서(舊唐書》 신라조(新羅條)에 '興光(聖德王)本名與太宗同, 先天中(선천중), 則天(武后)改焉'이라 한 것은 너무도 상식에 어그러진 杜撰(두찬)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7쪽)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성덕왕 11년 3월조에 의하면, 712년(先天 원년)에 당나라 사신 盧元敏이 신라에 와서 성덕왕의 이름을 고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은 《唐會要》 권95 신라전에도 간략히 소개되어 있다. 한편 《舊唐書》 권199 신라전에서는, 성덕왕의 본명이 당 太宗과 같아서 先天 중에 측천무후가 그것을 바꾸도록 했다고 하나, 이는 잘못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9쪽)닫기《당서(唐書)》에는 김지성(金志誠)이라 말한다. 094 《당서》가 아니라 《책부원귀(冊府元龜)》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0쪽) 이기사는 《冊府元龜》의 기사(記事)로, 同書(동서) 外臣部 朝貢三(외신부 조공삼), 中宗(중종) 神龍(신룡) 원년(元年)(원년) 3月(월)에 '新羅王金志誠遣使來朝云'이라 했는데, 金志誠(김지성)은 遺唐使(유당사)의 誤記(오기)일 것이다(志誠(지성)의 名(명)은 《三國遺事(삼국유사)》 南月山條(남월산조)에 보임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7쪽).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성덕왕의 이름을 金志誠이라 한 기록이 없다. 그런데 《책부원귀》 권970 외신부 조공 神龍 원년(元年) 3월조에 “신라왕(新羅王) 金志誠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사신으로 입당한 金志誠을 신라 왕으로 잘못 표기한 착오에 지나지 않는다(末松保和, 《甘山寺彌勒尊像及び阿彌陀佛の火光後記》, 《新羅史の諸問題》, 1954, 459쪽). 한편 金志誠이 죽은 부모형제의 명복과 국왕의 복을 빌기 위하여 그의 만년에 조성하여 甘山寺에 희사한 石阿彌陀如來像과 石彌勒菩薩像의 造像記에 의하면, 그는 일길찬 金仁章의 아들로 중아찬으로서 執事侍郞을 역임하였고 성덕왕대 개혁 정치에 조력하였다. 그리고 성덕왕대 견당사로서 입당하여 당으로부터 尙舍奉御의 관작을 받고 돌아왔으며 晩年에는 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산수에 노닐며 생을 마쳤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0쪽). 《당서》를 근거로 하여 성덕왕의 이름을 ‘김지성’이라고 한 분주이다. 그러나 실제로 양 《당서》에는 성덕왕의 이름을 모두 ‘흥광’이라고 하여 본문과 일치하고 있다. 반면 《冊府元龜》에는 성덕왕 4년에 해당하는 중종(中宗) 신룡(神龍) 원년 3월에 ‘신라 왕 김지성’이 보인다. 동시에 성덕왕 4년 3월과 9월, 동왕 5년 4월의 견당사 파견은 《冊府元龜》와 《삼국사기》가 일치한다. 따라서 본 분주의 《당서》는 《冊府元龜》로 보는 것이 옳다. 《冊府元龜》 970 외신부 조공 3에 “중종 신룡 원년 3월에 신라 왕 김지성이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9월에 다시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 2년 4월에 신라 왕 김융기(金隆基)가 사신을 보내 방물을 헌상하였다.”라고 하였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6쪽)닫기신문왕(神文王)의 둘째 아들이고, 효소왕(孝昭王)의 친동생이다. 효소왕(孝昭王)이 죽을 때 아들이 없어 국인(國人)이 그를 왕으로 세웠다. 당(唐)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효소왕(孝昭王)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를 위해 애도하고, 조회를 이틀간 멈추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면서 성덕왕(聖德王)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더하여 형의 장군(將軍)·도독(都督)의 호를 잇게 하였다.
원년(702년) 9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문무 관료의 관작(官爵)을 한 급(級)씩 올려주었다.
또 모든 주군(州郡)의 일년간 조세(租稅)를 면제해주었다.
아찬(阿湌) 원훈(元訓)을 중시(中侍)로 삼았다.2)에 中侍가 되었다가 다음해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삼국유사》 王曆篇에 의하면 元訓은 宣德王 김양상의 할아버지로, 그의 아들 金孝芳은 성덕왕의 딸 四召夫人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시 元訓은 성덕왕과는 사돈지간이 되는 셈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0쪽)닫기
겨울 10월에 삽량주(歃良州)에서 상수리나무 열매(櫟實)가 밤으로 변하였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가을 7월에 영묘사(靈廟寺)에 불이 났다.
도읍에 홍수가 나서 빠져 죽은 이가 많다.
중시(中侍) 원훈(元訓)이 물러나자 아찬(阿湌) 원문(元文)098 성덕왕 2년(703)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4년 정월에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元文을 성덕왕의 先妃 陪昭王后의 아버지인 元大와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이기백, 「신라 집사부의 성립」, 《신라정치사회사연구》, 1974, 167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0쪽)닫기을 중시로 삼았다.
일본국(日本國)에서 사신이 왔는데 모두 204명이었다.
아찬(阿湌) 김사양(金思讓)을 보내 당(唐)에 조회하게 하였다.
3년(704년) 봄 정월에 웅천주(熊川州)에서 금빛 영지(金芝)를 진상하였다.
3월에 당에 들어갔던 김사양(金思讓)이 돌아왔는데,《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00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의 준말이다. 불타가 왕사성(王舍城) 영취산(靈鷲山)에서 여러 제자와 보살에게 여러 하늘 선신(善神)의 가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친 불경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13) 《金光明最勝王經》의 약칭으로 보통 《金光明經》 이라 한다. 護國三部經의 하나이기도 한 이 경전은 5종의 漢譯本이 있는데, 그 가운데 703년 당 義淨의 《金光明最勝王經》 10권이 가장 후에 번역되었다. 그 내용은 如來 수명의 영원성, 四天王에 의한 호국사상 및 현세이익적 신앙 등이다. 성덕왕 2년에 金思讓이 가지고 온 《最勝王經》은 바로 義淨의 번역본이었을 것이다(김상현, 《집일금광명경소-금광명최승왕경현추 소인 원효소의 집편》, 《동양학》 24, 1994, 260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1쪽) 《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의 약칭으로 당 의정(義淨)이 번역하였다. 이 경에는 3본이 있는데 제1 번역은 《금광명경》 (金光明經)이라 하고, 제2 번역은 《합부금광명경(合部金光明經)》 이라 하며, 제3 번역이 곧 이 《금광명최승왕경》 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7쪽)닫기을 바쳤다.
여름 5월에 승부령(乘府令)02 궁중의 乘輿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던 乘府의 장관으로 정원은 2명이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乘府條 참조.닫기 소판(蘇判)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았다.
4년(705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 원문(元文)이 죽자 아찬(阿湌) 신정(信貞)104 성덕왕 4년(705)에 중시가 되었다가 다음해 8월에 病으로 사직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중시는 관등이 대아찬에서 이찬까지인 자로 임명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信貞은 아찬으로서 중시에 임명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2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3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공(朝貢)을 하였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가을 8월에 노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하였다.
9월에 살생을 금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나라 동쪽 주군(州郡)에 기근이 들어 많은 사람들이 떠돌아다니게 되었기에 사신을 파견하여 진휼하였다.
5년(706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인품(仁品)107 성덕왕 5년(706)에 상대등이 되었다가 동왕 19년(720) 정월에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2쪽)닫기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나라 안에 기근이 들어 창고(창름, 倉廩)를 열어 진휼하였다.
3월에 뭇별(중성, 衆星)이 서쪽으로 떨어졌다.
여름 4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중시(中侍) 신정(信貞)이 병 때문에 물러나자 대아찬(大阿湌) 문량(文良)109 성덕왕 5년(706)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10년(711) 10월에 죽었다. 《삼국유사》 권5 孝善篇 大城孝二世父母 神文代條에서, 佛國寺와 石窟寺을 창건했다는 金大城의 아버지인 牟梁里 사람 金 文亮과 동일인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2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당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곡식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
겨울 10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12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6년(707년) 봄 정월에 많은 백성들이 굶어 죽자 한 사람에게 하루에 3되(승, 升)씩 곡식을 나누어주기를 7월까지 계속하였다.
2월에 크게 사면하였다.
백성들에게 오곡(五穀)의 종자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겨울 12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게 하였다.
7년(708년) 봄 정월에 사벌주(沙伐州)에서 상서로운 영지(서지, 瑞芝)를 진상하였다.
2월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여름 4월에 토성(진성, 鎮星)이 달을 침범하여 크게 사면하였다.
8년(709년) 봄 3월에 청주(菁州, 진주)에서 흰 매(백응, 白鷹)를 바쳤다.
여름 5월에 가물었다.
6월에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가을 8월에 죄인을 풀어주었다.
9년(710년) 봄 정월에 천구(天狗)6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流星의 일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3쪽)닫기 별이 삼랑사(三郞寺) 북쪽에 떨어졌다.
당에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지진이 발생하여 죄수를 풀어주었다.
10년(711년) 봄 3월에 눈이 많이 내렸다.
여름 5월에 짐승을 잡아 죽이는 것을 금지하였다.
겨울 10월에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을 순수(巡狩)하였다.
중시(中侍) 문량(文良)이 죽었다.
6월에 크게 가물었다. 왕이 하서주(河西州) 용명악(龍鳴嶽)의 거사(居士) 이효(理曉)을 불러 임천사(林泉寺)134 현재의 경북 경주시 東川洞 409-3번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곳에서는 石槽와 탑의 옥개석 등이 발견된 바 있는데, 석조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이전, 보관되어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5~266쪽)닫기 연못가에서 비를 빌게 하였더니 비가 열흘 간이나 내렸다.
가을 9월에 금성(태백, 太白)이 서자성(庶子星)135 北極星座 5개의 별 가운데 3번째 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66) 서자성은 북극성좌를 이루는 다섯 별 가운데 3 번째 별을 이른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9쪽)닫기을 가렸다.
겨울 10월에 유성(流星)이 자미원(紫微垣)136 북두성 북쪽에 있는 성좌로 천제가 거처하는 곳이라 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6쪽)닫기을 침범하였다.
12월에 유성(流星)이 천창(天倉)137 28수(宿)의 하나인 누수(婁宿)의 남쪽에 있는 6개의 별로, 곡식을 저장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晉書》 권11 天文志(上)에 “天倉六星 在婁南 倉穀所藏也”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 천창성은 28수 가운데 하나로, 서방 백호 7수(白虎 七宿)에 속하는 위수(胃宿)를 이르는 것이다. 천제의 곡물 창고를 관장하는 별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9쪽)닫기에서 태미원(太微垣)에 들어가서 죄인을 풀어주었다.
왕자 중경(重慶)138 성덕왕의 先妃인 陪昭夫人이 낳은 아들로 여겨지는데, 그는 동왕 16년(717)에 죽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닫기을 태자(太子)로 봉하였다.
15년(716년) 봄 정월에 유성(流星)이 달을 침범하여 달에 빛이 없어졌다.
3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성정(成貞) 또는 엄정(嚴貞) 왕후(王后)139 성덕왕(聖德王왕)의 前妃(전비)니, 《삼국유사》 王曆表(왕력표) 聖德王條(성덕왕조)에 의하면 '先妃陪昭王后, 諡嚴貞, 元大[阿干]之女也, 後妃占勿王后, 諡炤德, 順元角干之女'라 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0쪽). 金元泰의 딸로서 성덕왕 3년에 왕비가 된 陪昭王后인데, 成貞 혹은 嚴貞은 그의 시호이다. 성정왕후의 출궁 이유에 관하여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某種의 政治勢力 다툼의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성덕왕 19년에 金順元의 딸이 동왕의 後妃가 된 것으로 보아 金順元의 정치세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 성덕왕의 전 왕비 (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6쪽)닫기를 나가게 하였는데, 채색 비단 5백 필, 전지(田地) 2백 결(結)140 結(결)은 (종래 我國(아국)의) 地積(지적)의 단위이니, 結(결)의 백분의 일을 負(부), 負(부)의 심분의 일을 束(속), 束(속)의 십분의 일을 把(파)라 한다. 신라시대의 結負(결부)의 내용은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고려 文宗(문종) 때의 제도에는 量田尺(양전척) 6尺(척)을 長(장) 1步(보)라 하고, 사방 33보를 1結(결)로 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1쪽). 토지 면적의 단위로서 신라의 결은 알 수 없으나 고려 시대 결은 6척이 1보요 4방 33보를 1결로 하였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6쪽) 결부제(結負制)는 신라시대 이래 토지 면적과 그 수확량을 표시하는 독특한 계량법이었다. 곡화(穀禾) 한 줌을 1파(把)라 하고,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結)이라고 하여, 곡화의 수확량을 표시하는 단위인 동시에 그만한 수확량을 산출할 수 있는 토지 면적을 의미하기도 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0쪽)닫기, 조(租) 1만 석, 집 한 채를 하사하였다. 집은 강신공(康申公)의 옛 집을 사서 주었다.
태풍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기와가 날아가고 숭례전(崇禮殿)이 무너졌다.
당(唐)에 들어갔던 하정사(賀正使) 141 매년 정월 초하루에 당의 조정에서 열리는 賀正式에 참석하여 당의 번영과 唐帝를 祝壽하던 사절단이다. 그들은 自國王이 唐帝에게 올리는 賀正表와 貢物을 지참하고 입당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닫기김풍후(金楓厚)가 신라로 돌아가려 하자 원외랑(員外郞)142 원래는 정원 이외에 두었던 관리를 지칭하였으나, 후대로 오면서 正官이 되어 각 관청의 郞中의 아래, 主事의 위에 위치하였다. 당대의 관품은 正6品이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닫기에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여름 6월에 가물어서 또 거사(居士) 이효(理曉)를 불러 기도하였더니 비가 내렸다. 죄인을 풀어주었다.
16년(717년) 봄 2월에 의박사(醫博士)·산박사(筭博士) 각각 1명을 두었다.
3월에 새 궁을 창건하였다.
여름 4월에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6월에 태자(太子) 중경(重慶)이 죽었는데,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
가을 9월에 당(唐)에 갔던 대감(大監) 김수충(金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143 공자의 시호(諡號)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7쪽) 唐 玄宗 開元 27년에 공자에게 추증한 시호이므로 성덕왕 16년 당시에는 文宣王이란 명칭이 없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공자를 文宣王이라 한 것은 후대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 문선왕은 당 현종이 개원(開元) 연간에 추시한 공자의 시호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0쪽)닫기과 10철(十哲)144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인 안회(顔回) 등 열 사람을 말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17) 10哲(철)은 孔子(공자)의 제자 중 賢行(현행)이 있는 顔淵(안연)·閔子騫(민자건)·冉伯牛(염백우)·仲弓(중궁)·宰我(재아)·子貢(자공)·冉有(염유)·李路(이노)·子游(자유)·子夏(자하) 등 10인을 일컫는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1쪽) 공자의 제자 가운데 賢行이 뛰어난 10명의 제자로 顔淵, 閔子騫, 伯牛, 仲弓, 宰我, 子貢, 有, 季路, 子夏 등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 | 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6쪽) 10철은 문하 가운데 뛰어난 열 사람의 제자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도 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0쪽)닫기과 72제자도(弟子圖)145 72弟子(제자)는 孔子(공자)의 제자 중 6藝[예 : 禮(예)·樂(악)·射(사)·御(어)·書(서)·數(수)]에 통한 자를 말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11쪽) 공자의 제자 중 6藝 즉 禮, 樂, 射, 御, 書, 數에 뛰어난 72명의 제자를 지칭한다. 혹은 77명이라고도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쪽 | 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26쪽 | 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20쪽)닫기를 바치니 바로 태학(太學)146 신문왕 2년에 설치한 國學을 지칭한다. 국학은 경덕왕대 일시적으로 大學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國學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6~267쪽)닫기에 두었다.
17년(718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 효정(孝貞)이 물러나자 파진찬(波珍湌) 사공(思恭)147 성덕왕 17년(718)에 시중이 되었다가 동왕 19년(720)에 시중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 성덕왕 27년에 裵賦의 뒤를 이어 상대등이 되었고 동왕 31년 12월에는 장군이 되었다. 《續日本紀》 권18 天平勝寶 4년 6월조에 “전왕 承慶(효성왕)과 大夫 思恭 등은 말과 행동이 게으르며 지켜야할 禮를 잃었다'고 한 점으로 보아, 思恭은 효성왕대에도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일본에 대하여 비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7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나라 서쪽의 주군(州郡)을 돌아보며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노인과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아이, 자식 없는 사내(환과고독, 鱞寡孤獨)를 위문하고는 물품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3월에 지진(地震)이 났다.
여름 6월에 황룡사(皇龍寺)탑에 벼락이 쳤다.
처음 물시계(누각, 漏刻)149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성덕왕 17년(718)에 시간 측정을 맡은 漏刻典을 설치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漏刻’은 ‘漏刻典’을 의미한다. 漏刻典에는 박사 6명과 史 1명이 있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7쪽)닫기를 만들었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공물을 바쳤더니, 수중낭장(守中郞將)에 제수하고 돌려보냈다.
겨울 10월에 유성(流星)이 묘성(昴星)에서 규성(奎星)151 별 이름으로 문운(文運)을 맡은 별이라 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7쪽) 昴는 28수(宿)의 하나로 서쪽에 있고, 奎는 16개의 별로 구성된 별자리로 文運을 맡았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7쪽)닫기으로 들어갔고, 많은 소성(小星)들이 이를 따랐다.
천구(天狗)가 간방(艮方)에 떨어졌다.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 관할 안에 여러 성을 쌓았다.
18년(719년) 봄 정월에 당(唐)에 사신을 보내 정월을 축하하였다.
가을 9월에 금마군(金馬郡) 미륵사(彌勒寺)153 현재의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 있던 절로 백제 武王이 창건하였다. 《삼국유사》 권2 紀異篇 무왕조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가 龍華山 아래의 큰 못가를 지나다가 彌勒三尊이 나타난 것에 인연하여 못을 메우고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절은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11호인 彌勒寺址石塔과 幢竿支柱 등이 廢寺址에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68쪽)닫기에 벼락이 쳤다.
19년(720년) 봄 정월에 지진(地震)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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