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 18년~21년


18년 봄 정월에 선부(船府)에 령(令) 1인을 두어 배에 관한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좌이방부(左理方府)와 우이방부(右理方府)에 경(卿)을 각각 1인씩을 더 두었다.

북원소경(北原小京)을 설치하고 대아찬(大阿湌) 오기(吳起)로 지키게 하였다.

3월에 대아찬(大阿湌) 춘장(春長)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아찬(阿湌) 천훈(天訓)을 무진주(武珍州)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5월에 북원(北原)에서 기이한 새를 바쳤는데, 깃의 아래쪽에 무늬가 있고 다리에 털이 있었다.
19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 춘장(春長)이 병으로 그만두자, 서불한(舒弗邯) 천존(天存)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사신을 보내 탐라국(耽羅國)을 경략하였다.
다시 궁궐을 고쳤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여름 4월에 형혹(熒惑)이 우림(羽林)을 지켰다.
6월에 태백(太白)이 달의 자리에 들어가고 별똥별이 삼대(參大)의 별자리를 침범하였다.

가을 8월에 태백(太白)이 달의 자리에 들어갔다.

각간(角干) 천존(天存)이 죽었다.

동궁(東宮)을 짓고 비로소 궁궐 안팎 여러 문의 이름을 정하였다.

사천왕사(四天王寺)가 완성되었다.

남산성(南山城)을 늘려 쌓았다.

20년 봄 2월에 이찬(伊湌) 김군관(金軍官)에게 벼슬을 내려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3월에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채색 비단 1백 단을 보덕왕(報德王) 안승(安勝)에게 내려 주고는 드디어 왕의 여동생의 딸 또는 잡찬(迊湌) 김의관(金義官)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다음과 같은 교서(敎書)를 내렸다.
“사람의 윤리 근본으로는 부부가 먼저이고, 왕의 교화 기틀로는 후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으뜸이다. 왕은 까치집이 공허함을 채웠고 닭울음이 마음에 있으니, 오랫동안 안에서 도와줄 풍속을 비우고 영원히 집안을 일으킨 일을 잃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좋은 때와 좋은 날에 옛 법도를 따라 내 누이의 딸로 짝을 삼게 하니, 왕은 마땅히 마음과 뜻을 모두 돈독히 하여 조상의 제사를 따라 받들고 자손을 능히 무성하게 하여 영원히 반석같이 번창한다면 어찌 성한 일이 아니며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여름 5월에 고구려의 왕이 대장군(大將軍) 연무(延武) 등을 시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였다.

“신(臣) 안승(安勝)은 말씀을 드립니다. 대아찬(大阿湌) 김관장(金官長)이 이르러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표하고 아울러 생질로 제 안주인을 삼으라는 교서(敎書)를 내렸습니다. 이어 4월 15일에 이곳에 이르렀으니, 기쁨과 두려움이 서로 마음속에 있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 지를 모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황제가 딸을 규(嬀)에게 시집보내고, 왕의 딸을 (齊)나라에 가게 한 것은, 본래 신성한 덕을 드러내어 평범한 사람이라도 관계치 않은 것입니다. 신은 본래 용렬한 무리로 행동과 능력이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다행히 좋은 운수를 만나서 성인의 교화에 몸을 적시게 되었고 매번 특별한 은혜를 입었으니, 보답하고자 해도 길이 없었습니다. 거듭 대왕의 사랑을 입어 이렇게 인척이 되는 은총을 내려주시니, 마침내 무성한 꽃이 경사를 나타내고, 정숙하고 화목한 덕을 갖추어, 좋은 달 좋은 때에 저의 집에 시집온다고 하니, 억년(億年) 동안에도 만나기 힘든 일을 하루 아침에 얻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처음에 바라지 못했던 것이고 뜻밖의 기쁨입니다. 어찌 한두 사람의 부형(父兄)만이 실로 그러한 은혜를 받겠습니까? 선조(先祖) 이하가 다 기뻐할 일인 것입니다. 신은 아직 교지를 받지 못하여 직접 알현하지 못하지만, 지극한 기쁨과 즐거움은 맡길 곳이 없어서, 삼가 대장군 태대형(太大兄) 연무(延武)를 보내 표문을 올려 아룁니다.”

가야군(加耶郡)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였다.

21년 봄 정월 초하루에 하루 종일 마치 밤처럼 어두웠다.

사찬(沙湌) 무선(武仙)이 정예군사 3천 명을 이끌고서 비열홀(比列忽)을 지켰다.

우사록관(右司祿館)을 두었다.

여름 5월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별똥별(流星)이 삼대성(參大星)을 침범하였다.

6월에 천구(天狗)가 서남쪽에 떨어졌다.

왕이 왕경에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여 승려 의상(義相)에게 물어보니, 의상(義相)이 대답하였다.

“비록 들판의 띠집에 살아도 바른 도를 행하면 곧 복업이 길 것이요, 진실로 그렇지 않으면 비록 사람을 힘들게 하여 성을 만들지라도 또한 이익되는 바가 없습니다.” 이에 왕이 공사를 그만두었다.

가을 7월 1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문무(文武)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유언으로 동해 입구의 큰 바위 위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세속에 전하기를, 왕이 변해 용이 되었다고 하므로, 그 바위를 가리켜서 대왕석(大王石)이라고 한다. 남긴 조서는 다음과 같다.
“과인은 나라의 운(運)이 어지럽고 전란의 시기를 맞이하여,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토벌하여 능히 영토를 안정시켰고 배반하는 자들을 치고 협조하는 자들을 불러 마침내 멀고 가까운 곳을 평안하게 하였다. 위로는 조상들의 남기신 염려를 위로하였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오랜 원한을 갚았으며, 살아남은 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두루 상을 주었고, 중앙과 지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벼슬에 통하게 하였다. 무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었고 백성을 어질고 오래살게 하였다. 세금을 가볍게 하고 요역을 줄여주니,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들이 풍족하며 민간은 안정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게 되었다. 곳간에는 언덕과 산처럼 쌓였고 감옥에는 풀이 무성하게 되니, 혼과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관리와 백성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말할 만하다. 스스로 여러 어려운 고생을 무릅쓰다가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에 걸렸고, 정치와 교화에 근심하고 힘쓰느라고 다시 심한 병이 되었다. 운명은 가고 이름만 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갑자기 긴 밤으로 돌아가는 것이 어찌 한스러움이 있겠는가? 태자는 일찍이 밝은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태자의 자리에 있어서, 위로는 여러 재상에서부터 아래로는 뭇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죽은 사람을 보내는 도리를 어기지 말고, 살아 있는 임금을 섬기는 예의를 빠뜨리지 말라. 종묘의 주인은 잠시도 비워서는 안되므로, 태자는 곧 관 앞에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 또한 산과 골짜기는 변하여 바뀌고 사람의 세대도 바뀌어 옮겨가니, (吳)나라 왕의 북산(北山) 무덤에서 어찌 금으로 만든 물오리의 고운 빛깔을 볼 수 있을 것이며, (魏)나라 임금의 서릉(西陵) 망루는 단지 동작(銅雀)이라는 이름만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지난날 모든 일을 처리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 무더기의 흙이 되면, 나무꾼과 목동은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판다. 헛되이 재물을 쓰면 서책(書冊)에 꾸짖음만 남길 뿐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의 넋을 구원하는 것이 못된다. 가만히 생각하면 슬프고 애통함이 그치지 않을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것은 즐겨 행할 바가 아니다. 죽고 나서 10일 뒤에 곧 고문(庫門) 바깥의 뜰에서 서국(西國)의 의식에 따라 화장(火葬)을 하라. 상복의 가볍고 무거움은 정해진 규정이 있으니, 장례를 치르는 제도를 힘써 검소하고 간략하게 하라. 변경(邊)의 성(城)·진(鎮)을 지키는 일과 주현(州縣)의 세금 징수는 긴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히 모두 헤아려 폐지하고, 율령격식(律令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곧 다시 고치도록 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널리 알려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며, 주관하는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