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肹夫得) 달달박박(怛怛朴朴)


백월산 양성성도기(白月山聖成道記)에는 “백월산(白月山)은 신라(新羅) 구사군(仇史郡)의 북쪽에 있다. 옛 굴자군(屈自郡)으로 지금의 의안군(義安郡)이다. 봉우리는 기이하고 빼어났는데, 그 산줄기는 수백 리에 뻗쳐 있어 참으로 큰 진산(山)이다”고 하였다.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해서 말한다. “옛날 (唐)나라의 황제(皇帝)가 일찍이 못을 하나 팠는데, 달마다 보름 전에 달빛이 밝고, 가운데에 산이 하나 있는데, 사자(師子)처럼 생긴 바위가 꽃 사이로 은은히 비쳐서 그림자가 못 가운데 나타났다. 황제는 화공(畵工)에게 명하여 그 형상을 그리게 하고, 사신을 보내 천하를 돌면서 찾게 했는데, 해동(海東)에 이르러 산에 큰 사자암(師子嵓)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산의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삼산(三山)이 있었는데, 그 이름이 화산(花山)으로서 그림과 서로 비슷하였다. 그 산의 몸체는 하나지만 봉우리가 셋이어서 삼산(三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진위(真僞)를 알 수 없었으므로 신발 한 짝을 사자암(獅子嵓) 꼭대기에 걸어두고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신발의 그림자가 역시 연못에 나타났다. 황제가 이것을 이상하게 여겨 이름을 백월산(白月山)이라고 지어 주었더니 보름 전에는 흰 달(白月)의 그림자가 못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그 뒤에는 연못 가운데에 그림자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산의 동남쪽 3천 보쯤 되는 곳에 선천촌(仙川村)이 있고, 마을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노힐부득(努肹夫得)인데, 득(得)은 등(等)이라고도 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월장(月藏)이고,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다. 또 한 사람은 달달박박(怛怛朴朴)인데, 아버지의 이름은 수범(修梵)이고, 어머니의 이름은 범마(梵摩)였다. 향전(鄕傳)에서 치산촌(雉山村)이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두 사람의 이름은 방언(方言)인데, 두 집에서 각각 다 두 사람의 마음 수행이 오르고 또 올라(騰騰) 지조를 지켰다(苦節)는 두 가지 뜻으로서 이름 지은 것이다.

모두 풍채와 골격이 범상치 않았으며 세속을 벗어날 고원한 생각이 있어서 서로 더불어 좋은 친구가 되었다. 나이가 모두 스무 살이 되자 마을의 동북쪽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 가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서남쪽의 치산촌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에 옛 절이 있어 정신을 수련할 만하다는 말을 듣고 함께 가서 대불전(大佛田)·소불전(小佛田)의 두 마을에 각각 살았다.

부득(夫得)은 회진암(懷庵)에 살았는데, 혹 양사(壤寺)라고 했고, 지금의 회진동(懷洞)에 있는 옛 절터가 이것이다. 박박(朴朴)은 유리광사(瑠璃光寺)에 살았다. 지금의 이산(梨山) 위에 있는 절터가 이것이다. 모두 처자(妻子)를 데리고 와서 살면서 산업(産業)을 경영하고 서로 왕래하면서 정신을 수양하고 마음을 편안히 하면서 방외(方外)의 생각을 잠시도 버리지 않았다. 육신과 세상의 무상(無常)함을 관조하고 서로 말하기를, “기름진 밭과 풍년든 해는 참으로 좋지만, 의식(衣食)이 마음에 따라 생겨서 저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婦女)와 집이 진정으로 좋지만, 연지화장(蓮池花藏)에서 여러 많은 성인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鸚鵡)나 공작새(孔雀)와 함께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불법을 배우며 마땅히 성불(成佛)해야 하고, 참된 것을 닦으면 반드시 참된 것을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니, 마땅히 얽힌 인연들로부터 벗어나 무상(無上)의 도(道)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風塵)에 골몰하여 세속의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이들은 인간 세상을 떠나서 장차 깊은 골짜기에 숨으려고 하였다. 밤 꿈에 백호(白毫)의 빛이 서쪽으로부터 비치면서 빛 가운데서 금색의 팔이 내려와 두 사람의 이마를 만져 주었다. 깨어나 꿈이야기를 하였더니 두 사람이 꼭 같았으므로 모두 오랫동안 감탄하다가 드디어 백월산(白月山) 무등곡(無等谷) 지금의 남수동(南藪洞)으로 들어갔다.
박박스님(朴朴師)은 북쪽 고개의 사자암(師子嵓)을 차지하여 판잣집 8자 방을 짓고 살았으므로 판방(板房)이라고 하고, 부득스님(夫得師)은 동쪽 고개의 첩첩한 바위(磊石) 아래 물이 있는 곳에 역시 방장(方丈)을 만들고 살았으므로 뇌방(磊房)이라고 하여 각자의 암자에 살았다. 향전(郷傳)에는 부득(夫得)은 산 북쪽의 유리동(瑠璃洞)에 살았는데 지금의 판방(板房)이고, 박박(朴朴)은 산 남쪽의 법정동(法精洞) 뇌방(磊房)에 살았다고 했으니, 이 기록과는 상반된다. 지금 살펴보면 향전(郷傳)이 잘못되었다. 부득(夫得)은 부지런히 미륵불(勒)을 구했고 박박(朴朴)은 아미타불(弥陁)을 예배하고 염송(念誦)하였다.
3년이 채 못된 경룡(景龍) 3년 기유(己酉, 709) 4월 8일, 즉 성덕왕(聖德王) 즉위 8년이었다. 날이 저물 무렵에 나이 스무 살쯤 된 아름다운 자태를 한 낭자(娘子)가 난초의 향기와 사향(蘭麝)을 풍기면서 뜻 밖에 북암(北庵) 향전(郷傳)에는 남암(南庵)에 와서 묵기를 청하면서 글을 지어 바쳤다.
가는 길 해지니 산은 첩첩 저문데(行逢日落千山暮)
길 막히고 인가 멀어 이웃도 없네(路隔城遥絶四隣)
오늘은 이 암자에 묵어 가려 하오니(今日欲投庵下宿)
자비로운 화상이여 노하지 마소서(慈悲和尚莫生嗔).
박박(朴朴)이 말하기를, “난야(蘭若)는 청정을 지키는 것을 의무로 삼으니, 그대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오. 이곳에 지체하지 마시오”라고 하고는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기(記)에서 말하기를, “나는 온갖 생각이 재처럼 식었으니 혈낭(血囊)으로 시험하지 말라”고 하였다. 낭자(娘子)가 남암(南庵) 향전(郷傳)에는 북암(北庵)으로 돌아가서 다시 앞서와 같이 청하자, 부득(夫得)이 말하기를, “그대는 어디로부터 이 밤에 왔소?”라고 하니, 낭자(娘子)가 대답하기를, “담연(湛然)하기가 태허(太虛)와 같은데, 어찌 오고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현사(賢士)께서 바라는 뜻이 깊고 덕행(徳行)이 높고 굳다는 것을 듣고 장차 도와서 보리(菩提)를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고 하였다. 이에 게(偈) 한 수를 주었다.
해 저문 첩첩 한길에(日暮千山路)
가도 가도 인가는 없네(行行絶回隣)
소나무와 대나무 그늘은 더욱 깊고(竹松隂轉邃)
골짜기 시냇물 소리 더욱 새로워라(溪洞響猶新)
자고 가기를 청함은 길 잃은 탓 아니고(乞宿非迷路)
높으신 스님을 인도하려 함인 것(尊師欲指津)
원컨대 나의 청 들어만 주시고(願惟從我請)
길손이 누구냐고 묻지 마소서(且莫問何人)
부득스님(夫得師)이 게(偈)를 듣고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부녀자가 더럽힐 곳이 아니오. 그러나 중생(衆生)을 수순(隨順)함도 역시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인데, 하물며 궁벽한 산골에 밤이 어두우니 어찌 홀대할 수야 있겠소?”라고 하고, 이에 그를 맞아 읍(揖)하고 암자 안에 있도록 하였다.
밤이 되자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어 희미한 등불 아래에서 염송에만 전념하였다. 밤이 이슥하여 낭자(娘子)가 불러 말하기를, “제가 불행히도 마침 해산기가 있으니 화상(和尚)께서는 짚자리를 좀 깔아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득(夫得)은 불쌍히 여겨 거절하지 못하고 촛불을 은은히 밝히니 낭자(娘子)는 벌써 해산하고 또 다시 목욕할 것을 청하였다. 노힐(弩肹)마음에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교차하였다. 그러나 불쌍한 생각이 더욱 더해서 또 통을 준비하여 속에 낭자(娘子)를 앉히고 물을 데워 목욕을 시켰다. 조금 있다가 통 속의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서고 물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노힐(弩肹)이 깜짝 놀라자, 낭자(娘子)가 말하기를, “우리 스님께서도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라고 하였다. 노힐(弩肹)이 마지못해 그 말대로 좇았더니, 홀연히 정신이 상쾌해지는 것을 깨닫고 살갗이 금빛으로 변하였다. 그 옆을 보니 문득 하나의 연화대(蓮臺)가 생겼다. 낭자(娘子)는 그에게 앉기를 권하고 말하기를, “나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인데 여기와서 대사(大師)가 대보리(大菩提)를 성취하도록 도운 것입니다”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박박(朴朴)노힐(弩肹)이 오늘밤에 틀림없이(戒)를 더렵혔을 것이니, 그를 비웃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르러 보니 노힐(弩肹)은 연화대(蓮䑓)에 앉아 미륵존상(勒尊像)이 되어 광명(光明)을 발하고 몸은 금빛으로 단장되어 있어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려 예를 드리면서 말하기를,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하니, 노힐(弩肹)이 그 연유를 자세히 말하였다. 박박(朴朴)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업장(障)이 무거워서 다행히 대성(大聖)을 만나고도 도리어 만나지 못한 것이 되었습니다. 대덕(大徳)은 지극히 인자하여 나보다 먼저 뜻을 이루었으니, 원컨대 옛날의 약속을 잊지 마시고 일을 모름지기 함께 했으면 합니다”고 하였다. 노힐(弩肹)이 말하기를, “통에 남은 물이 있으니 목욕할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박박(朴朴)이 또 목욕했더니 역시 앞서처럼 무량수(無量壽)를 이루어 두 존상(二尊相)이 엄연(儼然)이 상대하였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면서 말하기를, “드물고 드문 일이다”고 하니, 두 성인을 위하여 법요(法要)를 설해주고 온 몸으로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천보(天寶) 14년 을미(乙未, 755)에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즉위하여 이 일을 듣고 정유년(丁酉歲, 757년)에 사자를 보내 대가람(大伽藍)을 창건하고 백월산(白月山) 남사(南寺)라고 하였다. 고기(古記)에는 천감(天監) 24년 을미(乙未)에 법흥왕(法興)이 즉위했다고 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그 앞뒤가 뒤바뀐 것이 심할 수 있을까?
광덕(廣德) 2년 갑진(甲辰, 764) 7월 15일에 절이 완성되었다. 고기(古記)에는 대력(大曆) 원년이라고 했는데, 또한 잘못이다. 다시 미륵존상(弥勒尊像)을 조성하여 금당(金堂)에 봉안하고 편액을 현신성도(現身成道) 미륵지전(勒之殿)이라고 하였다. 또 아미타불상(弥陁像)을 조성하여 강당(講堂)봉안했는데, 남은 물이 모자라 두루 바르지 못했기 때문에 아미타상(弥陁像)에는 역시 얼룩진 흔적이 있다. 편액은 현신성도(現身成道)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 하였다.
논의하여 말한다. 낭자()는 부녀(婦女)의 몸으로 감응하여 섭화(攝化)한 것이라고 하였다. ≪화엄경(華嚴經)≫에 마야부인(摩耶夫人)은 선지식(善知識)으로 11지(十一地)에 살면서 부처를 낳음이 환해탈문(幻解脫門)과 같다고 했으니, 이제 낭자()가 순산한 그 미묘한 뜻도 여기에 있다. 그가 준 글을 보면 애절하고 완곡하여 사랑스러우며 완연히 천선(天仙)의 의취가 있다. 아! 낭자()가 만일 중생(衆生)을 수순(隨順)함과 다라니(陁羅尼)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면 능히 이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 그 끝 구절은 마땅히 ‘맑은 바람이 한 자리함을 꾸짖지 마소서’라고 했어야 할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대개 유속(流俗)의 말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讚)하여 말한다.
푸른 빛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滴翠嵓前剥啄聲)
어느 길손 저문 날에 구름사립 두드릴까(何人日暮扣雲扃)
남암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갈 것이지(南庵且近冝尋去)
나의 뜰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소서(莫踏蒼苔汚我庭)
이상은 북암(北庵) 찬(讚)한 글이다.
골짜기 어두우니 어디로 가리(谷暗何歸已暝煙)
남창 아래 저 자리에 머물다 가오(南䆫有蕈且流連)
깊은 밤 백팔염주 가만가만 굴리노니(夜闌百八深深轉)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들까 두려워라(只恐成喧惱客眠)
이상은 남암(南庵)을 찬(讚)한 글이다.
십 리 소나무 그늘 오솔길 더듬어서(十里松隂一徑迷)
밤 절간 방문하여 스님을 시험하네(訪僧來試夜招)
세 차례 목욕 끝나 날 새려 하는데(三槽浴罷天将曉)
두 아이 낳아 놓고 서쪽으로 갔다네(生下雙児擲向西)
이상은 성랑(聖娘)을 찬(讚)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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