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18년~21년
좌이방부(左理方府)203 신라의 형률(刑律) 사무를 맡아본 관청으로 원래 진덕여왕 5년(651)에 이방부로 설치되었다. 그 뒤 문무왕 7년(667)에 이방부를 좌이방부(左理方府)로 하고 따로 우이방부(右理方府)를 설치하였다.닫기와 우이방부(右理方府)204 신라 때 형률(刑律) 사무를 맡아본 관청으로 문무왕 7년(667)에 설치되었다. 령(令) 2명, 경(경(卿)) 2명, 좌(佐) 2명, 대사(大舍) 2명, 사(史) 10명을 두었다.닫기에 경(卿)을 각각 1인씩을 더 두었다.
북원소경(北原小京)205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인 5소경(五小京) 중 하나로 문무왕 18년(678)에 설치되었다. 그 뒤 경덕왕 16년(757)에 북원경(北原京)으로 바뀌었다.닫기을 설치하고 대아찬(大阿湌) 206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오기(吳起)로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大阿湌) 20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춘장(春長)을 중시(中侍)208 신라의 관직으로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집사부의 장관으로 설치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이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에 해당하는 자들만 맡을 수 있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닫기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아찬(阿湌) 20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천훈(天訓)을 무진주(武珍州)210 신라 9주의 하나로 경덕왕 때 무주(武州)로 고쳐 불렸다.닫기 도독(都督)211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인 주(州)를 다스렸던 장관으로 군주(軍主)·총관(摠管)을 바꾸어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하에는 문무왕 1년(661)에 총관(摠官)으로 불렀던 것을 원성왕 1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삼았다.
가을 8월에 태백(太白)이 달의 자리에 들어갔다.
각간(角干) 21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관등으로 이벌찬(伊伐飡)·이벌간(伊伐干)·우벌찬(于伐飡)·각찬(角粲) 등으로 불린다.닫기천존(天存)220 신라의 장군이었던 김천존(金天存, ?~679)를 가리킨다. 진덕여왕 3년(649)에 김유신(金庾信)과 함께 백제 도살성(道薩城)을 공격하였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김유신을 도와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으며, 문무왕 1년(661)에 귀당총관(貴幢摠管)이 되었다. 그뒤 백제 부흥군 제거에 힘쓰다가 문무왕 4년(664)에 이찬(伊飡)으로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의 유인원(劉仁願), 백제의 왕자 부여륭(扶餘隆) 등과 웅진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문무왕 8년(668)에는 각간(角干), 대당총관(大幢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문무왕 19년(679)에 중시(中侍)가 되었다.닫기이 죽었다.
동궁(東宮)221 태자를 일컫는 말로 태자가 머무는 곳이 왕궁의 동쪽에 있기에 동궁으로 불린다.닫기을 짓고 비로소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222 경북 경주시 배반동(排盤洞)에 있었던 신라의 절로 문무왕 19년(679)에 창건되었다. 원래 이곳은 문무왕 15년(675)에 명랑(明郞)선덕여왕사적 제8호닫기가 완성되었다.
남산성(南山城)223 경주 남산(南山)에 있었던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22호닫기을 늘려 쌓았다.
20년 봄 2월에 이찬(伊湌) 22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김군관(金軍官)225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681이다. 문무왕 1년(661)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고, 문무왕 4년에는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내면서 고구려 공격의 공을 세웠으며, 문무왕 8년(668)에는 도유(都儒), 용장(龍長)과 함께 한성주행군총관(漢城州行軍摠管)으로 평양성 함락에 공을 세워 이찬(伊飡)이 되었다. 문무왕 20년(780)에 상대등(上大等)이 되어 병부령(兵部令)을 겸직하였다가 하였고, 신문왕 1년(681)에 김흠돌(金欽突)의 모반 사건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결 명령을 받고 죽었다.닫기에게 벼슬을 내려 상대등(上大等)226 신라 17관등을 초월한 최고의 관직으로 법흥왕 18년(531)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국사(國事)를 총괄하게 하였다. 화백회의(和白會議)을 주관하는 귀족 세력의 대변자이기도 하였다.닫기으로 삼았다.
여름 5월에 고구려의 왕이 대장군(大將軍) 연무(延武)233 고구려의 장군인 고연무(高延武)를 말하는 데,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문무왕 10년(670)에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와 함께 압록강 이북에 설치된 당나라의 도독부(都督府)와 말갈족(靺鞨族)을 격파하면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보덕국(報德國)의 대장군(大將軍) 태대형(太大兄)으로 문무왕 20년(680)에 신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무왕의 조카를 보덕국왕 안승(安勝)의 왕비로 맞게 해준 답례의 편지를 전하였다.닫기 등을 시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安勝)은 말씀을 드립니다. 대아찬(大阿湌) 23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김관장(金官長)235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문무왕 20년(680)에 대아찬(大阿飡)으로 안승(安勝)에게 신라 왕의 교지(敎旨)와 교서(敎書)를 전하였으며, 신문왕 7년(687)에는 사벌주(沙伐州) 총관(摠管)이 되었다.닫기이 이르러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표하고 아울러 생질로 제 안주인을 삼으라는 교서(敎書)를 내렸습니다. 이어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서로 마음속에 있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가 딸을 규(嬀)에게 시집보내고236 요(堯)임금이 딸을 순(舜)임금에게 시집보냈다는 이야기를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5쪽).닫기, 왕의 딸을 제(齊)나라에 가게 한 것은237 주(周)나라 왕의 딸이 제후국인 제나라에 시집갔던 이야기를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5쪽).닫기, 본래 신성한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행동과 능력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서 성인의 교화에 몸을 적시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고자 해도 길이 없었습니다. 거듭 대왕의 사랑을 입어 이렇게 인척이 되는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나타내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달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 동안에도 만나기 힘든 일을 하루 아침에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것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선조(先祖) 이하가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직접 알현하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은 맡길 곳이 없어서, 삼가 대장군 태대형(太大兄) 238 고구려 14관등의 하나로 제2위에 해당하였다.닫기연무(延武)를 보내 표문을 올려 아룁니다.”
가야군(加耶郡)239 현재의 경남 김해시 지방이다. 신라 진흥왕 19년(532)에 금관가야가 항복하자 그 곳을 金官郡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이를 加耶郡이라 하였다. 중간에 혹시 금관군을 가야군으로 개칭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분명한 기록이 없으므로 가야군은 금관군의 이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닫기에 금관소경(金官小京)240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인 5소경(五小京) 중 하나로 북원소경에 이어 문무왕 20년(680)에 설치되었다. 경덕왕 때 김해경(金海京)으로 바뀌었다.닫기을 설치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에 하루 종일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사찬(沙湌) 241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무선(武仙)이 정예군사 3천 명을 이끌고서 비열홀(比列忽)242 지금의 함남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인 비열홀주(比列忽州)로, 진흥왕 17년(556)에 처음 설치되었다가 진흥왕 29년(568)에 달홀주(達忽州)로 바뀌었으며, 문무왕 8년(668)에 다시 설치되었다.닫기을 지켰다.
우사록관(右司祿館)243 문무왕 7년(677)에 설치된 좌사록관(左司祿館)과 함께 관리의 녹봉(祿俸)과 녹읍(祿邑)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던 신라의 관청으로, 감(監) 1명, 주서(主書) 2명, 사(史) 4명이 있었다.닫기을 두었다.
여름 5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별똥별(流星)이 삼대성(參大星)을 침범하였다.
6월에 천구(天狗)가 서남쪽에 떨어졌다.
왕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여 승려 의상(義相)244 신라의 고승으로 생몰연도는 625~702이다.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로 성은 김씨(金氏)이며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 경주의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고, 그 뒤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를 찾아 지엄(智儼)에 수학하였다. 화엄의 정수를 담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과 관음신앙(觀音信仰)을 나타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었다. 신라에 돌아와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하였고, 문무왕 16년(676)에는 왕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지었다.닫기에게 물어보니, 의상(義相)이 대답하였다.
“비록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업이 길 것이요,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만들지라도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이에 왕이 공사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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