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文武王) 12년~17년
12년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서 백제의 고성성(古省城)110 사비성(泗沘城)으로 추정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닫기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림성(加林城)111 충남 부여군 임천면 군사리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성흥산성(聖興山城)닫기을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한 번에 평양(平壤)에 이르러 여덟 곳의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
8월에 한시성(韓始城)112 대동강(大同江) 하류 지역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9쪽).닫기과 마읍성(馬邑城)113 대동강(大同江) 하류 지역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9쪽).닫기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114 지금의 영월 일대로 추정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8쪽).닫기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115 황해도 서흥의 운마산(雲磨山) 부근으로 추정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9쪽).닫기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大阿湌) 116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효천(曉川), 사찬(沙湌) 117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阿湌) 118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一吉湌) 11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7위의 관등으로, 일길간(一吉干)·을길간(乙吉干)이라고도 한다.닫기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산주(漢山州)120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다스렸던 신라의 행정구역으로, 진흥왕 14년(553)에 신주(新州)가 설치된 이래,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로 바뀌었다가 북한산주로 다시 불렸으며, 그 뒤 한산주로 불렸다.닫기에 주장성(晝長城)121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19쪽).닫기을 쌓았는데12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6 廣州 古跡條에 “日長山城 卽新羅時晝長山城 文武王所築 內有六井及溪 周八万六千八百尺 高二十四尺 石築”이라 하였다. 주장성은 현재의 南漢山城의 전신으로 추정된다.닫기 둘레는 4,360보(步)였다.
9월에 살별(혜성, 彗星)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났다.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당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당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級湌) 123 신라의 17관등 중 제9의의 관등으로 급벌찬(級伐湌)이라고도 한다.닫기원천(原川)과 나마(奈麻) 124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1위의 관등으로, 나말(奈末)이라고도 한다. 중나마(重奈麻)부터 칠중나마(七重奈麻)까지 분화되었다.닫기변산(邊山)을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125 萊州는 현재의 중국 山東省 掖縣에 치소를 두고 있었는데, 본래는 東萊郡이었던 것을 唐初에 萊州로 고치고 河南道에 소속시켰다. 한편 萊州는 中州였으므로 왕예는 6品上의 司馬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王藝의 행적은 알 수 없다.닫기,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126 本烈州와 王益에 관하여서는 자세하지 않다. 長史는 당대 도독부와 州에 소속되어 있던 正6品上~從3品에 걸쳐 있던 지방관직이다.닫기, 웅주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司馬) 법총(法聰)127 《日本書紀》 권27 天智 6년(667) 11월조에, 백제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웅진도독부 熊山縣令 상주국(上柱國) 司馬 法聰 등을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曾山司馬 법총은 신라에 붙잡히기 전에 熊山縣令과 웅진도독부 사마로서 일본에 다녀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曾山은 ‘熊山’의 오기일 가능성도 있다.닫기,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臣)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서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신이 위급하여 일이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멀리서 들어서 건지는 은혜를 입어 겨우 찢어 죽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고 하더라도 큰 은혜에 보답하기는 부족하고, 머리를 깨뜨리고 티끌처럼 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찌 자애로운 도움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원한이 있는 백제는 우리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황제의 군사를 끌어들여 신을 없애서 치욕을 갚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파멸의 상황에 겨를이 없어서 스스로 처지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쓰게 되어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실과 뜻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형벌에 따라 죽임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일의 내용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라도 귀기울여 들으셔서 근본 이유를 밝게 살펴주소서. 신은 전대(前代) 이래로 조공이 끊기지 않게 하였지만 최근에 백제가 두 번씩이나 조공을 어지럽게 하여 마침내 황제의 조정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내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신의 죄를 꾸짖게 하였으니, 죽어도 오히려 형벌에 남음이 있어서 남산(南山)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모두 기록할 수 없고 포사(褒斜)128 중국 陜西省 終南山에 있는 계곡으로, 四川과 陜西와의 교통의 요충지였다. 즉 이 계곡의 남쪽 입구를 ‘褒’라 하고 북쪽 입구를 ‘斜’라 하였다.닫기의 수풀로도 신의 죄를 물을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웅덩이와 연못으로 만들고 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더라도 일의 정황을 듣고서 판단을 내려주신다면 달게 여기며 죽임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신은 관을 실은 수레를 옆에 두고서 진흙을 바른 머리129 머리를 진흙땅에 숙이고서 사죄를 구한다는 뜻이다.닫기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 용서의 빛이 굴곡진 곳까지 밝게 비추고, 덕은 천지와 하나되어 동물과 식물이 모두 양육의 은혜를 입었으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까지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짊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만일 복종하면 놓아주는 용서를 내리시고 특별히 허리와 머리를 보전하게 하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그 때가 오히려 태어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품은 바를 말씀드리며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원천(原川)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죄의 용서를 빌며 엎드려 칙명에 따르고자 합니다.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 죄를 지었고 또 지었습니다.” 아울러 은 3만 3천 5백 푼(分), 구리 3만 3천 푼, 침(針) 4백 개, 우황(牛黃) 1백 2십 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升布)130 升은 綜이라고도 하며 升의 數는 옷감의 촘촘한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1升은 經絲 80縷를 표시한다. 직물의 폭은 대체로 일정하였으므로 升數가 많을수록 촘촘한 細布가 되는 것이다.닫기 6필, 30승포(升布) 6십 필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에 커다란 별이 황룡사(皇龍寺)131 경북 경주에 있었던 절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절이기도 하다.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사적 제6호닫기와 재성(在城)132 지금의 경주 월성(月城)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닫기 사이에 떨어졌다.
강수(强首)133 신라의 유학자이자 문장가로 생몰연도는 ?~692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자두(字頭)로 임나가라(任那加良)의 후예로 중원경(中原京)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머리에 뿔이 난 사람이 나온 꿈을 꾸고 임신하였기에 태어났을 때 보통 사람과 달리 뒷머리의 뼈가 높이 솟아 올라 있었다고 한다. 국학(國學)에서 학문을 배웠고 불교보다는 유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태종무열왕 때 당나라의 사신이 가져온 어려운 내용의 외교문서를 막힘없이 풀이하여 학식을 인정받았고, 뛰어난 문장력으로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하였다. 무열왕이 ‘강수선생’, ‘임생(任生)’이라고만 부를 정도로 총애하였고, 해마다 신성(新城)의 곡식 1백 석을 하사하도록 하였다.닫기에게 벼슬을 내리고 사찬(沙湌)134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으로 삼아 해마다 조(租) 2백 섬을 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135 지금의 경주 서악산의 정상에 있는 서악산성(西岳山城)을 가리킨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0쪽).닫기을 늘려 쌓았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기에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庾信)136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수로왕(首露王)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고, 어머니는 입종(立宗) 갈문왕(葛文王)의 손녀인 만명부인(萬明夫人)구해왕(仇亥王, 仇衡王)이고, 조부는 김무력(金武力)지소(智炤)비담(毗曇)과 염종(廉宗)진덕여왕이 후사가 없이 죽자 재상 알천(閼川)과 함께 이찬 김춘추(金春秋)묘는 경주의 서쪽인 금산원(金山原)에 있으며, 서악서원(西嶽書院)닫기이 죽었다.
아찬(阿湌) 137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대토(大吐)가 반란을 꾀하여 당나라에 붙으려고 하였는데, 꾀한 일이 새어나와 목이 베여지는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을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
8월에 파진찬(波珍湌) 138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4관등이다. 해간(海干)·파미간(破彌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천광(天光)139 신라의 관리이자 장수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문무왕 8년(668) 6월에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아찬(阿飡)으로 서당(誓幢) 총관(摠管)을 맡아 평양성으로 진격하였고, 9월에는 고구려가 항복하자 당나라의 영공(英公), 신라의 인태(仁泰)·의복(義福) 등과 함께 보장왕과 왕자·대신 등 20여 만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들어갔다. 그 뒤 673년 8월부터 678년 3월까지 중시(中侍)를 맡았다.닫기을 중시(中侍)140 신라의 관직으로 진덕왕 5년(651)에 품주(稟主)를 집사부(執事部)로 고치면서 집사부의 장관으로 설치하였다.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2관등인 이찬에서 제5관등인 대아찬에 해당하는 자들만 맡을 수 있었으며, 경덕왕 6년(747)에 시중(侍中)으로 고쳤다.닫기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141 충북 제천시 청풍면 물태리에 있는 둘레 495m의 삼국시대 산성으로, 남한강가에 있는 해발 373m의 망월산 정상부와 지맥을 둘러쌓은 석성으로 망월산성(望月山城)닫기을 늘려 쌓았다.
9월에 국원성(國原城) 옛날의 완장성(薍長城) 북형산성(北兄山城)142 지금의 경북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성이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0쪽).닫기 소문성(召文城)143 지금의 경북 의성 일대에 자리한 성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0쪽).닫기 이산성(耳山城) 144 경북 고령군 고령읍 중화동에 있는 삼국시대 토석혼축산성으로 주산성(主山城)이라고도 불린다. 둘레 710m, 1,035m의 내외성을 갖추고 있는 산성으로 대가야의 중심지로 추정되고 있다.닫기수약주(首若州)145 신라 때 강원도 일대를 다스렸던 지방 행정구역으로, 우수주(牛首州) 또는 우두주(牛頭州)라고도 불렸는데, 문무왕 13년(673)에 수약주(首若州) 또는 오근내(烏斤乃)로 고쳐 불렸다.닫기의 주양성(走壤城) 또는 질암성(迭巖城) 146 지금의 강원 춘천시에 있는 봉산고성(鳳山古城)으로 추정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0쪽).닫기달함군(達含郡)147 지금의 강원 고성군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4쪽).닫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148 지금의 경남 진주 일대를 다스렸던 신라의 지방행정구역으로, 문무왕 2년(662)에 설치하였다.닫기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大阿湌) 149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관등으로 유리왕 때에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법흥왕 7년(520)의 율령반포 이후에야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진골이 맡을 수 있는 관등으로 6두품은 이것 이상으로 오르지 못하였다.닫기철천(徹川)150 문무왕 원년(661)에 上州摠管 品日 등과 함께 백제 雨述城을 쳐서 1천여 명을 목베는 전과를 올렸던 沙尸山郡 太守 哲川과 동일인으로 보인다.닫기 등을 보내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지키게 하였다.
당나라 군사가 말갈(靺鞨)과 거란(契丹)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邊)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의 목을 베었고, 당나라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151 지금의 임진강(臨津江)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1쪽).닫기와 왕봉(王逢)152 지금의 경기 행주산성 앞의 한강을 일컫는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1쪽).닫기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겨울에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153 지금의 황해 금천군 우봉 일대에 있었던 성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1쪽).닫기을 공격하여 항복을 시켰고,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는 대양성(大楊城)154 현재 북한의 강원도 金剛郡 縣里 지역이다.닫기과 동자성(童子城)155 지금의 경기 김포 통진에 있었던 성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1쪽).닫기을 공격하여 없어지게 하였다.
비로소 외사정(外司正)156 신라의 외관직(外官職)으로 지방 행정통제와 관리감찰을 맡았다. 정원은 113명이었는데, 9주(州)에 각 2명씩, 115개의 군에는 각 1명씩 두었다.닫기을 두었다. 주(州)에는 두 사람, 군(郡)에는 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태종왕(太宗王)157 태종은 무열왕의 상호(上號)이다(《삼국사기》 권5, 태종무열왕 7년 6월조).닫기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없앴다가 이 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14년 봄 정월에 당나라에서 숙위하던 대나마(大奈麻) 158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0위의 관등으로, 중대나마(重大奈麻)부터 구중대나마(九重大奈麻)까지 9등급으로 분화되었다.닫기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전해 배워 돌아와 새 역법(曆法)159 시간을 구분하고 날짜의 순서를 매기는 방법을 말한다.닫기으로 고쳐 사용하게 하였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당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詔書)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金仁問)161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이 당나라의 수도(경사, 京師)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162 左庶子는 당나라 東宮官衙인 太子左春坊의 최고 관직으로 정원은 2인이고 관품은 正4品上이었다. 《구당서》 권84 열전 劉仁軌傳에 의하면, 그는 總章 3년(670)에 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에 임명되었다고 한다.닫기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雞林道) 대총관(大摠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163 당나라 9寺 중의 하나인 衛尉寺의 최고 관직으로, 정원은 1인이고 관품은 從3品이었다.닫기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황룡사(皇龍寺)165 경북 경주에 있었던 절로 경주에서 가장 컸던 절이기도 하다. 신라 삼보(三寶)의 하나로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사적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진흥왕 14년(553)에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30년(569)에 완공되었다고 하지만, 566년에 준공되었다가 선덕여왕 14년(645)에 완성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닫기의 불전(佛殿)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西兄山)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가리킨다.닫기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167 신라의 고승으로 생몰연도는 알 수 없다. 아버지는 사간(沙干) 재량(才良)이고, 어머니는 남간부인(南澗夫人)이며, 자장(慈藏)의 동생이다.닫기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다. 신라의 승관(僧官)으로 진흥왕 11년(550)에 안장(安藏)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진덕여왕 1년(647)에 1명을 더 두었다. 불교계의 수장(首長)인 국통(國統)의 아래에서 왕실 자문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닫기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封)하였다. 10년에 안승(安勝)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하였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명령을 따라 돌아온다는 것인지, 혹은 땅의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영묘사(靈廟寺)169 선덕여왕 4년(635)에 선덕여왕이 창건하였던 절로, 영묘사(靈妙寺)라고도 한다. 신라에 불교를 전한 아도(阿道)가 과거칠불(過去七佛)이 머물렀던 칠처가람(七處伽藍) 가운데 제5 구나함불(拘那含佛)이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 곳이다. 원래 연못이었는데, 두두리(頭頭里)라는 귀신의 무리가 하룻밤 사이에 창건하였다고도 전한다. 이곳에는 사천왕사(四天王寺)와 함께 양지(良志)의 작품이 가장 많이 있었다. 성덕왕 11년(712)에 김유신(金庾信)의 부인이 이곳에 출가하여 머물렀다고 한다.닫기 앞 길에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阿湌) 170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6위의 관등으로, 아척간(阿尺干)이라고도 한다. 6두품(六頭品)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관등으로, 중아찬(重阿飡)·3중아찬·4중아찬 등으로 점차 분화되었다.닫기설수진(薛秀眞)171 秀眞을 ‘守眞’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46 열전 强首轉 말미에, 《新羅古記》를 인용하여 强首·帝文·良圖·風訓 등과 함께 문장에 뛰어났다고 한다. 그는 성이 薛氏이고 문장에 뛰어났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6두품 출신으로 당에 유학하고 돌아온 사람이 아닐까 한다.닫기의 육진병법(六陣兵法)172 당나라 이정(李靖)이 제갈량(諸葛亮)의 8진법에 기초로 만든 병법(兵法)으로 육화병법(六花陣法)이라고도 한다. 이 병법은 대진(大陣)이 소진(小陣)을 싸고, 대영(大營)이 소영(小營)을 싸며 곡절(曲折) 상대하는 진법이었다.닫기을 보았다.
15년 봄 정월에 구리(銅)로 각 관청 및 주군(州郡)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내려 주었다.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金仁問)173 신라의 장군·외교가로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무왕의 아우이다. 진덕왕 5년(651)에 왕의 명령으로 당나라에 가서 숙위하였고, 653년에 귀국하여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을 맡아 장산성(獐山城)을 쌓았다. 그 뒤에 다시 당나라에 들어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탰으며, 태종무열왕 7년(660)에 신구도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소정방(蘇定方)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도 계속 당나라에 머물렀다. 이어 문무왕 8년(668)에는 귀국하여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다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효소왕 3년(694) 당나라의 수도에서 병사(病死)하였다. 유학에 익숙하였고, 사어(射御)·향악(鄕樂)·예서(隷書)에도 능하였다.닫기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州)와 군(郡)으로 삼았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174 신라 장군인 김진주(金眞珠, ?~662)의 아들이다. 언제 당나라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김진주가 문무왕 2년(662)에 죽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 입당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장에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다.닫기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175 신라 장군으로 생몰연도는 ?~662이다. 선덕여왕 8년(639)에 하슬라주(何瑟羅州)에 설치된 북원경(北原京)의 사신(仕臣)으로 임명되었고, 태종무열왕 6년(659)에는 병부령(兵部令)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을 천존(天存)과 함께 보좌하였으며, 황산(黃山)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사비성(泗沘城)을 함락하는 데 참여하였다. 문무왕 1년(661)에는 김인문(金仁問)·김흠돌(金欽突)과 함께 대당장군(大幢將軍)으로 고구려 정벌에 나아갔다. 그러나 다음해에 남천주총관(南川州摠管) 진흠(眞欽)과 함께 병을 핑계로 백제 부흥군 토벌에 참여하지 않았다가 정사(政事)를 돌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인 풍훈(風訓)은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으로 있다가 신라를 공격하려는 당나라 군사의 향도(嚮導)가 되기도 하였다.닫기가 본국(本國)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176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문무왕 2년(662) 8월조에 의하면, 대당총관 眞珠와 남천주총관 眞欽이 병을 핑계로 나라일을 소홀히 한다는 죄목으로 그들과 그 일족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8년이 지난 문무왕 10년(670)에 진주는 대아찬으로서 모반한 藪世를 제거했다고 하여 살아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진주는 수세를 토벌한 문무왕 10년에서 풍훈이 향도가 된 문무왕 15년 사이에 본국에서 처형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권덕영, 「비운의 신라 견당사들-김인문을 중심으로-」,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5, 1994, 246쪽).닫기, 풍훈(風訓)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177 지금의 경기 파주시 또는 황해도 재령의 재령강(載寧江)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37쪽).닫기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 178 신라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귀당(貴幢) 총관으로 고구려 정벌에 참여하였다. 그 뒤 문무왕 15년(675)에 당나라의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진주(眞珠)의 반란 주도 처벌을 핑계로 풍훈을 향도(嚮導)로 삼아 천성(泉城)으로 쳐들어왔을 때 이를 막아 승전을 거두었다. 특히 매초성(買肖城)에 머물고 있던 당나라 이근행(李謹行)의 20만 대군을 공격하여 여러 병기와 말 등을 크게 거두는 승전의 공을 쌓기도 하였다.닫기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薛仁貴)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戰馬) 1천 필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179 지금의 경기 양주에 자리한 성으로 추정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2쪽).닫기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도망가게 하고는 전마(戰馬) 30,380필을 얻었으며 남겨놓은 병기도 그 정도 되었다.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안북하(安北河)180 지금의 함남 덕원군 북천면을 흐르는 하천을 말한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2쪽).닫기를 따라 관(關)과 성(城)을 설치하였고, 또한 철관성(鐵關城)181 함남 문천군 덕원의 철관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3쪽).닫기을 쌓았다.
말갈(靺鞨)이 아달성(阿達城)182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안협면(安峽面)에 있는 성으로 추정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783쪽).닫기에 들어와 위협하고 노략질하자 성주(城主) 소나(素那)183 신라의 장수로 생몰연도는 ?~675이다. 백성군(白城郡) 사산(蛇山) 출신으로 침나(沈那)의 아들이며 금천(金川)이라고도 불린다. 백제가 멸망한 뒤 한주(漢州) 도독(都督) 유공(儒公)의 요청으로 문무왕의 명령을 받다 아달성(阿達城)에 머물렀다. 문무왕 15년(675)에 아달성의 태수 한선(漢宣)이 성의 백성들에게 성밖의 밭에 나가 베[麻]씨를 뿌리도록 하였는데, 이때 말갈 병사가 갑자기 성을 습격하여 노략질하였다. 소나는 크게 노하여 적에게 돌진하였는데, 적의 화살이 마치 고슴도치같이 꽂혀 쓰러져 죽었다. 그의 죽음을 전하여 들은 문무왕은 눈물을 흘리며 충절에 탄복하고 잡찬(迊飡)의 벼슬을 추증하였다.닫기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184 지금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감악산(紺岳山) 주변의 산성으로 비정하고 있다.닫기을 둘러쌌지만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小守) 185 지방 장관인 소수(少守)와 같다. 제수(制守)라고도 불린다.닫기유동(儒冬)이 죽임을 당하였다.
말갈(靺鞨)이 또한 적목성(赤木城)186 지금의 강원 회양 난곡면 현리 일대에 있는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2쪽).닫기을 에워싸서 무너뜨렸다. 현령(縣令) 187 신라의 지방관으로 모두 201명이었으며, 선저지(先沮知)로부터 사찬(沙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맡았다.닫기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당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188 경북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에 있는 고모산성의 익성(翼城)으로 추정하고 있다.닫기을 둘러싸고 쳐서 빼앗았는데, 현령(縣令)189 신라의 지방관으로 모두 201명이었으며, 선저지(先沮知)로부터 사찬(沙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맡았다.닫기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을 벌여 모두 이겼는데, 6천 4십 7명의 목을 베었고 말 2백 필을 얻었다.
16년 봄 2월에 고승(高僧) 의상(義相)190 신라의 고승으로 생몰연도는 625~702이다. 우리나라 화엄종(華嚴宗)의 개조(開祖)로 성은 김씨(金氏)이며 한신(韓信)의 아들이다. 19세 때 경주의 황복사(皇福寺)에 출가하였고, 그 뒤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다가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수십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그뒤 문무왕 1년(661)에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를 찾아 지엄(智儼)에 수학하였다. 화엄의 정수를 담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과 관음신앙(觀音信仰)을 나타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을 지었다. 신라에 돌아와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 낙산사(洛山寺)를 창건하였고, 문무왕 16년(676)에는 왕명으로 부석사(浮石寺)를 지었다.닫기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191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황산(鳳凰山)에 있는 절로 문무왕 16년(676)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우리나라 화엄종의 종찰(宗刹)로 의상이 당나라에 건너갔을 때 만난 선묘(善妙)가 의상의 귀국과 함께 신라로 와서 부석(浮石)으로 변해 사찰 창건에 도움을 준 이야기가 전한다. 경내에는 여러 국보와 보물 등의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닫기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살별(혜성, 彗星)이 북하(北河)192 쌍둥이 자리에 있는 세 개의 별을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와 적수(積水)193 북하(北河)의 서북쪽에 있는 별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쯤 되었다.
당나라 군사가 와서 도림성(道臨城)194 지금의 강원 통천군 임남면에 있는 성으로 추정하고 있다(이병도, 《국역 삼국사기》 6판, 을유문화사, 1986, 123쪽).닫기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縣令) 195 신라의 지방관으로 모두 201명이었으며, 선저지(先沮知)로부터 사찬(沙飡)까지의 관등이 주로 맡았다.닫기거시지(居尸知)가 죽임을 당하였다.
양궁(壤宮)196 宮의 위치와 규모 및 용도 등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닫기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沙湌) 197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8위의 관등으로, 살찬(薩飡)·사돌간(沙咄干)·사간(沙干)이라고도 부른다.닫기시득(施得)이 수군(병선, 船兵)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재상(宰相) 진순(陳純)198 진순(眞純)이라고도 한다. 신라의 관리로 문무왕 1년(661)에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었고, 문무왕 8년(668)에는 죽지(竹旨)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으로 평양성 공격에서 공을 세웠다.닫기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빌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안석(案席)199 앉을 때 벽에 세우고 몸을 뒤로 기대는 데 쓰는 등받이를 말한다.닫기과 지팡이를 주었다.
17년 봄 3월에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기를 보았다.
비로소 좌사록관(左司祿館)200 우사록관(右司祿館)과 함께 관리의 녹봉(祿俸)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문무왕 17년(677)에 설치되었다. 감(監) 1명, 주서(主書) 2명, 사(史) 4명이 있었다.닫기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所夫里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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