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券第八)
신라본기(新羅本紀) 제8(第八)
신문왕(神文王)·효소왕(孝昭王)·성덕왕(聖德王)
신문왕(神文王)
신문왕(神文王)001 신라의 제31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681년~692년이다. 문무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정명(政明)이다. 신문왕은 원년에 일어난 김흠들(김흠돌(金欽突))의 난 진압과 다음해의 국학(國學) 설치 그리고 중앙 관부와 지방제도의 정비 및 오묘제(五廟制)의 제정 등을 통하여 중대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 《삼국유사》 권2 紀異篇 萬波息笛條에 의하면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고 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4쪽)닫기이 즉위하였다. 휘는 정명(政明)원문 명지자일(明之字日)를 ‘명지(明之)라고도 하는 데 자(字)는 일(日)이다’로 해석하여 ‘명지(明之)’를 신문왕의 또다른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을유문화사, 1977, 128쪽). 이재호, 《삼국사기》, 한국자유교육협회, 1971, 153쪽 | 井上秀雄 譯註, 《三國史記》 1, 1980, 250쪽). 그러나 문맥상 ‘명지(明之)’를 신문왕의 이름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한편 일(日)를 《삼국유사》 권3 탑상편(塔像篇)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서는 ‘일소(日炤)’ 혹은 ‘일조(日照)’로 표기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4쪽) 일소(日昭)의 ‘소(昭)’는 소(炤)의 오서이다.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 편 참조.(북한과학원 고전연구실, 《삼국사기》 상, 아름출판공사, 1958, 208쪽)닫기으로, 정명(政明)의 자는 일소(日昭)이다. 002 문무대왕(文武003 정덕본에는 㱏로 되어 있다. 이는 武를 피휘한 것이다.닫기大王)의 장자다. 어머니는 자의(慈儀) 또는 자의(慈義)왕후이다. 왕비 김씨(金氏)는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의 딸로 왕이 태자 시절에 궁에 들어왔는데, 오래도록 아들이 없다가, 뒤에 아버지가 난을 일으킨 데 연좌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문무왕 5년(665)에 태자가 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왕위를 이었다. 당고종이 사신을 보내 신라 왕으로 책봉하고, 선왕의 관작(官爵)을 잇게 하였다.(661)에 “개부의동삼사(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신라왕(新羅王))”의 관작을 당으로부터 받았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4쪽)닫기
원년(681년) 8월에 서불감(舒弗邯) 진복(眞福)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제수하였다.
8일에 소판(蘇判) 김흠돌(金欽突), 파진찬(波珍湌) 김흥원(金興元),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 등이 반란을 도모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겨울 10월에 시위감(侍衛監)을 없애고 장군(將軍) 6명을 두었다.
2년(682년) 봄 정월에 신궁(神宮)에 직접 제사 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여름 4월에 위화부령(位和府令)7 위화부(位和府)는 후세(後世)의 이조(吏曹)와 같은 것으로, 그 시치(始置)는 진평왕(眞平王) 3년이다.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上(상) 位和府條(위화부조)에 의하면 이 신문왕(神文王) 2년에는 위화부(位和府)의 김하신() 2인을 시치(始置)하고, 5년에 1인을 가(加)하고, 애장왕(哀莊王) 6년에 금하신(衿荷臣)을 고쳐 영(令)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면 그 장관(長官)을 영(令)이라 하기는 애장왕(哀莊王) 때의 일이요, 신문왕(神文王) 때에는 금하신(衿荷臣)이라 하였던 모양이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1쪽) 位和府는 관리의 선발·任免에 관한 일을 맡는 관서로, 眞平王 3년(582)에 처음 설치되었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 의하면, 神文王 2년에 위화부에 衿荷臣 2명을 처음 두고 동왕 5년에 1명을 더 두었으며, 哀莊王 6년에 衿荷臣을 令으로 고쳤다고 한다. 《삼국사기》 직관지에 따를 경우, 신문왕 2년 위화부의 장관 명칭은 位和府令이 아니라 衿荷臣이었다고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5쪽)닫기 두 사람을 두어 선거(選擧)에 관한 일을 맡겼다.
5월에 태백(太白)이 달을 범하였다.
6월에 국학(國學)008 《삼국사기》 職官志(직관지) 國學條(국학조)에 의하면 진덕왕(眞德王) 5년(서기(西紀) 651년)에 이미 국학(國學)에 박사(博士)·조교(助敎)·대사(大舍) 등 직(職)을 두었다고 하므로, 국학(國學)의 처음 설치(設置)는 이때에 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신문왕(神文王) 때의 설치 운운은 실상 개편(改編)에 불과하였던 것이다.(이병도,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83, 201쪽) 禮部에 속한 중앙 교육기관으로 경덕왕대에 大學監으로 고쳤다가 혜공왕대에 국학으로 명칭을 복고하였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國學條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5~246쪽).닫기을 세우고 경(卿) 한 사람을 두었다.
또 공장부감(工匠府監)009 工匠府의 장관으로, 관등이 大奈麻에서 級湌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 신문왕 2년(682)에 工匠府監이 설치된 사실은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에도 실려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 한 사람, 채전감(彩典監) 한 사람을 두었다.사무를 맡은 관서인 彩典의 장관으로, 官等이 奈麻에서 大奈麻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彩典條 참조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
일길찬(一吉湌) 김흠운(金欽運)011 김흠운(金欽運)은 내물왕(奈勿王) 8세孫(손)으로, 事蹟(사적)은 列傳同人傳(열전동인전)에 자세히 나타난다. 武烈王(무열왕) 6년에 百濟(백제)와 陽山(양산)에서 싸워 壯烈(장렬)하게 戰死(전사)하였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1쪽). 나물왕의 8세손으로 花郞 文努의 郞徒였고, 武烈王 2년(655)에 백제와의 陽山 전투에 郞幢大監으로 참전하였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는데, 그 공으로 死後에 일길찬에 추증되었다 《삼국사기》 권47 열전 金歆運傳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의 어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고자 하여 먼저 이찬(伊湌) 문영(文穎)과 파진찬(波珍湌) 삼광(三光)을 보내어 날짜를 정하고 대아찬(大阿湌) 지상(智常)에게 납채(納采)012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구하는 의례(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4쪽).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혼인을 청하는 儀禮로, 먼저 媒介者로 하여금 혼인의 의사를 전달한 후 예물을 보내어 采擇의 예를 행하는 것이다. 이는 周代의 결혼 六禮의 하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하게 하였다. 폐백이 15수레, 쌀, 술, 기름, 꿀, 장(醬), 메주, 포(脯), 식초가 135수레, 조(租)가 150수레였다.
여름 4월 평평한 땅에 눈이 한 자(尺)나 쌓였다.
5월 7일에 이찬(伊湌) 문영(文穎)과 개원(愷元)을 보내 집에 가서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게 하였다. 그날 묘시(卯時)013 하루의 시간을 12干支로 나눌 때 4번째로, 오전 5시에서 7시 사이의 시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에 파진찬(波珍湌) 대상(大常) 손문(孫文), 아찬(阿湌) 좌야(坐耶) 길숙(吉叔) 등을 보내 각자의 아내와 딸, 그리고 양부(梁部)와 사량부(沙梁部) 두 부의 여인 각각 30명 씩과 함께 맞아 오게 하였다. 부인이 탄 수레의 좌우에 시종과 관인 및 여인들이 매우 많았다. 왕궁의 북문에 이르자 수레에서 내려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울 10월에 보덕국(報德國) 왕 안승(安勝)을 불러 소판(蘇判)으로 삼고, 김씨(金氏) 성을 하사하였다. 서울에 머물게 하고 멋진 집과 비옥한 밭을 주었다.
혜성(彗星)이 오거(五車)014 별자리 이름으로 天庫·嶽·天倉·司空·경(卿)星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 자리에 나타났다.
4년(684년) 겨울 10월에 해질녁부터 새벽까지 유성(流星)이 이리저리 떨어졌다.
11월에 안승(安勝)의 조카인 장군(將軍) 대문(大文)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란은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문(大文)이 죽는 것을 보고는 관리들을 살해하고 읍성(邑城)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장사(將士)들에게 그들을 토벌하게 하니 맞서 싸우던 당주(幢主) 핍실(逼實)015 신라 王京 沙梁部 사람으로 나마 聚福의 아들이다. 逼實이 大文의 반란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전사하자 그에게 사찬의 관등이 추증되었다. 한편 《삼국사기》 권47 열전 驟徒傳에서는 그를 貴幢弟監이라 하여 본문에서 幢主라 한 것과는 달리 표현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이 죽었다. 그 성을 함락시키고016 大文의 난을 평정하는 데는 金欽春의 孫인 令胤이 큰 공을 세웠다. 영윤은 그 전투에서 전사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6쪽)닫기, 반란군들을 수도 남쪽의 주군(州郡)으로 옮기고, 그 지역을 금마군(金馬郡)으로 삼았다. 대문(大文)을 어떤 곳에서는 실복(悉伏)017 《삼국사기》 권47 열전 金令胤傳에서는 大文이라 하지 않고 오로지 悉伏이라고만 칭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닫기이라고 하였다.
5년(685년) 봄에 다시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하고 018 완산주(完山州) 복치설(復置說)은 《삼국사기》 地理志(지리지)3에 '全州本百濟完山, 眞興王16年爲州, 26準州發, 神文王5年 復置完山州'라 한, 잘못된 기사(記事)에 인한 두찬(杜撰)이다. 진흥왕(眞興王) 16년에 전주(全州)의 땅[그 때는 백제(百濟)의 심장지지(心臟之地)]을 취하여 주(州)를 삼았다는 것은 원래 어림없는 오해(誤解)로, 이 오해는 전주(全州)의 고명[古名 : 비사벌(比斯伐)]과 지금의 창녕(昌寧)의 고명[古名 : 비사벌(比斯伐)]이 같은 데서 생긴 것이다. 즉 동명(同名)으로 인하여 창녕비사벌주(昌寧比斯伐州)의 치폐(置廢) 연대(年代)를 전주(全州)의 그것과 흔동한 것이니, 여기의 완산주(完山州) 복치(復置)는 실상 시치(始置)로 고쳐 보아야 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2쪽) 이 기사는 《삼국사기》 권36 잡지 지리(3) 全州條의 “全州는 본래 백제의 完山으로 眞興王 16년에 州를 삼았으며, 26년에 폐하였다가 神文王 5년 다시 完山州를 설치하였다”는 기사에 상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삼국시대에 신라가 백제의 중앙부에 州를 설치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착오는 당시 전주의 옛 이름(比斯伐)과 昌寧의 옛 이름(比斯伐)이 같았기 때문이다. 진흥왕 16년(555)에 설치된 완산주는 창녕에 설치된 比斯伐州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신문왕 5년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했다고 하는 것은 잘못이고, 이 해에 전주에 처음으로 完山州가 설치되었다고 하겠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닫기용원(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居列州)를 빼고 청주(菁州)019 신라 9주의 하나로 주 소재지는 지금의 경상남도 진주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5쪽) 현재의 경남 진주시 지방이다. 경덕왕대 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대 다시 菁州라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닫기를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9주(州)020 신라가 3국을 통일한 후에 나눈 9주로 사벌주(沙伐州, 尙州), 삽량주(良州, 良州), 청주(菁州, 康州), 한산주(漢山州, 漢州), 수약주(首若州, 朔州), 웅천주(熊川州, 熊州), 하서주(河西州, 溟州), 완산주(完山州, 全州), 무진주(武珍州, 武州)를 말한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5쪽) 이때의 九州(구주)는 1) 一善州[일선주 : 善山(선산)] 2) 歃良州[삽량주 : 梁山(양산)] 3) 漢山州[한산주 : 廣州(광주)] 4) 首若州[수약주 : 春川(춘천)] 5) 何瑟羅州(하슬라주) 6) 所夫里州[소부리주 : 扶餘(부여)] 7) 完山州[완산주 : 全州(전주)] 8) 菁州[청주 : 晉州(진주)] 9) 發羅州[발라주 : 羅州(나주)]를 가리킴인 듯(6년·7년條(조)에 약간의 改編(개편)이 있음 |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2쪽) 신문왕 5년에 완비된 9州는 一善州·梁州·漢山州·首若州·河瑟羅州·所夫里州·完山州·菁州·發羅州등 이었는데, 신문왕 6년과 7년에 약간의 개편이 있었다. 한편 신라가 전국을 9주로 나누어 재편한 것은 중국의 옛날 禹王 때의 9주를 모범으로 한 天下觀에 의거했던 것으로 보인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 9주는 중국 고대에 천하를 아홉으로 나누어 관념하던 것을 모방한 것이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p.211)닫기가 구비되었다. 청주(菁州)에는 대아찬(大阿湌) 복세(福世)를 총관(揔管)으로 삼았다.
3월에 서원소경(西原小京)021 충청북도 청주(淸州)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5쪽)현재의 충북 淸州市 지역에 설치된 소경으로, 경덕왕 때에 西原京으로 그 명칭을 바꾸었다. 《삼국사기》 권36 주석 9 참조. 한편 日本 正倉院에서 발견된 新羅村落文書는 서원경 소속의 4개 村에 대한 문서이다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닫기을 설치하여 아찬(阿湌) 원태(元泰)022 성덕왕의 前妃인 成貞王后(혹은 嚴貞王后)의 아버지로, 신문왕 5년에 서원소경의 仕臣이 되었다가 성덕왕 3년(704)에 소판으로서 乘府令이 되었다. 《삼국유사》 王曆篇에서 말하는 성덕왕의 先妃 陪昭王后의 아버지 阿干 元大와 동일 인물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7쪽)닫기를 사신(仕臣)023 신라 소경의 장관으로 仕大等이라고도 하였다. 사신은 관등이 급찬에서 파진찬까지인 자로 임명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닫기으로 삼았다.
남원소경(南原小京)을 설치하고024 현재의 전북 남원시에 설치된 小京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닫기 각 주군(州郡)의 백성들을 옮겨 나누어 살게 하였다.
봉성사(奉聖寺)025 현재의 경북 慶州市 東城洞에 있었던 사찰이다. 《삼국유사》 권5 神呪篇 惠通降龍條에 의하면, 신문왕 5년(685)에 밀교 계통 승려 惠通의 요청으로 信忠의 명복을 빌고자 신문왕이 창건했다고 한다. 일명 信忠奉聖寺라고도 하였다. 창건 연기설화를 통해 볼 때 神印宗의 降龍信仰과 관련되고, 또 왕실 사원으로서 官寺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여기에는 成典이 설치되어 있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닫기가 완성되었다.
여름 4월에 망덕사(望德寺)026 현재의 경북 慶州市 排盤洞에 있었던 사찰로, 그 寺址는 현재 史蹟 제7호로 지정되어 있다.(《삼국유사》 권2 紀異篇) 文虎王 法敏條에 의하면, 당나라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든 四天王寺를 당나라 사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그 맞은편에 새로 절을 세워 거짓으로 그것을 사천왕사라 하니 당의 사신이 ‘望德遙山之寺’라 하였으므로 절 이름을 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孝昭王 원년(元年)(692)에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여 同王 6년(《삼국사기》에서는 5년이라 하였다)에 완공하였다. 落成齋에서 眞身釋迦가 나타나 왕의 공양을 받았으며, 景德王 14년(755)에 당나라에서 安祿山의 亂이 일어나자 쌍탑이 서로 부딪쳤다고 한다. 또 이 절의 승려 善律은 600부 《般若經》의 조성 사업과 관련하여 죽었다가 환생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寺址에는 현재 幢竿支柱(보물 제69호)와 쌍탑지가 남아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닫기가 완성되었다.
6년(686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대장(大莊) 또는 대7 신문왕 6년(686)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8년 9월에 죽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닫기장(大將)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예작부(例作府)028 궁실과 관청 등 공공 시설물의 營繕 관계 일을 담당하던 관서로 ‘例作典’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신문왕 6년에 두었던 경(卿)은 예작부의 차관으로, 官等이 사찬에서 아찬까지인 자로 임명하였다. 《삼국사기》 권38 잡지 직관(上) 例作府條 참조.(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8쪽~249)닫기에 경(卿) 두 사람을 두었다.
2월에 석산현(石山縣)·마산현(馬山縣)·고산현(孤山縣)·사평현(沙平縣) 네 현을 설치하였다.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하고, 웅천군(熊川郡)을 주(州)로 하였다.
발라주(發羅州)030 현재의 전남 나주시 지방이다. 《삼국사기》 권36 주석 311 참조. 發羅州가 언제 설치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49쪽)닫기를 군(郡)으로 하고, 무진군(武珍郡)을 주(州)로 하였다.
3월에 일선주(一善州)을 없애고 다시 사벌주(沙伐州)를 설치하여037 法興王(법흥왕) 11년에 上州(상주)라고 하고 軍主(군주)을 두었다가 진흥왕(眞興王) 18년에 주(州)를 폐한 일이 있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203쪽)닫기 파진찬(波珍湌) 관장(官長)을 총관(揔管)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을 경(卿)으로 고쳤다. 나라의 음악을 담당하던 관서로, 禮部에 소속되어 있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0쪽)닫기
5월에 문무 관료에게 전지(田地)를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가을에 사벌주(沙伐州)와 삽량주(歃良州) 두 주에 성을 쌓았다.
8년(688년) 봄 정월에 중시(中侍) 대장(大莊)이 죽었으므로, 이찬(伊湌) 원사(元師)045 신문왕 8년(688)에 중시가 되었다가 동왕 10년 2월에 병으로 중시직을 그만두었다는 사실 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1쪽)닫기를 중시(中侍)로 삼았다.
2월에 선부(船府)에 경(卿) 한 명을 추가하였다.
9년(689년) 봄 정월에 교를 내려 내외(內外) 관료의 녹읍(祿邑)047 봉록으로 준 영지(領地 | 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7쪽) 녹봉(祿俸)으로서 관리(官吏)에게 주는 토지를 말한다.(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 을유문화사, 1996, p.204)닫기을 폐지하고, 1년 단위로 조(租)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048 祿邑制는 관료들에 대한 경제적 처우 방식으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기를 거쳐 고려 초까지 존속하였다. 녹읍에 관하여서는 학계의 해석이 매우 다양하다. 우선 녹읍은 신문왕 7년(685) 5월조에 보이는 문무관료에 대한 토지 분급과 관련하여, 이를 文武官僚田으로 보고 녹읍이 곧 職田이라는 견해가 있다(野村忠夫, 「正倉院より發見せる新羅の民政文書について」, 《史學雜誌》 62-4, 1953).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학자들은 녹읍과 직전을 달리 보거나 병행되는 제도로 보고 있다. 그리고 녹읍 분급의 주체는 국가이며, 그 대상이 되는 사람은 관직에 있는 문무관료 또는 관청이라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한편 분급 방식에 있어서는, 일정한 지역 전체를 祿邑主에게 분급해 주었다는 견해(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개조사, 동경, 1933 | 김철준, 「신라귀족세력의 기반」, 《인문과학》 7, 1962 | 김용섭, 「전근대의 토지제도」, 《한국사입문》, 학술원, 1983 | 武田幸男, 「新羅の村落支配」, 《朝鮮學報》 81, 1976 | 木村誠, 「新羅の祿邑制と村落構造」, 《역사학연구》 別冊, 1979)와 부분적으로 분급해 주었다는 견해(박시형, 《조선토지제도사》 상·중, 1960·1961 | 이경식, 「고대·중세의 식읍제의 구조와 전개」,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가 있다. 특히 박시형은 직전의 집합체가 1개 녹읍(=지역)이라고 보았다. 수취 방식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노동력 내지 貢納의 수취를 강조하는 견해로서, 이는 다시 租·庸·調 수취설(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1933 | 강진철, 「신라의 녹읍에 대하여」, 《이홍직박사회갑기념 한국사학총론》, 1969)과 租·勞動力 수취설(김철준, 「신라귀족세력의 기반」, 《인문과학》 7, 1962) 및 貢納·役力 수취설(武田幸男, 「新羅の村落支配」, 《朝鮮學報》 81, 1976. 木村誠, 「新羅の祿邑制と村落構造」, 《역사학연구》 別冊, 1979)로 나누어진다. 둘째는 토지 지배를 중시하는 收租權說(백남운, 《조선사회경제사》, 1933 | 野村忠夫, 《正倉院より發見せる新羅の民政文書について》, 《史學雜誌》 62-4, 1953 | 박시형, 《조선토지제도사》 상, 1960 | 김용섭 《전근대의 토지제도》, 《한국사입문》, 학술원, 1983 | 이경식, 「고대·중세의 식읍제의 구조와 전개」, 《손보기박사정년기념 한국사학논총》, 지식산업사, 1988)로서, 收租率은 대개 公田과 같은 1/10로 추정하고 있다(김용섭, 「전근대의 토지제도」, 《한국사입문》, 학술원, 1983). 셋째는 위의 두 입장을 절충한 견해로서 노동력 수취에서 토지생산물 수취로 변화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김기흥, 《삼국 및 통일신라기 세제의 연구》, 역사비평사, 1991 |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1~252쪽) 녹읍은 관료의 복무 대가로 지급한 읍, 즉 토지를 말한다. 애초 녹읍은 국가의 통제 하에 있어서 제한된 수취만이 허용되고 세습적 보유는 금지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점차 해당 지역에 대한 총체적 지배로 발전해 귀족의 사적 기반이 되어 갔던 까닭에 이때 와서 녹읍을 폐지하고, 대신 매년 세조(歲租)를 지급하게 되었다.(이강래, 《삼국사기》, 한길사, 1998, 213쪽)닫기 항식(恒式)으로 삼았다.
가을 윤9월 26일에 장산성(獐山城)에 가서 서원경성(西原京城)을 쌓았다.
왕은 도읍(都)을 달구벌(達句伐)049 대구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8쪽)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일대로, 達伐·達弗·達句火라고도 하였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2쪽)닫기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
10년(690년) 봄 2월에 중시(中侍) 원사(元師)가 병 때문에 물러나자 아찬(阿湌) 선원(仙元)을 중시로 삼았다.
겨울 10월에 전야산군(轉也山郡)051 경상남도 남해군의 옛 이름이다.(이재호, 《삼국사기》 Ⅰ, 솔출판사, 2006, 308쪽) 현재의 경상남도 남해군 남해읍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3쪽)닫기을 설치하였다.
11년(691년) 봄 3월 1일에 왕자 이홍(理洪)052 신문왕의 맏아들로 692년에 신문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효소왕이 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3쪽)닫기을 태자(太子)로 봉하였다.
13일에 크게 사면하였다.
사화주(沙火州)053 현재의 경북 상주시에 있던 沙伐州를 말한다. ‘火’의 훈은 우리말의 ‘불’이기 때문에 신라시대에는 ‘弗’ 혹은 ‘伐’로도 표기하였다. 현재의 대구 지방인 達句火를 達弗 혹은 達伐이라 하였고 경남 창녕 지역인 比斯伐을 比自火라 한 것이 그 예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53쪽)닫기에서 흰 참새(백작, 白雀)를 바쳤다.
남원성(南原城)을 쌓았다.
12년(692년) 봄에 대나무가 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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