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릉(莊陵)
장릉(莊陵)
6대 단종(端宗)
- 위치 : 강원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 지정번호 : 사적 제196호
- 조성시기 : 1581년(선조 14)
- 능의구성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 단종의 능이며 단릉이다. 추봉된 정릉과 경릉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석인은 생략되었고, 석물 역시 후대에 만들어져서 왜소하면서도 간단하다. 장명등은 사각옥형(四角屋形)이다.
장릉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첩첩의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능역 안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을 배향하는 배식단이 있다.
- 단종(端宗) 능의역사
1457년(세조 3) 단종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시신은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였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516년(중종 11) 12월 15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98년(숙종 24)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이곳의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 단종(端宗) 생애이야기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의 아들이다. 10세 때 인 1450년(세종 32) 세종이 죽고 아버지인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문종이 재위한 지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3일 만에 승하하였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였다. 단종은 왕위를 내놓고 상왕으로 물러났으나 단종 복위 사건 등으로 말미암아 서인으로 강봉되었고, 1457년(세조 3) 6월 유배지인 영월에서 사사되었다.
- 일화
문종(文宗)이 임종(臨終)에 앞서 단종(端宗)의 유충(幼沖)함을 염려하여 영의정 황보인(領議政 黃甫仁), 좌의정 김종서(左議政 金宗瑞) 등에 보좌(補佐)를 유언(遺言)으로 남겼으나 고명대신 등(顧命大臣 等)이 단종 원년(端宗 元年)(1453년) 10월 10일 계유정란(癸酉靖亂)으로 피살(被殺)되고 문종(文宗)의 제(弟)이며 왕숙(王叔)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군국대사(軍國大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였고 수양(首陽)은 동복제 안평대군(同腹弟 安平大君)이 고명대신(顧命大臣)과 불궤(不軌)를 꾀하였다 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放)하고 단종(端宗) 3년(1455년) 윤6월(閏6月) 11일 역시 동복제 금성대군(同腹弟 錦城大君)을 역모(逆謀)의 죄(罪)로 종친(宗親), 궁인(宮人), 시신(侍臣)과 함께 유배(流配)시키자 단종(端宗)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선양(禪讓)하고 상왕(上王)이 되어 수강궁(壽康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세조(世祖) 3년(1457년) 9월 순흥(順興)에 유배(流配)되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비(端宗妃)의 부 송현수(父 宋玹壽)와의 단종복위계책(端宗復位計策)이 발각되자 노산군(魯山君)은 폐서인(廢庶人)이 되었고 이 해 10월 24일 사사(賜死)되었으니 춘추 17세(春秋 17歲)였다.
단종(端宗)의 유해(遺骸)는 동강(東江)에 흘렀는데 영월호장 엄흥도(寧越戶長 嚴興道)가 국법(國法)을 어기고 어시(御屍)를 수습(收拾)하여 발산 동을지 신좌을향(鉢山 冬乙旨 辛坐乙向)(남서(南西)에서 북동향(北東向))에 밀장(密葬)하였으며 중종(中宗) 11년(1516년)에 노산묘(魯山墓)를 찾으라는 왕명(王命)이 있었고 고노호장 엄수(故老戶長 嚴壽), 양인 지무작(良人 智無作), 관노 이말산 등(官奴 李末山 等)의 진언(進言)으로 이해 12월 15일 성분(成墳)하였으나 다시 방치(放置)되었고 중종(中宗) 36년(1541년)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寧越郡守 朴忠元)이 현몽(顯夢)에 따라 노산묘(魯山墓)를 찾고 묘소(墓所)를 수축 봉제(收縮 奉祭)하였다. 선조(先祖) 13년(1580년) 강원감사 정철(江原監司 鄭澈)의 상계(狀啓)에 따라 상석(床石), 표석(標石), 장명등(長明燈), 망주석(望柱石)을 세웠다.
임란(壬亂) 이후 봉묘치제(奉墓致祭)가 다시 소홀(疏忽)해졌으며 숙종(肅宗) 7년(1681년) 7월 21일 노산군(魯山君)을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追封)하였고 숙종(肅宗) 24년(1698년) 11월 6일 추복(追復)하여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으로 하고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에 부묘(廟)하였으며 릉호(陵號)를 장릉(莊陵)이라 하였다. 단종(端宗)이 승하(昇遐)한지 241년만에 변례(變禮)를 버리고 왕실(王室)의 정례(正禮)를 되찾게 된 것이다.
2.사릉(思陵)
사릉(思陵)
-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능리
- 지정번호 : 사적 제209호
- 조성시기 : 1521년(중종 16)
- 능의구성
사릉(思陵)은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이며 단릉 형식이다. 처음에는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이었던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민간 신분의 묘로 조성되었다. 그 후 중종 때 대군 부인의 예로 복위되고, 숙종 때(1698년)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하여 단출하면서 간소하다. 능침의 규모는 매우 작고, 병풍석 난간석을 설치하지 않았으며, 문석인과 석마만이 자리 잡고 있다. 양석과 호석도 한 쌍 씩으로 간소화되어 있다.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되었으며 배위가 짧기 때문에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 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은 동계만이 남아 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능의역사
정순왕후는 1521년(중종 16) 6월 4일 소생 없이 승하하였다. 중종은 단종부터 7대에 걸친 왕대를 산 정순왕후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정순왕후는 후사가 없었으므로 경기도 양주 남쪽 군장리에 있는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시가인 해주 정씨의 가족 묘역에 안장하고 제사를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11월 6일 숙종에 의해 노산군이 단종대왕으로 복위되자 부인도 정순왕후로 복위되었으며, 신위는 창경궁에 모셔져 있다가 종묘에 안치되었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하여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붙였다. 그 후 1986년부터 사릉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 생애이야기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송현수의 딸로, 1440년(세종 22)에 태어났다. 1453년(단종 1) 14세의 나이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간택되었고, 그 다음해에 어린 나이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이 영의정의 자리에 앉아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때였으므로, 단종과 정순왕후 부부는 스스로 아무런 일도 결정할 수 없었다. 결국 1455년(단종 3) 6월 11일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어 수강궁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457년(세조 3) 사육신의 주동으로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던 사건이 발각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부인으로 강봉되었다. 궁궐을 나온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동망봉 기슭에 초가집을 짓고 시녀들이 해오는 동냥으로 끼니를 잇다가, 염색업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1521년(중종 16) 6월 4일을 일기로 장장 7대 왕대에 걸친 삶을 마감하였으니 이 때, 춘추 82세였다.
- 일화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그녀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세조 3)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당하고, 결국 유배지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