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券第八)


신라본기(新羅本紀) 제8(第八)

신문왕(神文王)·효소왕(孝昭王)·성덕왕(聖德王)


신문왕(神文王)


신문왕(神文王)이 즉위하였다. 휘는 정명(政明)으로, 정명(政明)의 자는 일소(日昭)이다.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장자다. 어머니는 자의(慈儀) 또는 자의(慈義)왕후이다. 왕비 김씨(金氏)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로 왕이 태자 시절에 궁에 들어왔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뒤에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데 연좌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官爵)을 잇게 하였다.

원년(681년) 8월에 서불감(舒弗邯) 진복(眞福)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제수하였다.

8일에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파진찬(波珍湌) 김흥원(金興元),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도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13일에 보덕국(報德國)의 왕이 소형(小兄) 수덕개(首德皆)를 사신으로 보내 반역 무리를 평정한 것을 축하하였다.

16일에 교서를 내렸다.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의 좋은 규범이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훌륭한 법이다. 과인이 외소한 몸, 볼품없는 덕으로 숭고한 기틀을 받아 지키느라 먹을 것도 잊고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 잠들며 여러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케 하려 하였다. 그런데 어찌 상복(喪服)도 벗지 않은 때에 경성에서 난이 일어나리라 생각했겠는가? 적괴의 우두머리 김흠돌(金欽突), 김흥원(金興元), 진공(眞功) 등은 벼슬이 자신의 재주로 오른 것이 아니고, 관직은 실로 성은(聖恩)으로 오른 것인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삼가하여 부귀를 보전하지 못하였도다. 마침내 불인(不仁)·불의(不義)로 복과 위세를 마음대로 부려 관료들을 깔보고 위아래를 속였다. 날마다 만족하지 못하는 탐심을 왕성히 하고 포학한 마음을 제멋대로 하여 흉악하고 나쁜 이들을 불러들이고 왕실의 근시들과 결탁하여 화가 안팎에 통하게 되었다. 똑같은 악인들이 서로 도와서 날짜를 정하여 세상을 어지럽히는 반역을 행하고자 하였다. 과인이 위로 천지(天地)의 보살핌에 힘입고 아래로 종묘(宗廟)의 영험을 받아서인지 김흠돌(金欽突) 등의 악이 쌓이고 죄가 가득 차자 그들이 도모하던 역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는 바로 사람과 신이 함께 버리고,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의리를 범하고 풍속을 해침에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병사들을 추가로 모아 은혜를 잊고 의리를 저버린 나쁜 무리들을 없애고자 하였다. 일부는 산골짜기로 도망가 숨고, 일부는 대궐 뜰에서 항복하였다. 그러나 가지나 잎사귀 같은 잔당들을 샅샅이 찾아 모두 죽여 삼사일 안에 죄수 우두머리들이 탕진되었다. 일이 부득이 했으나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으니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어찌 한시라도 잊으리오. 이제 요망한 무리들이 숙청되어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근심이 없게 되었으니 소집한 병사와 말들을 빨리 돌려보내도록 하라. 사방에 공포하여 이러한 뜻을 알게 하라.”
28일에 이찬(伊湌) 군관(軍官)을 죽이고 교서를 내렸다.
“임금을 섬기는 규범은 충(忠)을 다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관직에 있는 의리는 둘이 없음(불이, 不二)을 으뜸으로 여긴다. 병부령(兵部令) 이찬(伊湌) 군관(軍官)은 반열 순서에 의해 마침내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도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조정에 깨끗한 절개를 바친다거나 목숨을 버리고 몸을 잊어 사직에 굳은 정성을 표현하지 못하고 적신(賊臣) 김흠돌(金欽突) 등과 교섭하여 반역 도모를 미리 알았으면서도 일찍이 고하지 않았다. 이미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없고 또한 공사(公事)를 따르려는 뜻이 끊어졌는데 어찌 거듭 재상의 자리에 두고서 함부로 법을 흐리게 하겠는가. 마땅히 무리들과 함께 처형하여 후진에게 경계로 삼도록 하겠다. 군관(軍官)과 그의 맏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할 것이니, 전국에 공포하여 모두가 알게 하라.”

겨울 10월에 시위감(侍衛監)을 없애고 장군(將軍) 6명을 두었다.

2년(682년) 봄 정월에 신궁(神宮)에 직접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에 위화부령(位和府令) 두 사람을 두어 선거(選擧)에 관한 일을 맡겼다.

5월에 태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6월에 국학(國學)을 세우고 경(卿) 한 사람을 두었다.

공장부감(工匠府監) 한 사람, 채전감(彩典監) 한 사람을 두었다.

3년(683년) 봄 2월에 순지(順知)를 중시(中侍)로 삼았다.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하여 먼저 이찬(伊湌) 문영(文穎)과 파진찬(波珍湌) 삼광(三光)을 보내어 날짜를 정하고 대아찬(大阿湌) 지상(智常)에게 납채(納采)하게 하였다. 폐백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장(醬), 메주, 포(脯), 식초가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여름 4월 평평한 땅에 눈이 한 자(尺)나 쌓였다.

5월 7일에 이찬(伊湌)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보내 집에 가서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날 묘시(卯時)에 파진찬(波珍湌)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阿湌)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자의 아내와 딸, 그리고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 두 부의 여인 각각 30명 씩과 함께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좌우에 시종과 관인 및 여인들이 매우 많았다. 왕궁의 북문에 이르자 수레에서 내려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 10월에 보덕국(報德國) 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였다. 서울에 머물게 하고 멋진 집과 비옥한 밭을 주었다.

혜성(彗星)이 오거(五車) 자리에 나타났다.

4년(684년) 겨울 10월에 해질녁부터 새벽까지 유성(流星)이 이리저리 떨어졌다.

11월에 안승(安勝)의 조카인 장군(將軍)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란은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문(大文)이 죽는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성(邑城)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장사(將士)들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맞서 싸우던 당주(幢主) 핍실(逼實)이 죽었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 반란군들을 수도 남쪽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지역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대문(大文)을 어떤 곳에서는 실복(悉伏)이라고 하였다.

5년(685년) 봄에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를 빼고 청주(菁州)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9주(州)가 구비되었다. 청주(菁州)에는 대아찬(大阿湌) 복세(福世)를 총관(揔管)으로 삼았다.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을 설치하여 아찬(阿湌) 원태(元泰)를 사신(仕臣)으로 삼았다.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고 각 주군(州郡)의 백성들을 옮겨 나누어 살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가 완성되었다.

여름 4월에 망덕사(望德寺)가 완성되었다.

6년(686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대장(大莊) 또는 대장(大將)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예작부(例作府)에 경(卿) 두 사람을 두었다.

2월에 석산현(石山縣)·마산현(馬山縣)·고산현(孤山縣)·사평현(沙平縣)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하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하였다.

발라주(發羅州)를 군(郡)으로 하고, 무진군(武珍郡)을 주(州)로 하였다.

(唐)에 사신을 보내예기(禮記)》와 문장(文章)에 관한 책을 요청하였다. 측천무후(測天武后)는 담당 관청에 명하여 길흉요례(吉凶要礼)들을 베껴 쓰게 하고, 아울러 문관사림(文官詞林) 가운데 규범이 될 만한 글들을 채택하여 50권으로 만들어 주었다.
7년(687년) 봄 2월에 원자(元子)가 태어났다. 이날 가라앉고 어두웠으며 천둥 번개가 많이 쳤다.

3월에 일선주(一善州)을 없애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 파진찬(波珍湌) 관장(官長)을 총관(揔管)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을 경(卿)으로 고쳤다.

신하를 조묘(祖廟)에 보내어 치제(致祭)를 올렸다.
“왕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려 거듭 절을 올리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의 신령(神靈)께 말씀드립니다. 아무개는 텅비고 경박하고 숭고한 기틀을 이어 지키느라 자지도 못하고 걱정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잠시도 편안히 쉴 겨를이 없습니다. 종묘의 지켜주심과 하늘과 땅이 복을 내려주심에 힘입어 온 나라 안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다른 나라에서 오는 손님들이 배로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과 송사가 그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최근 임금이 임하시는 데 도가 없어지고 하늘이 살피시는데 의(義)가 어그러져 별의 형상에 괴변이 나타나고 빛을 잊고 침침해지니 떨려 깊은 못과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의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물품을 진열하여 여기 계신 듯한 신령 앞에 정성을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약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저를 불쌍히 여기시어 사시(四時)의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거둠에 잘못이 없게 하시옵소서. 농사가 풍년이 들고 역병이 사라지고 입고 먹을 것이 풍족하며 예의가 갖추어지게 되어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후손들을 위해 업적을 남겨 오래도록 많은 복을 받도록 해주십시오. 삼가 아뢰옵니다.”

5월에 문무 관료에게 전지(田地)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가을에 사벌주(沙伐州)와 삽량주(歃良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8년(688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 대장(大莊)이 죽었으므로, 이찬(伊湌) 원사(元師)를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선부(船府)에 경(卿) 한 명을 추가하였다.

9년(689년) 봄 정월에 교를 내려 내외(內外) 관료의 녹읍(祿邑)을 폐지하고, 1년 단위로 조(租)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가을 윤9월 26일에 장산성(獐山城)에 가서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

왕은 도읍(都)달구벌(達句伐)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0년(690년) 봄 2월에 중시(中侍) 원사(元師)가 병 때문에 물러나자 아찬(阿湌)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전야산군(轉也山郡)을 설치하였다.

11년(691년) 봄 3월 1일에 왕자 이홍(理洪)을 태자(太子)로 봉하였다.

13일에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沙火州)에서 흰 참새(백작, 白雀)를 바쳤다.

남원성(南原城)을 쌓았다.

12년(692년) 봄에 대나무가 시들었다.

(唐) 중종(中宗)이 사신 편으로 조칙을 전하였다.
“우리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께서는 신이한 공과 성스러운 덕을 지니신 천고(千古)에 빼어나신 분이다. 그러므로 돌아가신 날에 태종(太宗)이라는 묘호(廟號)를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너희 나라 선왕(先王)인 김춘추(金春秋)의 묘호를 같게 하였으니 너무나 본분에 맞지 않는 행동이도다. 반드시 서둘러 고쳐 부르도록 하라.”

왕과 여러 신하가 함께 의논하고서 대답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왕(先王) 춘추(春秋)의 시호(諡號)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와 중복되었다. 조칙으로 고치라고 하니, 내 어찌 감히 명령을 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생각컨대 선왕(先王) 춘추(春秋)는 매우 훌륭한 덕을 지닌 분이시다. 더구나 살아생전에 김유신(金庾信)이라는 어진 신하를 얻어 한 마음으로 정사에 힘써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가 이룬 공업(功業)이 많지 않다 할 수 없다. 돌아가셨을 때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슬픔과 사모함을 이기지 못하여 받들어 올린 시호인데, 성조(聖祖)의 묘호와 중복된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지금 교칙을 들으니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바라건대 사신께서는 궁궐 마당에서 복명(復命)할 때 이상과 같이 아뢰어주시오.”
뒤에 다시 별도의 조칙이 없었다.
가을 7월에 왕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신문(神文)이라 하고 낭산(狼山) 동쪽에 장사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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