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권(券第七)
신라본기(新羅本紀) 제7(第七)
문무왕(文武王) 하(下)
문무왕(文武王) 11년
11년 봄 정월에 이찬(伊湌) 001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으로, 이척찬(伊尺飡)이라고도 한다.닫기예원(禮元)002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었던 김개원(金愷元, ?~?)을 말한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이찬(伊飡)이 되었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고종의 칙명을 받아 대아찬(大阿飡)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대당(大幢)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신문왕 3년(683)에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왕비로 맞이할 때 왕명을 받아 김흠운의 집으로 가서 그의 딸을 부인(夫人)으로 책봉하였으며, 효소왕 4년(695) 상대등(上大等)에 올랐다.닫기을 중시(中侍)003 신라의 관직으로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집사부의 장관으로 설치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이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에 해당하는 자들만 맡을 수 있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닫기로 삼았다.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쳐들어가서 웅진 남쪽에서 싸웠는데, 당주(幢主) 004 신라의 군사조직인 당(幢)의 우두머리를 말한다.닫기부과(夫果)005 신라의 군관으로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며 나마(奈麻) 취복(驟福)의 맏아들이다. 문무왕 11년(671)에 당주(幢主)로 백제 부흥군 진압에 참여하였다가 웅진(熊津)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그 뒤 신문왕이 의(義)에 용감하여 그 몸을 돌보지 않았으므로 장하다고 하여 전쟁에서 모두 전사한 그의 아우 취도(驟徒)·핍실(逼實)과 함께 사찬(沙飡)의 벼슬을 내렸다.닫기가 죽었다.
말갈(靺鞨)군사가 와서 설구성(舌口城)006 현재의 함경남도 安邊郡 瑞谷面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나(井上秀雄 譯註, 《삼국사기》 1, 1980, 205쪽), 확실치는 않다.닫기을 포위하였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장차 물러가려고 할 때 군사를 내어 쳐서 3백여 명의 목을 베어 죽였다.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구원하러 오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대아찬(大阿湌) 00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진공(眞功)008 신라의 관리로 생몰연도는 ?~681이다. 문무왕 8년(668) 6월 22일에 신라와 당나라가 고구려를 정벌할 때에 웅진부성(熊津府城)의 유진장(留鎭將) 유인원(劉仁願)이 고구려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城)을 항복시켰다고 하자, 일길찬(一吉飡)의 관등으로 파견되어 축하를 하였고, 문무왕 11년(671) 정월에는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도우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으로 군사를 이끌고 가서 옹포(甕浦)를 지켰다. 그뒤 신문왕 1년(681) 8월 18일에 신문왕 왕비의 아버지 김흠돌(金欽突)이 왕비폐출을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자 파진찬(波珍飡) 흥원(興元)과 함께 이에 참여하였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닫기과 아찬(阿湌) 00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 ▣▣▣▣ 등을 보내 병사로 옹포(甕浦)를 지키게 하였다.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갔는데, ▣▣▣▣▣▣▣▣▣▣ 한 치(寸)였다.
여름 4월에 흥륜사(興輪寺)010 지금의 경북 경주시 사정동에 있었던 신라 최초의 사찰이다. 신라에 불교를 전래한 아도(阿道)이차돈(異次頓)이 순교하자 법흥왕이 크게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하여 ‘대흥륜사(大興輪寺)닫기 남문(南門)에 벼락이 쳤다.
6월에 장군(將軍) 죽지(竹旨)011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죽만(竹曼)이라고도 한다. 진덕여왕 때에 활동하였던 술종(述宗)이 삭주(朔州) 도독(都督)으로 부임할 때, 죽지령(竹旨嶺)에서 거사(居士)와 만난 뒤 낳았다고 하여 죽지라고 불렀다고 전하지만 그 연대는 믿을 수 없다. 진덕여왕 3년(649) 김유신(金庾信), 김천존(金天存) 등과 함께 도살성(道薩城)에서 백제군을 물리쳤고, 2년 뒤에는 태종무열왕 2년(655)까지 파진찬(波珍飡)으로 집사부(執事部)의 초대 중시(中侍)을 맡았다. 문무왕 1년(660)에는 귀당(貴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왔고, 문무왕 8년(668)에는 진순(陳純, 眞純)과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 그 뒤 신라의 당나라 공격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다. 《삼국유사》에는 낭도였던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가 전하고 있다.닫기 등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서 백제 가림성(加林城)012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성흥산성(聖興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백제 수도였던 부여를 보호하기 위해 동성왕 23년(501)에 금강 하류에 축조된 사비시대 백제의 가장 중요한 산성의 하나이다. 성의 둘레는 약 600m로 우물터와 건물터가 남아 있다.닫기의 벼를 밟도록 하였다.
마침내 당나라 군사와 석성(石城)013 지금의 충남 부여군 임천면 동석성리에 있었던 성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6쪽).닫기에서 싸워 5천 3백 명의 목을 베고, 백제의 장군 두 명과 당나라의 과의(果毅)014 唐代 折衝府의 副官으로 ‘果毅都尉’라 하였으며 궁궐의 宿衛와 資材의 조달을 맡았다. 관품은 종5품~종6품이었다. 隋代에는 果毅郞將이라 불렀다.닫기 여섯 명을 포로로 잡았다.
가을 7월 26일에 당나라 총관(摠管) 설인귀(薛仁貴)015 생몰연대는 614년~683년이다. 원래 이름은 禮이고 緯州 龍門 사람이다. 농민 출신으로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였는데, 唐 太宗代에 군대의 모집에 자원하여 공을 세워 右領軍中郞將이 되었다. 뒤에 九姓突厥을 天山에서 격파하였다. 乾封(666~668) 初 고구려 침략에 참여하여 右威衛大將軍兼安東都護에 임명되었고 平壤郡公으로 봉해졌다. 《구당서》 권83 및 《신당서》 권111 열전 薛仁貴傳 참조.닫기가 임윤법사(琳潤法師)016 문무왕 11년에 薛仁貴가 문무왕에게 보낸 서신의 말미에서 임윤법사를 《王所部僧琳潤》 이라 한 점으로 보아, 그는 당나라에 건너가 佛法을 공부하던 西學 求法僧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닫기에게 편지를 맡겨 보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행군총관(行軍總管) 설인귀(薛仁貴)는 신라 왕께 편지를 바칩니다. 맑은 바람 만리 길, 큰 바다 삼천리를 황제의 명령을 받고 결정할 일이 있어서 이 땅에 왔습니다. 삼가 듣건대 삿된 마음을 조금 움직여서 변경(境)의 성들에 무력(武力)을 쓴다고 하는데, 유야(由也)의 한 마디 말017 仲由는 孔子의 제자로서 字는 子路이다. ‘한마디 말’은 《論語》 顔淵篇에 “片言可以折獄者 其由也與”란 구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한마디 말로 獄事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말은 믿을 수 있다는 뜻이다.닫기을 저버린 것이요018 자로(子路)의 한 마디는 충신(忠信)이 명확하여 조금도 허위나 가식이 없다는 뜻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7쪽).닫기, 후생(侯生)의 한 번 허락019 侯生은 중국 戰國時代 魏의 隱士 侯嬴이다. 나이 70세에 大梁城 동쪽 문인 夷門의 守門將으로 있다가 魏의 公子 信陵君이 지극히 공손하게 우대를 함으로써 그의 客이 되는 것을 승낙하였다. 후일 秦나라가 趙나라 서울을 포위하였을 때 신릉군이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출전하였는데 후영은 그 승리할 수 있는 불법적인 계략을 일러주고 그 계략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하여 자살하였다. 여기서 후생의 한번 승락이라 함은 신릉군의 門客이 됨을 승낙함으로써 죽음을 바치기까지 하여 신의를 지켰다는 고사를 일컫는다. 《史記》 권77 魏公子列傳 참조.닫기을 잃으신 것입니다.020 후영(侯嬴)이 신릉군(信陵君)의 출정에 종군하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다가 마침내 뒷날에 그 약속을 지켰다는 이야기를 저버렸다는 뜻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7쪽).닫기 형은 역적의 우두머리가 되고 아우는 충신이 되어 꽃과 꽃받침021 花萼은 곧 ‘華鄂’으로 《詩經》 小雅篇 常棣의 “常棣之華 鄂不鞾鞾 凡今之人 莫如兄弟”란 싯귀에서 온 말로써 형제간의 우애를 꽃과 꽃받침의 떨어질 수 없는 사이에 비유한 말이다.닫기의 그늘이 크게 벌어지고 서로 그리워하는 달이 헛되이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022 꽃과 꽃받침은 서로 분리될 수 없어, 마치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서로 생각하는 것과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7쪽).닫기 이런 저런 것을 말하면 실로 한숨과 탄식만 더할 뿐입니다. 선왕(先王) 개부(開府)023 여기에서의 開府는 武烈王이 즉위 초에 唐 고종으로부터 받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신라왕(新羅王)의 약칭으로 곧 무열왕을 가리킨다.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원년조 참조.닫기께서는 한 나라의 다스림을 꾀하시고 나라 안의 모든 지역의 일들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노략질을 경계하였으나, 천리 땅 곳곳에서 여러 차례 다툼이 있어서 누에치는 아낙네는 제때에 뽕잎을 따지 못하고 농사짓는 농부는 밭 갈 시기를 잃었습니다. 나이가 예순024 《論語》 爲政篇의 “六十而耳順”에서 나온 말로 60세를 의미한다. 김춘추가 唐에 건너간 때는 眞德女王 원년(647) 혹은 동왕 2년 겨울이었다. 그런데 《삼국유사》 권1 紀異篇 太宗春秋公條에 의하면, 그는 661년에 59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하므로 입당시 그의 나이는 45세 혹은 46세가 되었을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에서 60에 가까운 나이라는 것과 차이가 있다.닫기이 거의 되어 해가 지는 만년025 나이가 들어 죽을 때가 가까워 온 것을 말한다. 《淮南子》의 “日西垂景在樹端 謂之桑楡”에서 나온 말이다.닫기임에도 배타고 바다를 건너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멀리 양후(陽侯)026 바다의 신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9쪽).닫기의 험난함을 건너서 마음을 중국 땅에 기울여서 천자가 계신 대궐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외롭고 약함을 모두 늘어 놓았으며, 침략을 명확하게 말하여 마음 속에 품은 것은 모두 드러내었으니, 듣는 사람이 슬픔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027 당나라 제2대 임금인 태종 李世民을 가리킨다. 당 태종은 626년 6월~649년 5월까지 재위하였다.닫기는 기개가 천하에서 으뜸이고 정신은 우주에 왕성하여 반고(盤古)가 아홉 번을 변화하고 028 반고는 중국을 창조한 신으로 천지가 개벽할 때 하루에 아홉 번을 변하였다고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7쪽).닫기거령(巨靈)이 손바닥을 한 번 씀과 같았습니다.029 거령은 하신(河神)으로 손과 발로 화산(華山)을 둘로 나누어 물이 흐르게 하였다고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07쪽).닫기 쓰러지는 자를 떠받치고 약한 사람을 구원하기에 날마다 쉼이 없어서 선왕을 애처롭게 여겨 받아들이고 그 요청한 바를 가엾게 생각하여 들어주었으며, 가벼운 수레와 날쌘 말, 아름다운 옷과 좋은 약으로 하루 동안에도 자주 만나 특별한 대우를 하였습니다. 또한 이러한 은혜를 입고서 마주쳐 군사를 내어 떨치니 그 맞음이 물고기가 물을 만남과 같았고 쇠와 돌에 새긴 것보다 분명하였습니다. 봉황 자물쇠030 皇帝 궁궐의 자물쇠.닫기 1천 겹과 학 대문031 帝京의 關鍵(문의 빗장과 열쇠)을 말한다.닫기 1만 호(戶)되는 궁궐에서 연이어 머물며 술을 마시고 금빛으로 빛나는 대궐의 계단에서 웃고 이야기하면서 군사문제를 함께 의논하여 기일을 정해 응원하기로 하고 하루 아침에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바다와 육지에서 날카로운 기세를 떨쳤습니다. 이 때에 변방의 풀에 꽃이 피고 느릅나무에 새 열매032 옛날 중국의 변경지방에는 느릅나무를 심었으므로, 여기서의 느릅나무는 변경지대를 나타낸다.닫기가 맺혔습니다. 황제께서 직접 참여하신 전투에서 033 선덕여왕 14년(645)에 당 태종이 고구려를 직접 공격한 것을 말한다.닫기문제(文帝)034 당나라 태종 李世民의 諡號이다. 649년 5월에 이세민이 죽자, 동년 8월에 그의 시호를 文皇帝라 하고 廟號는 太宗이라 하였다. 《구당서》 권3 太宗 貞觀 23년조 참조.닫기께서 몸소 나가 백성들을 안부를 묻고 불쌍한 사람을 진휼하였으니035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 5월조를 보면 延壽와 惠眞이 그 무리 3만 6천여 명을 이끌고 당에 항복하였을 때 唐主가 욕살 이하 長官 3,500명을 가려서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平壤으로 돌아가게 한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닫기, 의로움이 깊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얼마 뒤에 산과 바다가 모양을 바꾸고 해와 달이 빛을 잃은 후에036 당나라 태종이 세상을 버린 것을 말한다.닫기 성인(聖人)께서 계승하셨고037 《詩經》 大雅篇에 “下武維周 世有哲王”이라 하였는데 小序에는 武王이 文王을 계승한 것을 찬미한 것이라고 하였다.닫기 왕께서도 또한 가업(家業)을 잇게 되었습니다. 서로 바위와 칡처럼 의지하여 토벌하는 군사를 함께 일으켜서 무기를 깨끗이 하고 말을 훈련시켰으니, 이는 모두 선인(先人)들의 뜻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중국은 피로하였으나, 천자의 곳간은 때때로 열려 곡식과 풀을 날라 날마다 대주었습니다. 조그만 신라 땅 때문에 중국의 군사를 일으켜 이익됨이 적고 쓸모없음에 애쓰게 되었으니, 어찌 그칠 줄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선군(先君)의 신의를 잃을까를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강한 적이 이미 없어졌고 원수와 같은 사람들은 나라를 잃게 되어 군사와 말과 재물을 왕이 또한 가졌으니,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른 데에 옮기지 말고, 안과 바깥이 서로 의지하여 병기를 녹이고 허술한 곳을 변화시켜 자연스럽게 후손에게 좋은 방책을 전해 주고 자손을 현명하게 도와주면038 《詩經》 大雅篇 文王有聲의 “貽厥孫謀 以燕翼子”에서 나온 말이다.닫기, 훌륭한 역사가가 이를 칭찬할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왕께서는 편안히 할 수 있는 터전을 버리고 떳떳하고 정당한 방책을 지키기를 꺼리어, 멀리는 천자의 명령을 어기고 가깝게는 아버지의 말씀을 저버리고서 천시(天時)를 마음대로 해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어기고 속이면서 한쪽 모퉁이 땅 구석진 곳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무기를 들어 과부들이 군량의 수레를 끌고 어린 아이가 둔전(屯田)039 중국에서는 漢代에 비롯된 것으로 변방의 군사가 직접 개간·경작하여 軍需에 충당하는 농지이다.닫기을 경작하니, 지키려 해도 버틸 수 없고 나아가려 해도 겨루지 못합니다. 얻은 것으로 없어진 것을 보충하고자 하였으나 크고 작음이 같지 않고 어긋남과 따름이 뒤바뀌었으니, 활을 당겨 나아가면서 발 앞의 마른 우물에 빠질 줄을 모르고040 《稽神錄》의 설화에서 비롯된 이야기로, 江夏(중국 湖北省)에 사는 林主簿의 딸이 닭먹기를 좋아하였는데 하루는 잡으려던 닭이 우물에 들어가자 그것을 잡으려고 따라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눈 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다가오는 재앙을 알지 못함을 가리킨다.닫기 사마귀가 매미를 잡으려고 나아가면서 참새가 자기를 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041 《說苑》 正諫條에 나오는 이야기로, 높은 나무 위에 앉아 이슬을 먹고 있는 매미는 자기 뒤에 螳螂(버마재비)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그 螳螂은 그 곁에서 黃雀이 자기를 노리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黃雀은 사람이 자신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으로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화가 미치는 것을 알지 못함을 풍자하는 말이다.닫기과 같습니다. 왕께서는 이를 헤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왕께서는 살아 계실 때 일찍이 천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바르지 못한 생각을 품고서 거짓으로 정성스런 예절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사욕(私欲)을 좇으려 하고, 천자의 지극한 공적을 탐하여 구차하게 앞에서는 은혜를 바라고 뒤에 가서 반역을 도모하는 것이라면, 이는 선왕을 받드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황하의 물이 띠처럼 될 때처럼 충성을 다하겠다는 서약042 《史記》 권18 高祖 功臣侯 年表 중의 “封爵之誓曰 使河知帶 泰山若礪”란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충성이 변함없음을 말한다.닫기을 지키고 의리와 분수를 서리발처럼 지켰어야 하는데, 임금의 명령을 어기었으니 불충(不忠)이요, 아버지의 마음을 배신하였으니 불효(不孝)이므로, 한 몸에 이 두 가지 이름을 쓰고서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부자(父子)가 하루 아침에 떨쳐 일어나게 된 것은 모두 천자의 마음이 멀리까지 미치고 위엄과 힘이 서로 도와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주(州)와 군(郡)이 연이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따라 거듭 책명을 받고서 신하라 칭하고는 앉아서 경서(經書)를 읽고 시(詩)와 예(禮)를 자세히 익혔습니다. 의리를 듣고도 따르지 않고 착함을 보고도 가볍게 여기며, 권모술수의 말을 듣고서 눈과 귀의 혼을 번거롭게 하면 높은 가문의 기틀을 소홀히 하게 되고 귀신들이 엿보는 꾸짖음을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선왕의 뛰어난 위업을 계승한다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품고, 안으로는 의심스러운 신하를 없애고 밖으로는 강한 군대를 불러들였으니 어찌 지혜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고구려 안승(安勝)은 나이 아직 어리고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사람이 반으로 줄어 스스로 어떻게 해야할 지 의심을 품고서 나라를 맡을 무거운 뜻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설인귀(薛仁貴)는 누선(樓船)에 돛을 활짝 펴서 달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그가 지난 날에 활에 상한 새의 신세인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깥의 응원 세력이라고 여겼으니 이것은 어떤 잘못입니까? 황제의 은혜와 혜택은 끝이 없고 어진 풍모는 멀리 미쳐 사랑은 햇볕처럼 따뜻하고 빛남은 봄꽃과 같았습니다. 멀리서 이런 소식을 들으시고도 쉽게 믿지 않으시고 이에 신(臣)에게 명령하여 가서 사정을 살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왕께서는 사신을 보내 서로 묻지도 않고 소를 잡고 술을 빚어 우리 군사를 먹이지도 않으며, 마침내 낮은 언덕에 군사를 숨기고 강어귀에 무기를 감추어 벌레처럼 숲 사이에서 다니고 무성한 언덕에서 숨차게 기어올라 몰래 후회할 칼날을 내었지만043 원문의 ‘自噬’는 배꼽을 물어 뜯으려 하여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뜻인 '噬臍不及'에서 나온 말로 후회하여도 이미 때가 늦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사냥꾼이 麝香노루를 잡는 것은 그 배꼽을 취하기 위한 것인데, 노루가 빨리 그 배꼽을 물어 뜯어 버리면 사냥꾼이 잡지 않으나 이미 잡힌 후에는 아무리 배꼽을 물어 뜯으려 해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닫기 버틸 기세가 없었습니다. 대군이 아직 출발하기 전에 작고 날쌘 군대가 행렬을 갖추어 바다를 바라보고 강에 뜨자 물고기도 놀라고 새도 도망하였습니다. 이러한 형세로 보면 사람이 해야 할 일을 가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니, 미혹에 빠져 날뛰기를 바라건대 그칠 줄 아십시오. 무릇 큰 일을 이루려는 사람은 작은 이익을 탐내지 않고 고상한 절의를 지켜려는 사람은 뛰어난 행실에 의지함이니, 반드시 난새와 봉황도 길들이지 않으면 승냥이와 이리같은 엿보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고장군(高將軍)044 문무왕 11년 9월에 藩方의 군사 4만 명을 이끌고 신라를 침입한 당나라 장수 高侃을 말한다.닫기의 중국인 기병과 이근행(李謹行)045 원래 粟末靺鞨의 추장인 突地稽의 아들이었는데 당나라에 들어가 장군이 되었다. 무력이 뛰어나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그를 두려워하였다고 한다.닫기의 변방 군사046 말갈군사를 말한다. 이들의 전투 내용에 대해서는 《책부원귀》 권358 將帥部 立功條, 《자치통감(資治通鑑)》 권202 咸亨 3년 12월조와 4년 윤 5월조에 실려 있다.닫기, 오(吳)·초(楚) 지방의 수군047 吳와 楚는 양자강 이남 지역으로, 그 지리적 성격상 漢代 이래 水軍이 강하였다.닫기, 유주(幽州)·병주(幷州)의 사나운 군사048 幽州는 중국 河北省 북부에서 遼寧省에 걸친 州이고 幷州는 河北省 남부에서 山西省에 걸친 州로 戰國時代 이래 游俠이 많았다. 이 游俠들은 정규군이 아닌 사적인 募兵으로 惡少로도 불리며 私的인 결속력을 가지고 不法的인 일을 행하기도 하였다.닫기가 사방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어 배를 나란히 하고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요새를 쌓고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다면 이는 왕에게는 가슴에 남는 병049 ‘膏’는 가슴 밑, ‘肓’은 가슴 위인데, 이곳에 병이 들면 좀처럼 낫지 않기 때문에 흔히 難治의 重病을 말할 때 사용되는 말이다.닫기이 될 것입니다. 왕께서 만약 피로한 자들에게 노래부르게 하고 잘못된 일을 바로 잡으려면, 그 이유를 모두 논하고 이런 저런 점을 분명하게 밝히십시오. 인귀는 일찍이 임금의 수레를 함께 탔고 직접 위임을 받들었으니 이러한 일을 기록하여 보고한다면 일이 반드시 잘 해결될 것인데, 어찌하여 초조해 하며 스스로 머뭇거립니까? 오호라! 옛날에는 충성스럽고 의롭더니 지금은 역적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잘하다가 끝에 가서는 나빠진 것이 한스럽고, 근본은 같았는데 끝이 달라진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바람은 높고 날씨는 추워져 잎은 떨어지고 세월은 슬픈데, 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상처만 마음에 남게 됩니다. 왕께서는 지혜가 깨끗하고 밝으시고 위풍과 정신이 맑고 수려하시니, 겸손한 뜻으로 돌아가050 유겸(流謙)은 겸손을 유포한다는 뜻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1쪽).닫기 도를 따르는 마음을 가지신다면051 순적(順迪)은 도를 따른다는 뜻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1쪽).닫기, 제사를 제때에 받을 것이요.052 血食은 제사에서 희생을 잡아 바쳤던 데서 유래한 말로 제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제사를 제때에 받든다는 뜻은 나라가 멸망되지 않고 유지됨을 의미한다.닫기 사직053 제후의 사직에는 白茅를 깔았던 것에서 연유하여 茅苴는 제후의 사직을 가리킨다.닫기이 바뀌지 않게 될 것이니, 길함을 가려 복을 받을 것이 왕에게는 좋은 계책입니다. 삼엄한 싸움 중에도 사신은 다니는 법이므로, 이제 왕의 승려인 임윤(琳潤)을 시켜 편지를 가져가게 하면서 한두 가지 생각을 폅니다.”
대왕이 편지에 답하여 말하였다.
“선왕께서 정관(貞觀) 054 당나라 태종(太宗)의 연호로 627~649년에 해당된다. 진평왕 49년에서 진덕여왕 3년까지이다.닫기22년에 중국에 들어가 태종문황제(太宗文皇帝)를 직접 뵙고서 은혜로운 칙명을 받았는데,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너희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끌림을 당해서 매번 침략을 당하여 편안할 때가 없음을 가엽게 여기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내는 바가 아니고 보배055 옛날에 제후들이 會盟하거나 朝聘할 때 가지고 간 예물로, ‘玉’은 圭璋에 속하는 것이고, ‘帛’은 束帛에 속하는 것으로 모두 고대의 귀중한 물건이다.닫기와 사람들은 나도 가지고 있다. 내가 두 나라를 바로 잡으면 평양(平壤) 이남의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 하시고는 계책을 내려주시고 군사 행동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신라 백성들은 모두 은혜로운 칙명을 듣고서 사람마다 힘을 기르고 집집마다 쓰이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큰 일이 끝나기 전에 문제(文帝)께서 먼저 돌아가시고 지금 황제께서 즉위하셔서056 옛날 궁전에는 중간 계단이 없고 東西 양쪽 계단만 있었는데, 祚階 즉 동쪽 계단은 天子의 位인 까닭에 새로운 임금이 처음 등극하는 것을 踐祚라 하였다(《禮記》 曲禮 下).닫기 지난날의 은혜를 계속 이어나가셨는데, 자못 인자함을 자주 입어 지난날보다 지나침이 있었습니다. 저희 형제와 아들들이 금인(金印)을 품고 자주색 인끈을 달게 되어057 재물과 관작을 받는다는 말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1쪽).닫기 영예와 은총의 지극함이 전에 없었던 것이라서 몸이 부스러지고 뼈가 잘게 부셔져도 모두 부리시는데 쓰임이 되기를 바랐으며, 간과 뇌를 들판에 발라서라도058 肝과 腦가 흩어져 땅에 칠해진다는 것은 전쟁의 처참한 상황 혹은 장렬한 죽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충성심을 표현하는 후자의 뜻으로 쓰였다.닫기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고자 하였습니다. 현경(顯慶)059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56~660년에 해당한다. 신라 태종무열왕 3년부터 7년까지이다.닫기 5년에 이르러 성상(聖上)께서는 선왕(先王)의 뜻이 끝나지 않았음을 유감으로 여기시고 지난날에 남겨둔 실마리를 풀고자 배를 띄우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수군(水軍)을 크게 일으키셨습니다. 선왕께서는 연세가 많으시고 힘이 쇠약해져서 군사를 이끌기 어려웠으나 이전의 은혜를 좇아 생각하셔서 힘써 국경에 이르러서 저를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대군을 맞이하게 하였습니다. 동서가 서로 화합하고 수군과 육군이 모두 나아갔습니다. 수군(水軍)이 겨우 백강(白江)060 충남 부여군을 흐르는 금강(금강)을 일컫는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8쪽).닫기 어구에 들어섰을 때 육군은 이미 큰 적을 깨뜨려서 두 부대가 같이 왕도에 이르러 함께 한 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평정한 뒤에 선왕께서는 드디어 대총관(大摠管) 소정방(蘇定方)061 본명은 열(烈)이고 정방은 자(字)이다. 생몰연도는 592~667으로, 당나라의 장군이다. 태종(太宗)과 고종(高宗) 때 동돌궐과 서돌궐을 물리쳐서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키는 공을 세웠다. 태종무열왕 7년(660) 3월에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대총관(大摠管)으로 당나라 군사 13만명을 이끌고 백제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의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扶餘隆)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다음해에 역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여 공격하다가 군사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닫기과 의논하여 중국 군사 1만 명을 남아 있게 하고 신라도 또한 아우 인태(仁泰)062 태종무열왕의 아들이자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태(金仁泰)를 말한다.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2년(655)에 각찬(角粲)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는 백제 정벌에 참여하여 7천 명의 군사로 사비성(泗泌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문무왕 8년(6688)에는 비열도총관(比列道摠管)으로 고구려 공략에 나서, 이적(李勣)이 고구려의 보장왕과 왕자 등을 데리고 당나라고 돌아갈 때, 김인문(金仁問)을 수행하여 함께 당나라에 들어 갔다.닫기를 보내 군사 7천 명을 이끌고서 함께 웅진에 머무르게 하였습니다. 대군이 돌아간 뒤 적신(賊臣)인 복신(福信)063 백제 의자왕의 사촌동생이자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663이다. 의자왕 20년(660)에 좌평으로 임존성(任存城)에서 신라와 당나라 군사와 맞서 싸웠고,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도침(道琛)과 함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여 대항하였다. 백제 부흥군의 내분으로 도침을 살해한 뒤 부여풍도 죽이려다가 도리어 죽음을 당하였다.닫기이 강의 서쪽에서 일어나 남은 무리들을 모아서 웅진도독부성(熊津都督府城)을 에워싸고 핍박하였는데, 먼저 바깥 성책을 깨뜨려서 군량을 모두 빼앗아가고 다시 부성(府城)을 공격하여 얼마 안되어 함락되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성의 가까운 네 곳에 성을 쌓고 둘러싸고 지켰으므로, 이에 부성은 거의 출입할 수도 없었습니다. 제가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포위를 풀고 사방에 있는 적의 성들을 모두 깨뜨려서 먼저 그 위급함을 구하였습니다. 다시 식량을 날라서 마침내 1만 명의 중국 병사들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위기를 벗어나도록 하였으며, 머물러 지키고 있던 굶주린 군사들이 자식을 바꿔서 서로 잡아먹는 일064 몹시 굶주리는 상황을 형용하는 말로, 《春秋左氏傳》 宣公 15년조에 “易子而食 析骸而炊之”라 하여 사람이 차마 자기 자식은 잡아먹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바꾸어 먹고 시체의 뼈를 장작 대신 땐다고 하였다.닫기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6년에 이르러서는 복신(福信)의 무리들이 점점 많아지고 강의 동쪽 땅을 침범하여 빼앗았으므로, 웅진의 중국 군사 1천 명이 적의 무리들을 치러 갔다가 적에게 깨뜨림을 당하여 한 사람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싸움에 패한 뒤부터 웅진에서 군사를 요청함이 밤낮동안 계속되었는데, 신라에는 많은 전염병이 돌아 군사와 말을 징발할 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요청하는 것을 어기기 어려워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주류성(周留城)065 백제의 부흥군이 주둔했던 성으로, 충남 서천군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충남 연기군 당산성(唐山城), 전북 정읍시의 두승산성(豆升山城), 전북 부안군의 위금암산성(位金巖山城) 등 여러 곳에 비정하는 등 다양한 견해가 있다. 그에 대해서는 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7쪽 참조.닫기을 포위하러 갔습니다. 적이 군사가 적음을 알고 곧 와서 공격하여 군사와 말을 크게 잃고서 이득없이 돌아오게 되자 남쪽의 여러 성들이 한꺼번에 모두 배반하여 복신(福信)에게 속하였습니다. 복신(福信)은 승세를 타고 다시 부성을 둘러쌓으므로, 이 때문에 웅진은 길이 끊겨서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곧 건장한 남자들을 모집하여 몰래 소금을 보내 곤경을 구원하였습니다. 6월에 이르러서 선왕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는 겨우 끝났으나 상복(喪服)을 벗지도 못하였으므로 응하여 달려갈 수 없었지만, 칙명을 내려 군사를 일으켜 북쪽으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함자도含資道) 총관(摠管) 유덕민(劉德敏) 등이 이르러서 칙명을 받드니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군량을 나르게 하셨습니다. 이때 웅진에서는 사람을 보내와 부성이 고립되고 위태로운 사정을 자세히 말하였습니다. 유총관(劉摠管)이 저와 상의하였는데, 제가 ‘만약 먼저 평양으로 군량을 보낸다면 웅진으로 통하는 길이 끊어질까 두렵다. 만약 웅진으로 가는 길이 끊어진다면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는 곧 적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유총관(劉摠管)이 마침내 저와 함께 좇아서 먼저 옹산성(甕山城)066 지금의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있는 6세기경 백제의 석성으로 계족산성(鷄足山城)이라고도 불린다. 현재 사적 제355호로 지정되었는데, 길이는 약 1,650m이고 성 내부의 면적 5만 2896㎡이다. 대전의 진산(鎭山)인 계족산(424m)에서 북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지봉정상(420m)에 자리하고 있는데 산정상부를 따라 태뫼식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벽은 주로 내탁(內托)공법에 의하여 쌓였다.닫기을 쳐서 옹산을 빼앗고 웅진에 성을 쌓아 웅진으로 가는 길을 통하게 하였습니다.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먼저 웅진에 양식을 나르자니 황제의 뜻을 어길까 두렵고, 만약 평양으로 수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늙고 약한 자를 뽑아 보내 웅진으로 양식을 나르게 하고 건장하고 날랜 군사들은 평양으로 향하도록 하였습니다. 웅진에 양식을 수송하러 간 사람들은 가는 길에 눈을 만나 사람과 말들이 모두 죽어 1백 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하였습니다. 용삭(龍朔)067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1~663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1년에서 3년까지이다.닫기 2년 정월에 이르러서 유총관(劉摠管)은 신라의 양하도(兩河道) 총관(摠管) 김유신(金庾信)068 문무왕의 외삼촌으로 생몰연도는 595~673이다. 금관가야를 세운 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증조부는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이다. 진평왕 31년(609)에 용화향도(龍華香徒)를 이끌고 화랑이 된 뒤에 김춘추(金春秋)와 사돈관계를 맺어 신라의 중앙정계로 진출하였다. 진평왕 34년에 국선(國仙)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2년(655)에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소(智炤)와 결혼하였다. 진평왕 51년(629)에 중당(中幢)의 당주(幢主)로 고구려의 낭비성(娘臂城) 함락에 공을 세웠고, 선덕여왕 11년(642)에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선덕여왕 13년에는 상장군(上將軍)으로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등 7개 성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선덕여왕 16년에는 여왕의 실정을 내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상대등(上大等)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을 제거하였고, 그 뒤에도 계속 백제에 맞서 싸워 승리를 이루어 나갔다. 진덕여왕 8년(654)에 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660년(태종무열왕 7)에 상대등에 올랐고, 신라 정예군 5만을 이끌고 소정방의 당나라 군사 13만과 함께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문무왕 1년(661)에는 평양(平壤)을 포위하고 있었던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미를 실어다 주기도 하였다. 그 뒤 백제 부흥군을 물리쳤고, 문무왕 7년(667)에는 당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며, 다음해 신라와 당의 군사가 평양을 칠 때는 왕명으로 수도를 지키기도 하였다. 고구려를 정벌한 뒤에는 태대각간(太大角干)의 최고 관등을 받았고, 한강 이북에서 당나라 군사를 내몰아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흥덕왕 10년(835)에 흥무대왕(興武大王)에 추존되었다. 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에 제향되었다.닫기 등과 함께 평양으로 군량을 운송했습니다. 당시는 궂은 비가 한 달 이상 이어지고 눈보라가 치는 등 날씨가 몹시 추워서 사람과 말이 얼어 죽었으므로, 가져갔던 군량을 모두 보낼 수 없었습니다. 평양의 대군이 또 돌아가려고 하였고 신라 병사와 말의 양식도 다 떨어졌으므로 또한 돌아왔습니다.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어 손발이 얼고 상해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행렬이 호로하(瓠瀘河)069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1쪽).닫기에 이르자 고구려 군사와 말이 막 뒤를 쫓아와서 강 언덕에 군영을 나란히 쳤습니다. 신라 군사들은 피로하고 굶주린 날이 오래되었지만 적이 멀리까지 쫓아올까 두려워서 적이 미처 강을 건너기 전에 먼저 강을 건너 싸웠는데, 선봉이 잠깐 싸우자 적의 무리가 무너져 마침내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습니다. 이 군사들이 집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웅진부성에서 자주 곡식을 요구하였는데, 그 이전과 이후에 보낸 것이 수만 섬입니다. 남으로는 웅진으로 나르고 북으로는 평양에 공급하였으니, 조그마한 신라가 두 곳으로 나눠 공급하느라 인력의 피로함이 극에 달하였고 소와 말이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때를 놓쳐 곡식이 잘 익지 못하였습니다.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날라주느라 모두 써버려서 신라의 백성은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하였지만, 웅진의 중국 군사는 군량에 여유가 있었습니다. 또한 남아 지키던 중국 군사들은 집을 떠나온 지가 오래되어 의복이 풀어 떨어져 몸에 걸칠 만한 온전한 옷이 없었으므로,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고 매겨서 철에 맞는 옷을 지어 보냈습니다. 도호(都護) 유인원(劉仁願)이 멀리서 고립된 성을 지킬 때 사면이 모두 적이어서 항상 백제의 공격과 포위를 당하였는데 늘 신라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1만 명의 중국 군사는 4년 동안 신라의 옷을 입고 신라의 식량을 먹었으니, 유인원(劉仁願) 이하의 군사는 뼈와 가죽은 비록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하더라도 피와 살은 모두 이곳 신라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은혜와 혜택이 비록 끝이 없다 하더라도 신라가 충성을 바친 것 역시 가엽게 여길 만한 것입니다. 용삭(龍朔) 3년에 이르러서 총관(摠管) 손인사(孫仁師)가 군사를 이끌고 부성을 구원하러 왔는데, 신라의 병사와 말도 또한 나아가 함께 정벌하여 가서 주류성 아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때 왜(倭)의 수군이 백제를 도우러 와서 070 《日本書紀》 권27 天智 2년 8월조에 의하면, 이때 백제를 도우러 왔던 왜의 수군은 廬原君臣 등 1만 명이었다고 한다.닫기왜의 배 1천 척이 백강(白江)에 정박해 있고 백제의 정예기병이 언덕 위에서 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신라의 용맹한 기병이 중국 군사의 선봉이 되어 먼저 언덕의 군영을 깨뜨리자 주류성에서는 간담이 잃고서 곧바로 항복하였습니다. 남쪽이 이미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쪽을 정벌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071 충남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에 있는 산성으로 현재 사적 제90호로 지정되었다. 봉수산성이라고도 불리는 성은 둘레 2,450m로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는 한산(韓山)의 건지산성(乾芝山城)과 함께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이었다.닫기 한 성만이 헛되이 고집을 부리고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 군대가 힘을 합하여 함께 하나의 성을 쳤지만 굳게 지키고 대항하였으므로 깨뜨려 얻을 수 없었습니다. 신라가 곧 돌아오려 할 때 두대부(杜大夫)072 문무왕 3년(663)에 유인궤(劉仁軌)와 함께 백제 부흥군을 공격하였던 두상(杜爽)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29쪽).닫기가 ‘칙명에 따르면 평정을 마친 뒤에 함께 모여 맹서의 모임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임존성(任存城) 한 성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라는 칙명에 따르면 이미 평정한 뒤에 서로 함께 맹세를 맺으라고 하였는데, 임존성(任存城)이 아직 항복하지 않았으므로 이미 평정되었다고 할 수 없다고 여겼고, 또한 백제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끝이 없어서 이랬다 저랬다 함이 언제나 변하지 않으니, 지금 비록 함께 맹세를 맺는다 하여도 뒷날 반드시 배꼽을 깨물073 배꼽을 깨문다는 것은 하려고 하여도 이룰 수 없는 것으로 후회하여도 이를 수 없다는 의미이다.닫기 근심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여, 맹세를 맺는 일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인덕(麟德)074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4~665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4년에서 5년까지이다.닫기 원년에 이르러 다시 엄한 칙명을 내려 맹세를 맺지 않은 것을 꾸짖었으므로 곧 웅령(熊嶺)에 사람을 보내 제단(祭壇)을 쌓고 함께 서로 맹세하고, 이내 맹세를 맺은 곳을 드디어 두 나라의 경계로 삼았습니다. 모여 맹세한 일은 비록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칙명을 어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취리산(就利山)075 지금의 충남 공주시 연미산(鷰尾山)을 가리킨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5쪽 주6).닫기에 제단을 쌓고 칙사(勅使) 유인원(劉仁願)을 맞아 피를 마시고 서로 맹세하여 산과 강으로 서약하였고, 경계를 긋고 푯말을 세워 영원히 국경으로 삼아 백성을 머물러 살게 하고 각각 생업을 꾸려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건봉(乾封)076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로 666~667년에 해당한다. 신라 문무왕 6년에서 7년까지이다.닫기 2년에 이르러서는 대총관(大總管) 영국공(英國公)077 당나라 장수 李勣을 말한다. 李勣은 정관 11년(637)에 英國公에 봉해졌으므로(《구당서》 권67, 열전 李勣傳) 그를 英公 혹은 英國公이라 칭하였다.닫기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말을 듣고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를 보내 국경에 모이게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와 말이 홀로 쳐들어가서는 안되었으므로 먼저 간자(間者)를 세 번이나 보내고 배를 계속해서 띄워 대군의 동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간자가 돌아와서 모두 ‘대군이 아직 평양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므로, 우선 고구려의 칠중성(七重城)을 쳐서 길을 뚫고 대군이 이르기를 기다리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을 막 깨뜨리려고 할 때 영공(英公)이 보낸 강심(江深)이 와서 ‘대총관(大總管)의 처분을 받들어 신라 병사와 말은 성을 공격할 필요 없이 빨리 평양으로 와서 군량을 공급하고 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행렬이 수곡성(水谷城)078 지금의 신계 지역에 있었던 고구려의 성으로 해곡(海谷)이라고도 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99쪽 주2).닫기에 이르렀을 때 대군이 이미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신라 병사와 말도 역시 곧 빠져나왔습니다. 건봉(乾封) 3년에 이르러서는 대감(大監) 079 신라의 6정(停)과 9서당(誓幢)에서 장군을 보좌하였던 무관(武官)으로, 진흥왕 10년(549)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본래 대대감(隊大監)과 함께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진골인 경우는 아찬(阿飡)에서 사지(舍知)까지, 6두품인 경우는 사중아찬(四重阿飡)에서 나마(奈麻)까지가 주로 임명되었다. 대당(大幢)·귀당(貴幢)에는 각 5명이 두어졌으며, 9서당의 각 부대에는 4명씩이 있었다.닫기김보가(金寶嘉)를 보내 바닷길로 들어가 영공(英公)에게 이르렀더니 신라 병사와 말은 평양으로 와서 모이라는 처분을 받아왔습니다. 5월에 유우상(劉右相)080 당시 遼東道按撫副大使 遼東行軍副大摠管이었던 劉仁軌를 지칭한다. 유인궤는 汴州 尉氏人으로 당나라 초기에 息州參軍으로 入仕하여 659년에 靑州刺史가 되었다가 이듬해 고구려 정벌시 수군을 통솔하게 하였으나 기일을 어김으로써 면직되었다. 후에 유인궤는 檢校帶方州刺史가 되어 웅진에 주둔하며 백제 부흥군을 토벌하였다. 665년에 大司憲, 666년에 右相 兼 檢校太子左中護에 임명되고 동시에 樂城縣男으로 봉해졌다. 668년에 熊津道安撫大使 兼 浿江道摠管이 되어 고구려 토벌에 참여하고, 674년에는 雞林道大摠管이 되어 신라를 침입하였다. 그 후 尙書左僕射, 監修國史, 太子太傅 등을 역임하고 685년에 죽었다. 《구당서》 권84 열전 劉仁軌傳 참조.닫기이 와서 신라의 병사와 말을 징발하여 함께 평양으로 갔는데 나도 또한 한성주(漢城州)에 가서 군사들을 사열하였습니다. 이때 번방(蕃方)과 081 契苾何力이 거느린 말갈 군사를 말한다. 《구당서》 권110 열전 契苾何力傳에 의하면, 668년의 고구려 정벌 당시 契苾何力은 말갈인 50만 명을 이끌고 평양성을 앞장서 공격했다고 한다.닫기중국의 여러 군대가 모두 사수(蛇水)에 모여 있었는데, 남건(男建)082 고구려 말기에 활동하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의 둘째아들인 연남건(淵男建)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연개소문이 죽은 뒤에 맏아들인 남생(男生)이 대막리지(大莫離支)로 실권을 장악하자 동생 남산(男産)과 함께 지방 순시길에 오른 남생의 아들 헌충(獻忠)을 죽이고 정국을 장악하였다. 남생이 대항하며 당나라에 투항한 뒤 당나라 군사가 남생의 세력과 연결하여 침공해 오자 항복하기로 결정하고 성문을 열고 나간 보장왕과 남산과는 달리 끝까지 항전하였다가 패배하였다. 그 뒤 휘하의 대장인 신성(信誠)이 반란을 일으켜 당나라 군사에 사로 잡혔고, 당나라에 끌려간 뒤 금주(黔州)에 유배되었다.닫기이 군사를 내어 한 번 싸움으로 결판내려고 하였습니다.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먼저 큰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성 안은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영공(英公)이 신라의 용맹한 기병 5백 명을 뽑아서 먼저 성문으로 들어가 마침내 평양을 깨뜨리고 큰 공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라 병사는 모두 ‘정벌을 시작한 이래 이미 9년이 지나서 사람의 힘이 모두 다하였지만 마침내 두 나라를 평정하였으니 여러 대를 두고 가졌던 오랜 희망이 오늘에야 이루어졌다. 반드시 우리 나라는 충성을 다한 것에 대한 은혜을 입을 것이요, 사람들은 힘을 다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영공(英公)이 비밀리 ‘신라는 이전에 군대 동원의 약속을 어겼으니083 태종무열왕 7년(660) 7월 10일에 신라 군사가 황산에서 계백(階伯)과 싸우다가 늦은 것을 말한다.닫기, 또한 그것을 헤아려 정할 것이다.’라고 하자 신라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다시 두려움이 더했습니다. 또한 공을 세운 장군들이 모두 기록되어 이미 당나라에 들어갔는데084 문무왕 8년 9월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李勣이 당으로 돌아갈 때 함께 간 仁泰, 義服, 藪世, 天光, 興元 등이 공을 세운 장군 이른바 ‘立功軍將’들이다.닫기,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곧 ‘지금 신라는 아무도 공이 없다.’고 하여 군장(軍將)들이 되돌아오니 백성들이 더욱 두려움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열성(卑列城)085 함남 안변에 있었던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5쪽).닫기은 본래 신라 땅이었는데 고구려가 쳐서 빼앗은 지 30여 년만에 신라가 다시 이 성을 되찾아 백성을 옮기고 관리를 두어 수비하였습니다.086 비열성은 比列城 혹은 比烈忽과 동일 지명으로 현재의 함경남도 안변지방이다. 신라는 진흥왕 17년(556)에 이 지역에 州를 설치하여 군주를 두었다가 진흥왕 29년(568)에 比烈忽州를 폐지하고 達忽州를 설치하였다. 그 후 文武王 8년(668) 3월에 比烈忽州를 다시 설치하였다. 본문에서 고구려가 이 지역을 빼앗은 지 30년 만에 신라가 다시 되찾았다고 하였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이 땅을 번갈아 가며 점령했던 구체적인 시기는 알 수 없다.닫기 그런데 이 성을 가져다 고구려에 주었습니다. 또한 신라는 백제를 평정한 때부터 고구려 평정을 끝낼 때까지 충성을 다하고 힘을 바쳐 당나라를 배신하지 않았는데 무슨 죄로 하루 아침에 버려지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이와 같이 억울함이 있더라도 끝내 배반할 마음은 없었습니다. 총장(總章)087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68~669년에 사용하였다. 문무왕 8년에서 9년에 해당한다.닫기 원년에 이르러 백제가 함께 맹세했던 곳에서 국경을 옮기고 푯말을 바꿔 농토를 빼앗았으며 우리 노비를 달래고 우리 백성들을 꾀어 자기 나라 안에 감추고서 여러 번 찾아도 마침내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소식을 들으니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는 것은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신라를 치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백성들이 그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 하였습니다. 또한 백제의 여자를 데려다 신라의 한성(漢城) 도독(都督) 088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인 주(州)를 다스렸던 장관으로 군주(軍主)·총관(摠管)을 바꾸어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하에는 문무왕 1년(661)에 총관(摠官)으로 불렀던 것을 원성왕 1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을 보내고 함께 모의하여 몰래 신라의 병기를 훔쳐서 한 주(州)의 땅을 갑자기 치기로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발각되어 도유(都儒)의 목을 베어서 꾀하였던 바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함형(咸亨)089 당나라 고종의 연호로 670년~673년에 사용되었다. 문무왕 10년에서 12년에 해당한다.닫기 원년 6월에 이르러 고구려가 반역을 꾀하여 중국 관리를 모두 죽였습니다. 신라는 곧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여 먼저 웅진에 ‘고구려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으니 정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쪽과 우리쪽은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이치로 보아 마땅히 함께 흉악한 적을 토벌하여야 할 것이다. 군사를 일으키는 일은 모름지기 함께 의논하여 처리하여야 할 것이므로, 바라건대 관리를 이곳에 보내 함께 계획을 세우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사마(司馬) 090 漢代에 大將軍營에 5部를 두고 部마다 軍司馬 1인을 두었다. 魏晉시대 이후에 사마는 장군의 아래 있으면서 1府의 일을 총괄하고 군사계획을 수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唐代에는 도독부와 州의 속관이었는데, 관품은 從6品下에서 從4品下까지였다.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百濟의 司馬’는 아마 웅진도독부에 소속된 司馬였을 것이다.닫기예군(禰軍)이 이곳에 와서 함께 의논하여 ‘군사를 일으킨 뒤에는 그쪽과 우리쪽은 서로 의심할까 걱정되니 마땅히 두 곳의 관인(官人)을 서로 바꾸어서 인질로 삼자’고 하였으므로, 곧 김유돈(金儒敦)091 신라의 관리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7년(660)에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을 따라 김인문(金仁問)과 함께 당나라에 들어가 김인문을 보좌하며 숙위(宿衛)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과 함께 귀국하여 당나라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 뒤 문무왕 10년(670)에는 백제의 유민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사신으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에 들어가 강화를 요청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닫기과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와 장귀(長貴) 등을 보내 부로 향하게 하여 인질 교환을 의논하게 하였습니다. 백제가 비록 인질 교환을 허락하였지만 성 안에서는 군사와 말을 모아 그 성 아래 도착하여 밤이면 와서 공격하였습니다.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金欽純)092 신라의 장군으로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자 김유신(金庾信)의 동생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김흠춘(金欽春)이라고도 한다. 진평왕 때 화랑이 되었고, 태종무열왕 7년(660)에 김유신·품일(品日) 등과 함께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과 싸웠는데, 이때 아들인 화랑 반굴(盤屈)을 불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여 몸을 바쳐 승전을 이끌게 하였다. 문무왕 3년(663)에는 백제 부흥군이 머물렀던 여러 성을 공격하였고, 문무왕 8년(668)에는 대당(大幢) 총관(摠管)으로 김유신을 도와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669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 황제에게 백제의 영토와 유민을 함부로 한 사실을 사죄하고 다음해 돌아왔다.닫기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하(黃河)가 아직 띠와 같이 되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숫돌같이 되지 않았는데093 《史記》 권18 高祖功臣侯者 年表에 “封爵之誓曰 使河如帶 泰山若礪”에서 나온 말로 서로의 맹세가 영원하다는 뜻이다.닫기, 3~4년 사이에 한 번은 주었다 한 번은 빼앗으니 신라 백성은 모두 본래의 희망을 잃었습니다. 모두 ‘신라와 백제는 여러 대에 걸친 깊은 원수인데, 지금 백제의 상황을 보자면 따로 한 나라를 세우고 있으니, 백년 뒤에는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게 먹혀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신라는 이미 중국의 한 주(州)이므로 두 나라로 나누는 것은 합당치 않다. 바라건대 하나의 나라로 만들어 길이 뒷날의 근심이 없게 하자’고 하였습니다. 지난해 9월에 이러한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사신을 보내 아뢰게 하였지만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되돌아왔으므로 다시 사신을 보냈지만 역시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에는 바람이 차고 파도가 세어 미처 아뢸 수 없었는데, 백제가 거짓을 꾸며 ‘신라가 배반하였다.’고 아뢰었습니다. 신라는 앞서는 높은 지위에 있는 신하의 뜻을 잃었고 뒤에는 백제의 참소를 당하여, 나아가고 물러감에 모두 허물을 입게 되어 충성스러운 마음을 펼 수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중상모략이 날마다 황제의 귀에 들리니 두 마음 없는 충성심을 일찍이 한 번도 알릴 수 없었습니다. 사인(使人) 임윤(琳潤)이 영광스러운 편지를 가지고 이르러서야 총관께서 풍파를 무릅쓰고 멀리 해외에 온 것을 알았습니다. 이치로 보아 마땅히 사신을 보내 교외에서 영접하고 고기와 술을 보내 대접하여야 할 것이지만,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에 살기에 예를 다하지 못하고 때에 미처 영접을 못하였으니 부디 괴이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총관(摠管)이 보내온 편지를 펴서 읽어보니, 전적으로 신라가 이미 배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본래의 마음이 아니어서 두렵고 놀라울 뿐입니다. 스스로 공로를 헤아린다면 욕된 비방을 받을까 두렵지만 입을 다물고 꾸짖음을 받는다면 또한 불행한 운수에 빠지게 될 것이므로, 지금 억울하고 잘못된 것을 간략히 쓰고 반역한 사실이 없음을 함께 기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곧바로 수 만의 무리를 보내 저희 나라를 뒤엎으려고 누선(樓船)들이 푸른 바다에 가득하고 배들이 강어귀에 줄지어 있으면서 저 웅진을 생각하여 신라를 공격하는 것입니까? 오호라!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094 ‘指蹤’은 《發蹤指示》의 준말인데 蹤은 縱과 같은 의미이다. 즉 사냥꾼이 개를 풀어 놓아 짐승을 잡는다는 뜻으로, 전쟁을 지휘하여 싸우게 하는 일에 비유된다. 《史記》 권53 蕭相國世家에 “夫獵 追殺獸兎者狗也 而發蹤指示獸處者人也”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는 당나라의 지휘를 받아 개가 짐승을 쫓듯 힘껏 달려서 적국을 멸망시킨 신라의 공로를 형용한 것이다.닫기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095 ‘烹宰’는 짐승을 삶아 요리한다는 뜻으로, 천하를 통일한 후 공신들이 필요치 않을 때에는 그들을 잡아 죽인다는 비유이다. 漢 高祖가 천하를 통일한 후 韓信의 처지를 가리켜 “立功成名身死亡 野獸已盡獵狗烹”이라고 충고한 대목을 典據로 하고 있다(《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여기서는 공이 있는 신라가 공을 이룬 후 이롭지 못한 침해를 받는다는 뜻이다.닫기이며, 잔악한 적 백제는 오히려 옹치(雍齒)의 상(賞)096 雍齒는 처음 漢나라 高祖와 함께 義擧하여 많은 공을 세웠으나 끝내는 한 高祖의 미움을 사서 배반하고 떠났다. 그 후 다시 돌아왔는데, 한 고조가 즉위하자 여러 장수들이 모두 封功行賞에서 제외될까 염려하여 모반하려고 하였다. 이에 고조는 장량의 말에 따라 가장 미워하던 雍齒를 봉하여 십방후로 삼으니 여러 장수들이 모두 기뻐하며 말하기를, 옹치도 侯가 되었으니 우리는 걱정이 없다라고 하며 반란을 도모하지 않았다고 한다(《史記》 권55, 留侯世家).닫기을 받고 097 한나라 고조(高祖)의 장군으로 처음에는 배반하였다가 돌아와 전공을 세웠는데, 고조가 여러 장수를 탄복시키기 위해 미워하였지만 후(侯)를 봉하였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7쪽).닫기중국을 위하여 죽은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098 季布의 母弟인 丁公은 項羽의 장수로서 일찍이 한 고조 劉邦을 彭城의 서쪽으로 추격하여 막다른 곳까지 이르렀다. 이때 고조가 돌아보며 《어찌 이리도 곤욕을 주는가》 하자 丁公은 군사를 거두고 물러갔다. 후에 漢이 천하를 통일한 후 丁公이 고조를 찾아가자 고조를 즉시 그를 斬刑에 처하고 그의 시체를 군중에 돌리면서, “丁公은 항우의 신하로서 매우 불충하였다. 항우가 천하를 잃게 한 것은 바로 이 丁公 때문이다”라 하였다(《史記》 권100, 季布列傳). 이는 곧 생명의 은인에게 해를 입힌 것을 말한다이다.닫기을 당하고 있습니다.099 항우(項羽)의 장군으로 일찍이 한나라 고조(高祖)를 잡았다가 풀어주고 항우가 망한 뒤에 고조를 만났지만 그에게 죽임을 당하였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7쪽).닫기 태양의 빛이 비록 빛을 비춰주지 않지만 해바라기와 콩잎의 본심은 여전히 해를 향하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총관(揔管)께서는 영웅의 뛰어난 기품을 타고났고 장수와 재상의 높은 자질을 품고 있으며 일곱 가지 덕100 《春秋左氏傳》 宣公 12년조에 나오는 武人의 7가지 덕목으로 禁暴, 戢兵, 保大, 定功, 安民, 和衆, 豊財이 그것이다.닫기을 두루 갖추었고 아홉 가지 학문101 《漢書》 권30 藝文志에 분류된 아홉 가지 학문의 분야로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農家 등이다.닫기을 섭렵하였으니, 황제의 벌을 집행함에 죄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자의 군대를 출동시키기 전에 먼저 일의 근본과 까닭을 묻는 서신을 보내왔으니, 이에 배반하지 않았음을 감히 말씀드립니다. 바라건대 총관께서는 스스로 살피고 헤아려 글월을 갖추어 황제께 아뢰어 주십시오. 계림주대도독(雞林州大都督)·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이 말합니다.”
소부리주(所夫里州)102 현재의 충남 부여군 부여읍이다. 문무왕 6년(666)에 州를 폐지하고 郡으로 고쳤다.닫기를 설치하고 아찬(阿湌) 103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진왕(眞王)104 신라의 장수이자 지방관료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태종무열왕 8년(661) 2월에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泗沘城)을 공격하자 왕명을 받고 잡찬(迊飡) 상주(上州) 장군 문충(文忠)을 지원하였다. 그 뒤 문무왕 12년(672)에 백제의 옛 땅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한 뒤 도독(都督)에 임명되었다.닫기을 도독(都督)105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인 주(州)를 다스렸던 장관으로 군주(軍主)·총관(摠管)을 바꾸어 부른 것이다.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하에는 문무왕 1년(661)에 총관(摠官)으로 불렀던 것을 원성왕 1년(785)에 도독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급찬(級湌)에서 이찬(伊湌)까지인 사람이 주로 임명되었다.닫기으로 삼았다.
9월에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많은 병사 4만 명을 이끌고 평양(平壤)에 도착하였다. 깊이 도랑을 파고 높이 보루를 쌓아 대방(帶方)을 쳐들어왔다.
겨울 10월 6일에 당나라 조운선(漕運船) 70여 척을 쳐서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107 郞將은 당의 正5品 무관직이다. 겸이대후는 이때 신라에 사로잡혔다가 문무왕 12년의 謝罪使 파견시 당에 송환되었다.닫기와 병사 1백여 명을 사로잡았으며, 물에 빠져서 죽은 사람은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급찬(級湌) 108 신라의 17관등 중 제9의의 관등으로 급벌찬(級伐湌)이라고도 한다.닫기당천(當千)의 공이 첫째였으므로 사찬(沙湌)109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의 관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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