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券第七)


신라본기(新羅本紀) 제7(第七)

문무왕(文武王) 하(下)


문무왕(文武王) 11년


11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예원(禮元)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들어가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죽었다.

말갈(靺鞨)군사가 와서 설구성(舌口城)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장차 물러가려고 할 때 군사를 내어 쳐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大阿湌) 진공(眞功)과 아찬(阿湌)  ▣▣▣▣ 등을 보내 병사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갔는데, ▣▣▣▣▣▣▣▣▣▣ 한 치(寸)였다.

여름 4월에 흥륜사(興輪寺) 남문(南門)에 벼락이 쳤다.

6월에 장군(將軍) 죽지(竹旨)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서 백제 가림성(加林城)의 벼를 밟도록 하였다.

마침내 나라 군사와 석성(石城)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나라의 과의(果毅)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26일에 나라 총관(摠管) 설인귀(薛仁貴)임윤법사(琳潤法師)에게 편지를 맡겨 보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행군총관(行軍總管) 설인귀(薛仁貴)는 신라 왕께 편지를 바칩니다. 맑은 바람 만리 길, 큰 바다 삼천리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결정할 일이 있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삿된 마음을 조금 움직여서 변경(境)의 성들에 무력(武力)을 쓴다고 하는데, 유야(由也)의 한 마디 말을 저버린 것이요, 후생(侯生)의 한 번 허락을 잃으신 것입니다.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어 꽃과 꽃받침의 그늘이 크게 벌어지고 서로 그리워하는 달이 헛되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말하면 실로 한숨과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선왕(先王) 개부(開府)께서는 한 나라의 다스림을 꾀하시고 나라 안의 모든 지역의 일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노략질을 경계하였으나, 천리 땅 곳곳에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어서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때에 뽕잎을 따지 못하고 농사짓는 농부는 밭 갈 시기를 잃었습니다. 나이가 예순이 거의 되어 해가 지는 만년임에도 배타고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멀리 양후(陽侯)의 험난함을 건너서 마음을 중국 땅에 기울여서 천자가 계신 대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외롭고 약함을 모두 늘어 놓았으며, 침략을 명확하게 말하여 마음 속에 품은 것은 모두 드러내었으니, 듣는 사람이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는 기개가 천하에서 으뜸이고 정신은 우주에 왕성하여 반고(盤古)가 아홉 번을 변화하고 거령(巨靈)이 손바닥을 한 번 씀과 같았습니다. 쓰러지는 자를 떠받치고 약한 사람을 구원하기에 날마다 쉼이 없어서 선왕을 애처롭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 요청한 바를 가엾게 생각하여 들어주었으며, 가벼운 수레와 날쌘 말, 아름다운 옷과 좋은 약으로 하루 동안에도 자주 만나 특별한 대우를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은혜를 입고서 마주쳐 군사를 내어 떨치니 그 맞음이 물고기가 물을 만남과 같았고 쇠와 돌에 새긴 것보다 분명하였습니다. 봉황 자물쇠 1천 겹과 학 대문 1만 호(戶)되는 궁궐에서 연이어 머물며 술을 마시고 금빛으로 빛나는 대궐의 계단에서 웃고 이야기하면서 군사문제를 함께 의논하여 기일을 정해 응원하기로 하고 하루 아침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바다와 육지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 때에 변방의 풀에 꽃이 피고 느릅나무에 새 열매가 맺혔습니다. 황제께서 직접 참여하신 전투에서 문제(文帝)께서 몸소 나가 백성들을 안부를 묻고 불쌍한 사람을 진휼하였으니, 의로움이 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얼마 뒤에 산과 바다가 모양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후에 성인(聖人)께서 계승하셨고 왕께서도 또한 가업(家業)을 잇게 되었습니다. 서로 바위와 칡처럼 의지하여 토벌하는 군사를 함께 일으켜서 무기를 깨끗이 하고 말을 훈련시켰으니, 이는 모두 선인(先人)들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중국은 피로하였으나, 천자의 곳간은 때때로 열려 곡식과 풀을 날라 날마다 대주었습니다. 조그만 신라 땅 때문에 중국의 군사를 일으켜 이익됨이 적고 쓸모없음에 애쓰게 되었으니, 어찌 그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선군(先君)의 신의를 잃을까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강한 적이 이미 없어졌고 원수와 같은 사람들은 나라를 잃게 되어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가졌으니,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른 데에 옮기지 말고, 안과 바깥이 서로 의지하여 병기를 녹이고 허술한 곳을 변화시켜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좋은 방책을 전해 주고 자손을 현명하게 도와주면, 훌륭한 역사가가 이를 칭찬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편안히 할 수 있는 터전을 버리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책을 지키기를 꺼리어, 멀리는 천자의 명령을 어기고 가깝게는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리고서 천시(天時)를 마음대로 해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속이면서 한쪽 모퉁이 땅 구석진 곳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 과부들이 군량의 수레를 끌고 어린 아이가 둔전(屯田)을 경작하니, 지키려 해도 버틸 수 없고 나아가려 해도 겨루지 못합니다. 얻은 것으로 없어진 것을 보충하고자 하였으나 크고 작음이 같지 않고 어긋남과 따름이 뒤바뀌었으니, 활을 당겨 나아가면서 발 앞의 마른 우물에 빠질 줄을 모르고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나아가면서 참새가 자기를 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살아 계실 때 일찍이 천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바르지 못한 생각을 품고서 거짓으로 정성스런 예절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사욕(私欲)을 좇으려 하고, 천자의 지극한 공적을 탐하여 구차하게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 가서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이는 선왕을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황하의 물이 띠처럼 될 때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을 지키고 의리와 분수를 서리발처럼 지켰어야 하는데, 임금의 명령을 어기었으니 불충(不忠)이요, 아버지의 마음을 배신하였으니 불효(不孝)이므로, 한 몸에 이 두 가지 이름을 쓰고서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父子)가 하루 아침에 떨쳐 일어나게 된 것은 모두 천자의 마음이 멀리까지 미치고 위엄과 힘이 서로 도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주(州)와 군(郡)이 연이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따라 거듭 책명을 받고서 신하라 칭하고는 앉아서 경서(經書)를 읽고 (詩)와 (禮)를 자세히 익혔습니다. 의리를 듣고도 따르지 않고 착함을 보고도 가볍게 여기며, 권모술수의 말을 듣고서 눈과 귀의 혼을 번거롭게 하면 높은 가문의 기틀을 소홀히 하게 되고 귀신들이 엿보는 꾸짖음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뛰어난 위업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고, 안으로는 의심스러운 신하를 없애고 밖으로는 강한 군대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고구려 안승(安勝)은 나이 아직 어리고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사람이 반으로 줄어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 지 의심을 품고서 나라를 맡을 무거운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인귀(薛仁貴)는 누선(樓船)에 돛을 활짝 펴서 달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그가 지난 날에 활에 상한 새의 신세인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깥의 응원 세력이라고 여겼으니 이것은 어떤 잘못입니까? 황제의 은혜와 혜택은 끝이 없고 어진 풍모는 멀리 미쳐 사랑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빛남은 봄꽃과 같았습니다. 멀리서 이런 소식을 들으시고도 쉽게 믿지 않으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령하여 가서 사정을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사신을 보내 서로 묻지도 않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으며, 마침내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어귀에 무기를 감추어 벌레처럼 숲 사이에서 다니고 무성한 언덕에서 숨차게 기어올라 몰래 후회할 칼날을 내었지만 버틸 기세가 없었습니다. 대군이 아직 출발하기 전에 작고 날쌘 군대가 행렬을 갖추어 바다를 바라보고 강에 뜨자 물고기도 놀라고 새도 도망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세로 보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가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니, 미혹에 빠져 날뛰기를 바라건대 그칠 줄 아십시오. 무릇 큰 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고상한 절의를 지켜려는 사람은 뛰어난 행실에 의지함이니, 반드시 난새와 봉황도 길들이지 않으면 승냥이와 이리같은 엿보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장군(高將軍)중국인 기병과 이근행(李謹行)의 변방 군사, (吳)·(楚) 지방의 수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이 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피로한 자들에게 노래부르게 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려면, 그 이유를 모두 논하고 이런 저런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시오. 인귀는 일찍이 임금의 수레를 함께 탔고 직접 위임을 받들었으니 이러한 일을 기록하여 보고한다면 일이 반드시 잘 해결될 것인데, 어찌하여 초조해 하며 스스로 머뭇거립니까? 오호라! 옛날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잘하다가 끝에 가서는 나빠진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았는데 끝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추워져 잎은 떨어지고 세월은 슬픈데,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상처만 마음에 남게 됩니다. 왕께서는 지혜가 깨끗하고 밝으시고 위풍과 정신이 맑고 수려하시니,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지신다면, 제사를 제때에 받을 것이요. 사직이 바뀌지 않게 될 것이니, 길함을 가려 복을 받을 것이 왕에게는 좋은 계책입니다. 삼엄한 싸움 중에도 사신은 다니는 법이므로, 이제 왕의 승려인 임윤(琳潤)을 시켜 편지를 가져가게 하면서 한두 가지 생각을 폅니다.”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신라 백성들은 모두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끝나기 전에 문제(文帝)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셔서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자못 인자함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지나침이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어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것이라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끌기 어려웠으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에 이르러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뒤에 선왕께서는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과 의논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仁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이끌고서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인 복신(福信)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熊津都督府城)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서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부성(府城)을 공격하여 얼마 안되어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둘러싸고 지켰으므로, 이에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서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 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꿔서 서로 잡아먹는 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6년에 이르러서는 복신(福信)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치러 갔다가 적에게 깨뜨림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싸움에 패한 뒤부터 웅진에서 군사를 요청함이 밤낮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에는 많은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요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을 포위하러 갔습니다. 적이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와서 공격하여 군사와 말을 크게 잃고서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자 남쪽의 여러 성들이 한꺼번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福信)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福信)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둘러쌓으므로, 이 때문에 웅진은 길이 끊겨서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건장한 남자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곤경을 구원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서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는 겨우 끝났으나 상복(喪服)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지만,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이르러서 칙명을 받드니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을 나르게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劉摠管)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劉摠管)이 마침내 저와 함께 좇아서 먼저 옹산성(甕山城)을 쳐서 옹산을 빼앗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 가는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 2년 정월에 이르러서 유총관(劉摠管)은 신라의 양하도(兩河道) 총관(摠管) 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는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이어지고 눈보라가 치는 등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보낼 수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고 하였고 신라 병사와 말의 양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또한 돌아왔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와 말이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군영을 나란히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구하였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 보낸 것이 수만 섬입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였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모두 써버려서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지만, 웅진중국 군사는 군량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풀어 떨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고 매겨서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늘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劉仁願) 이하의 군사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은혜와 혜택이 비록 끝이 없다 하더라도 신라가 충성을 바친 것 역시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龍朔) 3년에 이르러서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사와 말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의 배 1천 척이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군영을 깨뜨리자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잃고서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 한 성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지만 굳게 지키고 대항하였으므로 깨뜨려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대부(杜大夫)가 ‘칙명에 따르면 평정을 마친 뒤에 함께 모여 맹서의 모임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임존성(任存城) 한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는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뒤에 서로 함께 맹세를 맺으라고 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여겼고, 또한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끝이 없어서 이랬다 저랬다 함이 언제나 변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함께 맹세를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 근심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맹세를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인덕(麟德) 원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세를 맺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祭壇)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이내 맹세를 맺은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은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취리산(就利山)에 제단을 쌓고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을 맞아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각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乾封) 2년에 이르러서는 대총관(大總管) 영국공(英國公)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와 말이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英公)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大總管)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乾封) 3년에 이르러서는 대감(大監) 김보가(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英公)에게 이르렀더니 신라 병사와 말은 평양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우상(劉右相)이 와서 신라의 병사와 말을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들을 사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과 중국의 여러 군대가 모두 사수(蛇水)에 모여 있었는데, 남건(男建)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결판내려고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英公)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백 명을 뽑아서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깨뜨리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병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서 사람의 힘이 모두 다하였지만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 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혜을 입을 것이요,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영공(英公)이 비밀리 ‘신라는 이전에 군대 동원의 약속을 어겼으니, 또한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했습니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이미 나라에 들어갔는데, 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總章) 원년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서 여러 번 찾아도 마침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소식을 들으니 ‘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漢城) 도독(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을 보내고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州)의 땅을 갑자기 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都儒)의 목을 베어서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 원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쪽은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과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와 장귀(長貴) 등을 보내 부로 향하게 하여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면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 3~4년 사이에 한 번은 주었다 한 번은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지만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신하의 뜻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상모략이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살기에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摠管)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배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스스로 공로를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꾸짖음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쓰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 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고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생각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을 받고 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태양의 빛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揔管)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을 섭렵하였으니, 황제의 벌을 집행함에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배반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이 말합니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진왕(眞王)을 도독(都督)으로 삼았다.

9월에 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많은 병사 4만 명을 이끌고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깊이 도랑을 파고 높이 보루를 쌓아 대방(帶方)을 쳐들어왔다.

겨울 10월 6일에 나라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쳐서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급찬(級湌) 당천(當千)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의 관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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