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

 

손위 소현세자 부부 죽음에 경계… ‘암탉론’을 최선의 생존전략으로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정비(正妃)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 우의정 장유(張維)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의 딸이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경계를 신중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효종(재위 1649~1659)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행장에 있는 말이다. ‘항상 말씀했다’는 첫 구절이 의미심장하다. 조선의 다른 왕비들 행장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말이 왜 유독 이렇게까지 강조되고 있는 것일까? 또 ‘경계를 신중히 했다’고 하는데, 경계를 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인선왕후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한다. 즉 스스로 새벽에 우는 ‘암탉’은 되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인선왕후(仁宣王后)에게 ‘암탉’이 울면 어떻게 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사연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1631년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봉림대군(鳳林大君)의 부인으로 왕실에 들어왔다. 당시 봉림대군(鳳林大君)은 15살이었고 인선왕후 장씨는 14살이었다. 봉림대군(鳳林大君)에게는 7살 많은 소현세자(昭顯世子) 형이 있었다. 따라서 장씨는 왕실의 둘째 며느리였다. 장씨는 혼인 후 대군 부인으로 궁궐에서 얼마간 생활했으나 4년쯤 지나서 궁궐을 나왔다. 이른바 출합(出閤)을 한 것이다.

 

왕실에서 세자는 궁궐에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외의 왕자들은 혼인을 한 후에는 궁궐을 나가 살아야 한다. 그래서 출합이라고 하는 살림나기를 한다. 이는 첫째 이하 모든 왕자들의 운명이다. 왕실에는 두 명의 왕위 계승자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궁궐에서 나와 살던 장씨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은 훗날 첫째가 아닌 둘째였음에도 불구하고 왕과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당연히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소현세자빈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인 것이다. 

1637년 3월부터 1645년 2월까지, 햇수로 9년간 봉림대군 부부는 소현세자 부부와 함께 심양생활을 했다. 심양에서 이들 형제 부부는 비교적 원만하게 지낸 것으로 보인다. ‘두 궁(宮) 간에 틈이 난 말이 없었다’는 나중의 평가가 그렇다. 

 

그런데 그렇게 잘 지내고 서울로 돌아온 후 이들의 운명은 갈렸다. 귀국 두 달 후 소현세자의 죽음, 그리고 1년 후 소현세자빈 강씨의 사사됨. 강빈의 죽음은 이미 말했듯이 “심양에 있을 때에 비밀히 왕후의 자리를 바꿀 것을 도모하여, 붉은 비단으로 왕후의 옷을 만들고 내전이라는 칭호를 일컬었다”는 것이 중요 이유가 됐다. 

 

인선왕후는 강빈의 죽음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강빈처럼 행동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고 또 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다음 차례 세자빈이 아닌가? ‘암탉’을 강조한 인선왕후의 캐릭터는 이렇게 형성된 것이 아닐까 한다. 

‘암탉 운운’은 요즘 여성들에게는 그다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인순왕후의 ‘암탉론’은 당시의 정치적인 역학관계 속에서 그녀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는지 모른다.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출처; 이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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