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율사(栢栗寺)
계림(鷄林)의 북쪽 산을 금강령(金剛嶺)이라고 하는데 산의 남쪽에 백율사(栢栗寺)가 있다. 절에는 부처(大悲)의 상(像) 한구가 있는데, 언제 만든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영험하고 이로움이 자못 현저하였다. 혹은 중국(中國)의 신장(神匠)이 중생사(衆生寺)의 불상을 조성할 때 함께 만든 것이라고 한다. 속설에는 이 대성(大聖)이 일찍이 도리천(忉利天) 위에 올라갔다가 돌아와서 법당(法堂)에 들어갈 때 밟았던 돌 위에는 발자국이 지금까지 마멸되지 않고 남아 있다고 한다. 혹은 부례랑(夫禮郞)을 구해서 돌아올 때의 자취라고도 한다.
천수(天授) 3년 임진(壬辰, 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은 대현(大玄) 살찬(薩喰)의 아들 부례랑(夫禮郞)을 국선(國仙)으로 삼았다. 낭도(주리, 珠履)가 천 명이었는데 안상(安常)과 더욱 친하였다.
때마침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다. 왕은 더욱 놀라고 두려워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보니 창고 안에 있던 거문고와 피리(琴笛) 두 보물이 없어졌다. 이에 말하기를 “내(朕) 어찌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國仙)을 잃고 또 거문고와 피리(琴笛)를 잃게 되었는가?”라고 하면서 창고를 지키던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다섯 명을 가두었다. 4월(693년)에는 국내에 모집하여 말하기를, “거문고와 피리(琴笛)를 찾는 자는 1년의 조세(租稅)를 상금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5월 15일 부례랑(夫禮郞)의 두 분 부모님이 백율사(栢栗寺)의 부처상(大悲像) 앞에 나아가서 여러 날 저녁 천제에게 기도를 드렸더니, 갑자기 향탁(香卓) 위에 거문고와 피리(琴笛) 두 보물이 놓여져 있고 부례랑(夫禮郞)과 안상(安常) 두 사람도 불상 뒤에 도착해 있었다. 두 부모님은 너무나 기뻐서 돌아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 물으니, 부례랑(夫禮郞)은 말하길 “저는 붙잡혀 간 뒤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大都仇羅)의 집에 목동이 되어서 대오라니(大烏羅尼)의 들판에서 방목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책에는 도구(都仇)의 집 종(家奴)이 되어 대마(大磨)의 들판에서 방목했다고 하였다. 홀연히 모습과 용모와 뜻이 단정한 한 스님이 있었는데, 손에 거문고와 피리(琴笛)를 들고 와서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고향생각을 하느냐?’고 하기에, 저는 자신도 모르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임금과 부모님을 그리워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스님(僧)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라’고 하고는 저를 데리고 해변가에 이르렀는데, 또한 안상(安常)도 만났습니다. 이에 피리(笛)를 두 쪽으로 나누어 두 사람에게 주면서 각기 한쪽씩 타게 하고 자신은 그 거문고(琴)를 타고 둥둥 떠서 돌아왔는데 잠깐 사이에 이곳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6월 12일에 혜성(彗星)이 동방에 나타나고, 17일에는 또 서방에 나타나므로,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거문고와 피리(琴笛)의 상서에 대하여 관작을 봉하지 않아서 나타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적(神笛)을 책호(冊號)하여 만만파파식(萬萬波波息)이라고 하니 혜성(彗星)이 이내 물러갔다. 그 후에도 신령하고 이로움이 많이 있지만 글이 번거로우므로 싣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안상(安常)을 일러 준영랑(俊永郞)의 낭도라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영랑(永郞)의 낭도에는 다만 진재(真才), 번완(繁完) 등의 이름이 알려져 있으나, 이들 역시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별전(別傳)에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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