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소관음(三所觀音) 중생사(衆生寺)
신라(新羅) 고전(古典)에 전하길
“중국(中華)의 천자(天子)에게 총애하는 여자(寵姬)가 있었는데 아름답고 고운 것(美艶)이 짝할 사람이 없었다. 고금(古今)의 그림에 이와 같은 사람은 적으리라 하여 이에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에게 명하여 진영(真影)을 그리게 하였다. 화공(畵工)은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데 혹은 장승요(張僧繇)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는 오(吳)나라 사람이다. 그는 양(梁)나라 천감(天監) 중에 무릉왕국(武陵王國)의 시랑(侍郞) 직비각지화사(直秘閣知畵事)가 되었고, 우장군(右將軍)과 오흥태수(吳㒷太守)를 역임하였으니, 이는 중국 양(梁), 진(陳) 무렵의 천자(天子)일 것이다. 그런데 전(傳)에 당(唐) 나라 황제(皇帝)라 한 것은 우리나라(海東) 사람이 중국(中囯)을 모두 당(唐)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실상은 어느 시대 제왕(帝王)인지 알 수 없으므로 두 가지를 다 적어둔다.
그 화공(畵工)은 칙서를 받들어 그림을 완성했는데 붓을 잘못 떨어뜨려 배꼽 아래에 붉은 점이 찍혀졌다. 다시 고치고자 하였으나 되지 아니하므로 마음 속으로 의심하기를 아마 붉은색 표시는 틀림없이 날 때(天生)부터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림을 다 그려서 바치니, 황제(皇帝)가 그것을 보고 말하길 “형상은 곧 진실에 가까운데 그 배꼽 아래의 표시는 곧 몸 안에 감추어진 것이거늘 어찌해서 알고 그것까지 그렸느냐?”라고 하였다. 황제(皇帝)는 크게 진노(震怒)하여서 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가하려고 할 때, 승상(丞相)이 주청하여 말하길, “저 사람은 그 마음이 또한 정직한 사람이니 그를 사면하여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황제(皇帝)가 말하길, “그가 어질고 정직하다면 짐(朕)이 어제 밤 꿈에 본 형상을 그려 올려서 다름이 없으면 그를 용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화공(畵工)은 십일면관음보살상(十一面觀音像)을 그려서 바치니 꿈에서 본 것과 일치하므로 그제야 황제(皇帝)의 뜻이 풀려서 그를 놓아주었다.
그 화공(畵工)은 화를 면하게 되자 박사(博士) 분절(芬節)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기를 신라국(新羅國)은 불법(佛法)을 공경하고 믿는다고 하니, 그대와 함께 바다에 배를 타고 그곳에 가서 함께 불사(佛事)를 닦아 널리 인방(仁邦)을 이롭게 하는 것이 또한 유익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드디어 서로 신라국(新羅國)에 와서 이 절의 대비상(大悲像)을 이룩하니 나라 사람들이 우러러 공경하고 기도하여 복을 얻음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신라(新羅) 말기 천성(天成) 연간에 정보(正甫) 최은함(崔殷諴)은 오래도록 후사를 이을 아들이 없어 이 절의 관음보살(大慈) 앞에서 기도를 하였더니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았다. 태어난 지 석 달이 안되어 백제(百濟)의 견훤(甄萱)이 서울(亰師)을 습격하니 성 안이 크게 어지러웠다. 은함(殷諴)은 아이를 안고 와서 고하기를, “이웃나라 군사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사세가 급박한지라 어린자식이 누(累)가 되어 둘이 다 죽음을 면할 수 없사오니 진실로 대성(大聖)이 보내신 것이라면 큰 자비(慈悲)의 힘으로 보호하고 길러주시어 우리 부자(父子)로 하여금 다시 만나보게 해주소서.”라고 하고 눈물을 흘려 슬프게 울면서 세 번 고하고 강보(襁褓)에 싸서 관음보살(觀音菩薩)의 사자좌(猊座) 아래에 감추어 두고 뒤돌아보며 돌아갔다.
반달이 지나 적병이 물러간 후 와서 아이를 찾아보니 살결은 새로 목욕한 것과 같고 모습도 어여쁘고 젖냄새가 아직도 입에 남아있었다. 안고 돌아와 길렀더니 총명하고 은혜로움이 남보다 뛰어났다. 이 사람이 곧 승로(丞魯)이니 벼슬이 정광(正匡)에 이르렀다. 승로(丞魯)는 낭중(郎中) 최숙(崔肅)을 낳고 숙(肅)은 낭중(郎中) 제안(齊顔)을 낳았으니 이로부터 후손이 계승되어 끊이지 않았다. 은함(殷諴)은 경순왕(敬順王)을 따라 본조(本朝)에 들어와 대성(大姓)이 되었다.
또 통화(統和) 10년(992) 3월 절의 주지인 석(釋) 성태(性泰)는 보살(菩薩) 앞에 꿇어앉아 아뢰기를, “제자가 오랫동안 이 절에 거주하면서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하여 밤낮으로 게을리하지 않았지만 절에는 밭에서 나는 것이 없으므로 향사(香祀)를 이을 수가 없는지라 장차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므로 와서 하직하려고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어렴풋이 잠을 자는데 꿈을 꾸니 대성(大聖)이 이르기를, “법사(法師)는 아직 머물러 있을 것이지 멀리 떠나지 말라. 나는 인연이 있는 것으로써 재 드리는 비용을 충당하리라.”고 하니, 스님(僧)은 기뻐하면서 감사하고 잠에서 깨어나서는 마침내 머물고 떠나지 않았다.
그 후 13일 만에 홀연히 두 사람이 말과 소에 짐을 싣고 문 앞에 이르렀다. 절의 스님이 나가서 묻기를 “어디서 왔느냐?”라고 하니, 말하길 “우리들은 금주(金州) 지방 사람인데, 지난번에 한 스님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말하길 ‘나는 동경(東亰) 중생사(衆生寺)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네 가지의 어려운 일로서 연화(縁化)를 위하여 여기에 왔습니다.’고 하므로 이웃 마을에 시주를 거두어 쌀 여섯 섬과 소금 네 섬을 얻어서 실어 왔습니다.”고 하였다. 스님이 말하길 “이 절에서는 연화(縁化)가 없었는데 당신들은 아마 잘못들은 것 같소.”라고 하였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스님(僧)이 거느리는 방향으로 우리들은 왔는데 이 신견정(神見井) 물가에 이르러서 말하길 ‘절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여 우리들은 뒤쫓아서 마침내 온 것입니다.”고 하였다. 절의 스님이 인도하여 법당(法堂) 앞까지 들어가니 그들은 대성(大聖)을 우러러보고 예배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 부처님이 시주를 구하던 스님(縁化比丘)의 상입니다.”고 하고 놀라서 감탄해 마지 않았다. 이 때문에 쌀과 소금을 바치는 것이 해를 더하여도 그치지 않았다.
또 하루 저녁은 절 대문에 불이 나서 마을사람들이 달려와서 구하는데 법당(法堂)에 올라와 관음상(觀音像)을 찾았으나 간 곳을 알지 못하여 살펴보니 이미 정원의 가운데에 서 있었다. 누가 그것을 밖에 내놓았는지를 물었으나 모두들 모른다고 말하므로 이제야 대성(大聖)의 신령스런 위력(霊威)임을 알았다.
또 대정(大定) 13년 계사(癸巳, 1173) 연간에 점숭(占崇)이라는 스님이 이 절에 살고 있었는데, 글자는 알지 못하지만 성품이 본래 순수하여 향화(香火)를 부지런히 받들었다. 어떤 스님이 그의 거처를 빼앗으려고 친의천사(襯衣天使)에게 하소연하길 “이 절은 국가에서 은혜를 빌고 복을 받드는 장소이니 마땅히 문소(文疏)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을 뽑아서 주관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천사(天使)가 옳다고 생각하여 그를 시험하고자 소문(疏文)을 거꾸로 주니, 점숭(占崇)은 받은 즉시 펴들고 거침없이 읽었다. 천사(天使)는 탄복하고 물러나 방안에 앉아 다시 읽으라 하니 점숭(占崇)이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천사(天使)가 말하기를, “상인(上人)은 진실로 대성(大聖)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하고 끝내 절을 빼앗지 않았다. 당시 점숭(占崇)과 같이 살던 처사(處士) 김인부(金仁夫)가 고을의 노인들에게 전하였으므로 이것을 전(傳)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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