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선화(弥勒仙花) 미시랑(未尸郎) 진자사(真慈師)
제24대 진흥왕(真興王)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이름은 삼맥종(彡麥宗)인데, 또는 심맥종(深麥宗)이라고도 한다. 양(梁)나라의 대동(大同) 6년 경신(庚申, 540)에 즉위(卽位)하였다. 백부(伯父) 법흥왕(法興王)의 뜻을 흠모하여 일념으로 불교를 받들어 널리 불사(佛寺)를 일으키고 사람들을 제도하여 승려(僧尼)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천성(天性)이 풍미(風味)하고 신선(神仙)을 매우 숭상하여 민가의 낭자(娘子) 중에서 아름답고 예쁜 자를 택하여 받들어 원화(原花)로 삼았다. 이것은 무리를 모아서 인물을 뽑고 그들에게 효도와 우애, 그리고 충성과 신의를 가르치려함이었으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대요(大要)이기도 하였다. 이에 남모랑(南毛娘)과 교정랑(峧貞娘)의 두 원화(原花)를 뽑았는데, 모여든 무리가 3, 4백명이었다. 교정(峧貞)은 남모(南毛)를 질투하였다. 술자리를 마련하여 남모(南毛)에게 많이 마시게 하고, 취하게 되자 몰래 북천(北川)으로 메고 가서 돌로 묻어서 죽였다. 그 무리들은 남모(南毛)가 간 곳을 알지 못해서 슬프게 울다가 헤어졌다. 그 음모를 아는 사람이 있어서 노래를 지어 동네 아이들을 꾀어 거리에서 부르게 하였다. 남모(南毛)의 무리들이 노래를 듣고, 그 시체를 북천(北川) 중에서 찾아내고 곧 교정랑(峧貞娘)을 죽였다. 이에 대왕은 영을 내려 원화(原花)를 폐지시켰다.
여러 해 뒤에 왕은 또 나라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風月道)를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다시 명령을 내려 좋은 가문 출신의 남자로서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고쳐서 화랑(花郞)이라고 하였다. 처음 설원랑(薛原郞)을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화랑(花郞) 국선(國仙)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명주(溟洲)에 비(碑)를 세웠다. 이로부터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고쳐 선행을 하게 하고,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 온순하게 하니, 5상(五常), 6예(六藝), 3사(三師), 6정(六正)이 왕의 시대에 널리 행해졌다. ≪국사(國史)≫에는 진지왕(眞智王) 대건(大建) 8년 병신(丙申, 576)에 비로소 화랑(花郞)을 받들었다고 하였으나, 아마도 사전(史傳)의 잘못일 것이다.
진지왕(真智王) 대에 흥륜사(興輪寺)에는 진자(真慈) 또는 정자(貞慈)라는 승려가 있었다. 항상 당주(堂主) 미륵상(弥勒像) 앞에 나아가 서원을 발(發願)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우리 대성(大聖)께서는 화랑(花郞)으로 화(化)하시어 세상에 출현하셔서 제가 항상 거룩하신 모습(睟容)을 가까이 뵙고 받들어 시중들 수 있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그의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 독실해졌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승려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의 수원사(水源寺)로 가면 미륵선화(弥勒仙花)를 볼 수 있을 것이다”고 하였다.
진자(真慈)는 깨자 놀라고 기뻐하며, 그 절을 찾아 열흘 동안의 행정을 한 걸음마다 한 번씩을 절하며 갔다. 그 절에 이르자 문 밖에 복스럽고 섬세하게 생긴 한 도령이 있었다. 고운 눈매와 입맵시로 맞이해서 작은 문으로 인도하여 객실로 영접하였다. 진자(真慈)는 한편으로 올라가면서 한편으로는 절을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평소에 잘 모르면서 어찌하여 대접함이 이렇게도 은근한가?”라고 하였다. 낭(郎)이 말하기를, “저도 또한 서울 사람(亰師人)입니다. 스님께서 먼 곳에서 오심을 보고 위로를 드릴 뿐입니다”고 하였다.
잠시 후 문 밖으로 나갔는데,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진자(真慈)는 우연한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다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절의 승려들에게 지난밤의 꿈과 이곳에 온 뜻만을 이야기하고는 또 말하기를, “잠시 말석에서라도 몸을 붙여 미륵선화(弥勒仙花)를 기다리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절의 승려들은 그의 정상을 허황된 것으로 여기면서도 그의 은근하고 정성스러운 태도를 보고서 말하기를, “여기서 남쪽으로 가면 천산(千山)이 있는데, 예부터 현인(賢人)과 철인(哲人)이 살고 있어 명감(冥感)이 많다고 합니다. 어찌 그곳으로 가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진자(真慈)가 그 말을 좇아 산 아래에 이르니, 산신령(山神靈)이 노인(老人)으로 변하여 나와서 맞으면서 말하기를, “여기에는 무슨 일로 왔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미륵선화(弥勒仙花)를 뵙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노인(老人)이 말하기를, “지난번 수원사(水源寺) 문 밖에서 이미 미륵선화(弥勒仙花)를 뵈었는데, 또 다시 와서 무엇을 구한다는 말인가?”라고 하였다. 진자(真慈)는 듣고 깜짝 놀라 달려서 본사(本寺)로 돌아왔다. 한 달 정도 후에 진지왕(真智王)이 그 소식을 듣고 진자(真慈)를 불러 그 연유를 묻고 말하기를, “낭(郎)이 스스로 서울 사람(亰師人)이라고 했다면, 성인(聖人)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왜 성 안을 찾아보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진자(真慈)는 왕의 뜻을 받들어 무리를 모아 두루 마을을 다니면서 찾았다. 한 소년이 있었는데, 화장을 곱게 하고 용모가 수려하였으며 영묘사(霊妙寺) 동북쪽 길가 나무 밑에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서 놀고 있었다. 진자(真慈)는 그를 보자 놀라면서 말하기를, “이분이 미륵선화(弥勒仙花)다”고 하였다. 이에 다가가서 묻기를, “낭(郎)의 집은 어디에 있으며, 성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고 하였다. 낭(郎)이 대답하기를, “내 이름은 미시(未尸)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다 돌아가셔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우고 들어가서 왕에게 뵈었더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그의 자제들에 대한 화목과 예의(禮義)와 풍교(風敎)는 보통과는 달랐다. 풍류(風流)가 세상에 빛난 지 거의 7년이 되더니 문득 간 곳이 없었다. 진자(真慈)는 슬퍼하고 생각함이 매우 심하였다. 그러나 자비로운 은택에 흠뻑 젖었고, 맑은 교화를 친히 접했으므로 스스로 뉘우치고 고쳐서 정성으로 도(道)를 닦아 만년(晩年)에는 또한 세상 마친 곳을 알 수 없다.
설명하는 이가 말하기를, “미(未)는 미(弥)와 음이 가깝고, 시(尸)는 력(力)과 모양이 서로 비슷하므로 그 근사함에 가탁하여 수수께끼처럼 한 것이다. 대성(大聖)이 유독 진자(真慈)의 정성에 감동된 것만이 아니라, 아마 이 땅에 인연(縁)이 있었으므로 때때로 나타나 보인 것이다”고 하였다.
지금도 나라 사람들이 신선(神仙)을 가리켜 미륵선화(弥勒仙花)라고 하고 남에게 중매하는 사람을 미시(未尸)라고 하는 것은 모두 미륵(慈氏)의 유풍(遺風)이다. 길 옆에 섰던 나무(路傍樹)를 지금도 견랑(見郞)이라고 이름하고, 또 항간의 말로는 사여수(似如樹) 혹은 인여수(印如樹)라고 한다.
찬(讚)하여 말한다.
향기로운 자취 찾아 걸음마다 그 모습 우르러(尋芳一歩一瞻風)
간 곳마다 심은 것은 한결같은 공덕일세(到處栽培一樣㓛)
홀연히 봄은 가고 찾을 곳 없더니(羃地春歸無覔處)
뉘라서 알았으랴, 잠깐 사이 상림이 붉을 줄을(誰知頃刻上林紅)
'세상사는 이야기 > 삼국유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탑상(塔像) 분황사(芬皇寺) 천수대비(千手大悲) 맹아득안(盲兒得眼) (0) | 2019.07.14 |
---|---|
탑상(塔像) 남백월이성(南白月二聖) 노힐부득(努肹夫得) 달달박박(怛怛朴朴) (0) | 2019.07.13 |
탑상(塔像)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 (0) | 2019.07.11 |
탑상(塔像) 민장사(敏藏寺) (0) | 2019.07.10 |
탑상(塔像) 백율사(栢栗寺) (0) | 2019.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