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현릉(顯陵)

현릉(顯陵)

5대 문종(文宗)

-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6-3

- 지정번호 : 사적 제193호

- 조성시기 : 1452년(단종 즉위년) 9월 1일

- 능의구성

      현릉에는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다. 이렇게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본이 된 세종대왕의 예전 능의 제도를 따랐다. 병풍석에서는 이전 왕릉에 있던 방울과 방패 무늬가 사라졌고 구름무늬가 도드라진다. 고석도 4개로 줄었다. 제일 아랫단에는 장검을 두 손으로 짚고 서 있는 무석인이 있는데 머리와 눈, 코가 매우 크게 표현되었다. 문석인도 튀어나온 눈과 양쪽으로 깊이 새겨진 콧수염이 이국적이다. 신도비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사대부처럼 신도비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의논에 의해서 이때부터 건립하지 않았다.

 

- 능의역사

      5대 문종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인 1452년(단종 즉위) 5월에 경복궁 정전에서 승하하였다. 건원릉의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능지를 정할 때에는 수양대군, 왕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학랑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정하였다. 그의 비인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승하하기 11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 1441년(세종 23) 단종을 낳고 병이 위독해져 24세의 나이로 문종보다 먼저 승하하였는데, 안산의 소릉에 장사지냈다.
이후 단종의 복위 사건에 의해 1457년(세조 3) 추폐되었다가 1512년(중종 7) 복위되어 그 다음해 봄, 문종이 묻혀 있는 현릉의 왼쪽 산줄기 언덕에 천장하였다.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하여 동원이강릉을 조성한 후에는 정자각을 두 능의 중간 지점으로 이건하였다. 이 때 양릉 사이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있었는데, 능역을 시작하자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문종(文宗) 생애이야기

      조선의 5대 왕인 문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맏아들이다. 1421년(세종 3) 8세의 어린 나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450년(세종 32) 3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조선이 건국된 이래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등극한 최초의 임금이었다.
문종의 나이 29세에 세종이 병들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섭정기간 동안 그는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게 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고, 말이 적으며, 효도하고, 우애하고, 공손하고, 검소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과 성리학, 글씨와 시문 등 각 방면에도 통달했다.
문종이 왕위에 오른 1450년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되었고, 그 뒤로 매해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그러나 종친세력의 압력 등으로 인해 왕권은 위축되었으며, 문종 자신 역시 몸이 약하여 재위 2년 4개월 만에 병사하였고 곧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 일화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의 수필집『용재총화(?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문종이 동궁으로 있을 때 귤을 나무 소반에 담아서 집현전에 보낸 일이 있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귤을 다 먹자 문종은 즉석에서 시를 짓고 이를 소반 위에 썼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유려한 글씨와 문장에 감탄하여 이를 다투어 베끼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궐에서 빨리 소반을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다 베껴 쓰지 못한 집현전 학자들이 소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 생애이야기

      현덕왕후는 1418년(태종 18)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 14세의 나이로 세자궁에 궁녀로 들어가 세자의 후궁이 되고, 이어 내명부의 종3품 품계인 양원을 하사받았다. 1437년(세종 19) 세자빈인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며, 1441년(세종 23) 7월 23일 단종을 낳았다. 그러나 산후병으로 그 다음날 동궁의 자선당에서 승하하였다.
현덕왕후는 정숙한 덕과 온순한 용모로 동궁에 뽑혀 들어와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고, 단아한 성품과 효행으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일찍 숨을 거둔 비운의 왕비이다. 그러나 그녀의 사후는 생애보다 더욱 비극적이었다. 경기도 안산군에 안장된 후 문종이 즉위하자 능호를 소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457년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는 사건에 현덕왕후의 어머니 최씨와 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처형되면서 폐위되어 종묘에서 신주가 철거되고, 소릉은 파헤쳐져 바닷가에 장사지내는 수난을 당했다.
그 뒤 영남 유생들을 중심으로 소릉 복위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1513년(중종 8) 소세양이 현덕왕후의 복위를 재차 건의하자, 종묘의 문종 신위만이 홀로 제사를 받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 아래 복위되어 같은 해 4월 21일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게 되었다.

 

- 일화

      문종은 동궁으로 있던 1427년(세종 9) 14세의 나이로 김오문의 딸과 혼인을 했다. 그러나 희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은밀한 술법을 동원하다가 시아버지인 세종에 의해 쫓김을 당하였다. 두 번 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성품이 괄괄하고 기가 센 여인이었는데, 문종과의 갈등이 잦았고, 동성애 시비에까지 휘말려 다시 폐위 당하였다.
결국 문종은 순빈과 헤어진지 두 달 만에 현덕왕후 권씨를 세 번째 세자빈으로 맞이하였다. 여기에는 세종이 권근의 후손이자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높았던 그녀를 지명한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권씨는 세종의 예상대로 아들을 낳았으나, 그 다음날 죽게 되었고, 후계 구도가 복잡해지는 것을 이유로, 문종은 다시는 세자빈을 간택할 수 없었다. 단명한 현덕왕후 권씨가 문종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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