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소왕(孝昭王)
효소왕(孝昭王)061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신문왕의 맏아들로 재위 기간은 692년~702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이고 신문왕(神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성이 김씨(金氏)이고 신목왕후(神穆王后)062 신목왕후는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쫓겨난 후 신문왕이 두번째로 맞이한 왕비로, 동왕 3년(683)에 왕비가 되었다.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신목왕후를 金運公의 딸이라 하였는데, 김운공은 곧 金欽運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서는 ‘神睦太后’로 표기하였는데, 孝昭王 9년(700) 6월 1일에 죽었다 하고, 《續日本紀》 권1 文武 4년(700) 11월 壬午條에 薩薩 湌金所毛를 보내어 王母 즉 신목태후의 죽음을 알려왔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로,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 또는 김흠운(金欽雲)의 딸이다. 당(唐) 측천황후(則天皇后)063 측천무후는 당나라가 아니고 주(周)나라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09)닫기가 조제(吊祭)에 사신을 보냈고, 이어서 왕을 신라 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064 후한 獻帝 때 처음 설치한 것으로, 당나라에서는 정2품의 武散官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065 豹韜尉(표도의)는 당나라 禁衛職(금위직)의 하나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5쪽) 《삼국사기》의 ‘豹韜尉’는 ‘豹韜衛’의 오기로 보인다. 豹韜衛는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禁衛軍의 하나로 隋代에 屯衛라 하던 것을 당나라 龍朔 연간에 威衛로 개칭하고 光宅 연간에 豹韜衛라 하였다가 神龍 연간에 다시 威衛라 하였다. 豹韜尉는 左·右豹韜衛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 정3품의 대장군 1명이 부대를 관장하였다. 한편 ‘行’은 관품이 높고 관직이 낮을 경우에 붙이는 말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255쪽)닫기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책봉하였다. 066 《구당서》 권199 신라전 |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 《책부원귀》 권964 외신부 봉책(封冊)條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5 長壽 2년 2월 丙子條 등에 동일한 기사가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5쪽)닫기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고쳤으니 이(理) 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061 신라의 제32대 왕이다. 신문왕의 맏아들로 재위 기간은 692년~702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이 즉위하였다. 이름은 이홍(理洪) 또는 이공(理恭)이고 신문왕(神文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성이 김씨(金氏)이고 신목왕후(神穆王后)062 신목왕후는 김흠돌(金欽突)의 딸이 쫓겨난 후 신문왕이 두번째로 맞이한 왕비로, 동왕 3년(683)에 왕비가 되었다. 《삼국유사》 王曆篇에는 신목왕후를 金運公의 딸이라 하였는데, 김운공은 곧 金欽運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서는 ‘神睦太后’로 표기하였는데, 孝昭王 9년(700) 6월 1일에 죽었다 하고, 《續日本紀》 권1 文武 4년(700) 11월 壬午條에 薩薩 湌金所毛를 보내어 王母 즉 신목태후의 죽음을 알려왔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로,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 또는 김흠운(金欽雲)의 딸이다. 당(唐) 측천황후(則天皇后)063 측천무후는 당나라가 아니고 주(周)나라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09)닫기가 조제(吊祭)에 사신을 보냈고, 이어서 왕을 신라 왕(新羅王)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064 후한 獻帝 때 처음 설치한 것으로, 당나라에서는 정2품의 武散官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쪽)닫기 행좌표도위대장군(行左豹韜尉大將軍)065 豹韜尉(표도의)는 당나라 禁衛職(금위직)의 하나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5쪽) 《삼국사기》의 ‘豹韜尉’는 ‘豹韜衛’의 오기로 보인다. 豹韜衛는 왕과 궁궐을 호위하던 禁衛軍의 하나로 隋代에 屯衛라 하던 것을 당나라 龍朔 연간에 威衛로 개칭하고 光宅 연간에 豹韜衛라 하였다가 神龍 연간에 다시 威衛라 하였다. 豹韜尉는 左·右豹韜衛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각각 정3품의 대장군 1명이 부대를 관장하였다. 한편 ‘行’은 관품이 높고 관직이 낮을 경우에 붙이는 말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4~255쪽)닫기 계림주도독(鷄林州都督)에 책봉하였다. 066 《구당서》 권199 신라전 | 《당회요(唐會要)》 권95 신라전 | 《책부원귀》 권964 외신부 봉책(封冊)條 |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5 長壽 2년 2월 丙子條 등에 동일한 기사가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5쪽)닫기좌우이방부(左右理方府)를 좌우의방부(左右議方府)로 고쳤으니 이(理) 자가 왕의 이름에 저촉되었기 때문이다.
원년(692년) 8월 대아찬(大阿湌) 원선(元宣)068 효소왕 원년(692)에 中侍가 되었다가, 동왕 4년에 나이가 많아 中侍職에서 물러났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5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고승(高僧) 도증(道證)069 圓測法師의 문인(門人)이다. 소저(所著)에 《성유성론강요(成唯誠論綱要)》·《성유식론요집(成唯識論要集》·《변중변론소(辨中邊論疏)》·《(인명리문론소(因明理門論疏)》·《인명리문론술기(因明理門論述記)》·《반약리취분경소(般若理趣分經疏)》 등이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5쪽) 일찍이 당에 들어가 圓測 아래에서 唯識學을 공부하고 효소왕 원년(692)에 돌아와 圓測系統의 유식학을 신라에 소개하였는데, 太賢이 그것을 이어받아 신라에서 유식학을 체계화하였다. 道證의 저술로는 《般若理趣分經疏》 1권, 《大般若經籍目》 2권, 《金剛般若經疏》 1권, 《西方極樂要讚》 1권, 《成唯識論要集》 14권, 《成唯識論綱要》 13권, 《攝大乘論世親論疏》 16(혹은 8)권, 《辯中邊論疏》 3권, 《因明入正理論疏》 2권, 《大因明論抄》 2권, 《大因明論疏》 2권, 《聖敎略述章》 1권, 《天台山智者大師別集》 1권 등이 있으나 현재 전하는 것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5쪽)닫기이 당(唐)에서 돌아왔는데, 천문도(天文圖)070 천체 곧 日月星辰의 운행 특히 星座에 관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서 설명해 놓은 도면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5~256쪽)닫기를 바쳤다.
3년(694년) 봄 정월에 왕이 친히 신궁(神宮)에서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문영(文穎)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김인문(金仁問)이 당(唐)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6세였다.
겨울에 송악성(松岳城)과 우잠성(牛岑城)을 쌓았다.
4년(695년) 자월(子月)072 달의 간지(干支)가 자(子)로 된 달로, 음력 동짓달을 이른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10쪽) 음력 11월로, 북두칠성의 손잡이 부분이 초저녁에 子方 즉 북쪽을 가리키는 달이다. 그런데 당나라에서는 689년 11월에 이 달을 정월로 삼았다고 한다(《구당서》 권6, 載初 원년(元年) 정월조). 신라에서 효소왕 4년에 子月을 정월로 삼았던 것은 당에서의 正朔 변경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6쪽) 음력의 열 두달에는 모두 12지(支)의 이름을 붙였는데 자(子)는 11월, 축(丑)은 12월, 인(寅)은 1월이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18쪽) 자월(子月)은 음력 11월이니, 12지(支)로 달의 이름을 삼은 것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5쪽)닫기을 정월(正月)로 세웠다.
개원(愷元)을 상대등(上大等)에 제수하였다.
중시(中侍) 원선(元宣)이 나이가 들어 물러났다.
서시(西市)와 남시(南市)073 西市典(서시전), 南市典(남시전)의 소속으로, 智證王(지증왕) 때에 둔 東市(동시)와 정립하여 신라 京都(경도)의 3大市(대시)를 이루었고, 각 市典(시전)에는 監(감:2인)·大舍(대사:2인)·書生(서생:2인)·史(사:4인) 등의 관원이 있었다(《삼국사기》 職官志中(직관지중) 참조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6쪽) 지증왕대에 설치된 東市와 함께 신라 왕경의 3大市를 이루었다. 西市와 南市에는 監, 大舍, 書生, 史 등의 관원을 두어 운영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6쪽) 지증왕 때에 세운 동시(東市)와 같은 저자로 시전(市典)이라는 직제가 있어 관리하였다.(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18쪽)닫기를 설치하였다.
5년(696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당원(幢元)074 효소왕 5년(696)에 中侍가 되었다가 동왕 7년 2월에 나이가 많아 관직에서 물러났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6쪽)닫기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여름 4월에 나라 서쪽 지역에 가뭄이 들었다.
6년(697년) 가을 7월에 완산주(完山州)에서 가화(嘉禾)075 상스러운 벼 이삭을 의미한다. 嘉禾의 출현은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尙書》 微子之命에 의하면 周 成王 때 唐叔이라는 사람이 밭고랑을 달리 하면서 줄기가 같은 벼를 얻어 周公에게 바치자 周公은 천자의 명을 받아서 嘉禾篇을 지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6쪽)닫기를 바쳤는데, 뿌리와 줄기는 다른데 이삭이 같이 맺혔다.
9월에 임해전(臨海殿)077 雁鴨池 서쪽에 있던 殿閣으로, 문무왕 14년 안압지 축조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의 望海亭과 같이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역대 왕들이 군신들과 풍류를 즐기던 연회 장소이다(李基白, 《望海亭과 臨海殿》, 《考古美術》 129·130 합집, 1976 | 《新羅思想史硏究》, 일조각, 1986, 287~292쪽).(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p.256)닫기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7년(698) 봄 정월에 이찬(伊湌) 체원(體元)078 이곳에서만 보이는 인물인데, 글자 형태로 보아 문무왕 11년에 중시에 임명된 禮元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7쪽)닫기을 우두주(牛頭州) 총관(摠管)으로 삼았다.
2월에 도읍에 지진(地震)이 나고 태풍이 불어 나무가 부러졌다.
중시(中侍) 당원(幢元)이 늙어서 자리에서 물러나자 대아찬(大阿湌) 순원(順元)을 중시(中侍)로 삼았다.년(698)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9년 5월에 이찬 慶永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파면당하였다. 한편 성덕왕 5년 5월에 만들어진 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 의하면, 金順元은 황복사 3층석탑을 건립할 때 蘇判으로서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늦어도 성덕왕 초기에 복권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리고 그의 관등이 이찬이었던 동왕 19년 3월에 그의 딸이 성덕왕의 후비인 炤德王后가 되었으며, 효성왕 3년 3월에는 다시 그의 딸 惠明이 효성왕의 비가 됨으로써 왕실과 이중적인 인척 관계를 맺어 신라 中代 주요 정치 세력의 하나가 되었다(김수태, 「신라 성덕왕·효서왕대 금순원의 정치적 활동」, 《동아연구》 3, 1983 | 浜田耕策, 「新羅の聖德大王神鐘と中代の王室」, 《沫學》 3, 1980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7쪽)닫기
3월에 일본국(日本國) 사신이 와서 왕이 숭례전(崇禮殿)에서 접견하였다. 권1 文武王(문무왕) 2년(신라 효소왕 7년)에는 이러한 記事(기사)가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前年(전년)에 新羅使(신라사) 一吉飡(일길찬) 金弼德(김필덕), 副使(부사) 奈麻(내마) 金任想(김임상) 등이 일본에 왔다는 것이 실려 있다. 아마 日使(일사)는 이에 대한 回禮(회례)로 來朝(내조)한 것인 듯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6쪽). 《續日本紀》 권1 文武 원년 및 《續日本紀》 권1 文武 2년조에 의하면, 697년(효소왕 6) 10월에 일길찬 金弼德과 나마 金任想 등이 일본에 왔다가 다음해 2월에 일본을 떠나 신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일본 사신은 金弼德 일행을 따라왔던 일본인이었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7쪽)닫기
가을 7월에 도읍에 홍수가 났다.
8년(699년) 봄 2월에 흰 기운이 하늘에 가득하고 동쪽에 살별(星孛)이 나타났다.
당(唐)에 사신을 보내 조회에 참석하고 방물(方物)을 바쳤다.
9월에 동해에서 수전(水戰)082 海底地震(해저지진), 또는 海底噴火(해저분화)로 인하여 생기는 地震津浪(지진진랑)인 듯하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6쪽)닫기이 벌어졌는데 소리가 도읍에까지 들렸다. 무기고 안의 북과 피리가 저절로 울었다.
신촌(新村) 사람 미힐(美肹)이 황금 한 덩어리를 주웠는데 무게가 백 푼(분, 分)이나 되었다. 왕에게 바치자, 남변제일(南邊第一)의 지위083 《삼국사기》 권40 잡지 직관(下) 미상관직조에 수록된 것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경덕왕 15년에는 여우를 바친 大永郞에게 남변제일을 수여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7쪽)닫기를 주고 조(租) 백 석(石)을 하사하였다.
9년(700년)에 다시 인월(寅月)084 달의 간지(干支)가 인(寅)이 되는 달로 음력 정월을 말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p.311) 중국 夏나라의 정월이다. 《구당서》 권6 則天武后 聖曆 3년(700)조에 의하면, 당에서는 이 해 10월에 正朔을 복구하여 음력 1월을 正月로 삼았다고 한다. 신라에서 효소왕 9년(700)에 寅月을 正月로 삼은 것은 唐의 그것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7~258쪽)닫기을 정월(正月)로 세웠다.
여름 5월에 이찬(伊湌) 경영(慶永) 또는 경현(慶玄)이 반란을 도모하여 목베어 죽였다.
중시(中侍) 순원(順元)이 반란에 연좌되어 파면(罷免)되었다.
6월에 목성(세성, 歲星)085 태양계의 다섯번째 행성인 木星(Jupiter)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8쪽)닫기이 달에 들어갔다.
10년(701년) 봄 2월에 혜성(彗星)이 달에 들어갔다.
11년(702년)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087 皇福寺石塔金銅舍利函銘에 의하면 효소왕은 702년 7월 27일에 죽었다고 하여 《삼국사기》와 일치하나, 《續日本紀》 권3 大寶 3년(703) 윤 4월 辛酉條에서는 702년 가을부터 병이 들어 앓다가 703년 정월에 죽었다고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8쪽)닫기 시호는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서 장사지냈다.088 《新增東國輿地勝覽》 권21 慶州府 고적조에 의하면, 효소왕릉은 府의 동쪽 芬南里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의 경주시 조양동 산 8번지에 있는 원형봉토분을 효소왕릉으로 추정하여 사적 제18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望德寺址 동쪽에 있는 傳 神文王陵을 효소왕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강인구 외, 《신라오릉》,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113~114쪽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8쪽)닫기《구당서(舊唐書)》에는 “장안(長安) 2년(702)에 이홍(理洪)이 죽었다”고 하고089 《구당서》는 중국의 五代 後晉의 開運 2년(945)에 劉煦가 왕의 명을 받아 편찬한 당나라 290년간의 역사서이다. 원래의 이름은 《唐書》 였으나 宋代 歐陽修 등이 새로 《唐書》를 편찬하게 되자 이와 구분하기 위하여 《구당서》라 칭하였다. 이 책은 本紀 20권, 志 30권, 列傳 150권 총20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서 인용한 기사는 《구당서》 권199 신라전의 “理洪以長安二年卒”을 지칭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8쪽)닫기, 여러 고기(古記)에도 “임인(壬寅)년(702) 7월 27일에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대족(大足) 3년(703)에 죽었다”고 하였으니090 長安(장안) 3년의 잘못일 것이다. 大足(대족) 원년에 長安(장안)이라 改號(개호)하였으므로 《通鑑(통감)》에도 長安(장안) 3년으로 되어 있고 大足(대족) 3년으로는 되어 있지 않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7쪽) 본문에서 인용한 기사는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7 長安 3년(703) 4월조의 “신라왕(新羅王)金理洪卒 遣使立其弟崇基爲王”이다. 이 기사에서 알 수 있듯이, 비록 연대는 같지만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삼국사기》에서와 같이 大足 3년이라 하지 않고 長安 3년이라 하였다. 大足 年號는 701년 정월부터 같은 해 10월까지 10개월 동안만 사용되었으므로, 엄격히 말하면 ‘大足 3년’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편 《삼국사기》의 찬자는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사를 잘못이라 하였으나,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말하는 長安 3년(703)은 효소왕이 죽은 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 崇基 즉 성덕왕을 책봉한 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처럼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사가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9쪽). 《자치통감》 207 당기 23 측천황후 하 장안 3년(703) 윤 5월조에 “신라 왕 김이홍이 죽었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의 아우 숭기(崇基)를 왕으로 삼았다”라고 하여, 《삼국사기》와 《구당서》 신라전의 ‘장안 2년’과는 1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는 《자치통감》을 인용하면서 ‘대족 3년’이라고 했는데 ‘대족’은 701년 1월부터 사용한 측천무후의 연호로서, 같은 해 10월 다시 ‘장안’으로 고쳤으므로 ‘대족 3년’은 곧 ‘장안 3년’이 된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6쪽)닫기,《자치통감(資治通鑑)》이 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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