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왕(文武王) 12년~17년


12년 봄 정월에 왕이 장수를 보내서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2월에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쳤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가을 7월에 나라 장수 고간(高侃)이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한 번에 평양(平壤)에 이르러 여덟 곳의 군영(軍營)을 설치하고 머물렀다.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이겼다. 백수성(白水城)에서 5백 보 쯤 되는 곳까지 군사를 전진시켜 군영(軍營)을 설치하였다. 우리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맞서 싸워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高侃) 등이 후퇴하자 추격하여 석문(石門)에 이르러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여 대아찬(大阿湌) 효천(曉川), 사찬(沙湌)  의문(義文), 산세(山世), 아찬(阿湌) 능신(能申), 두선(豆善), 일길찬(一吉湌) 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등이 죽임을 당하였다.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4,360보(步)였다.

9월에 살별(혜성, 彗星)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났다.

왕이 지난번에 백제가 나라에 가서 하소연하여 군사를 요청해 우리를 쳤을 때, 일의 형세가 급하게 되어 황제에게 사실을 아뢰지 못하고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쳤다. 이 때문에 나라의 조정에 죄를 얻게 되었다. 마침내 급찬(級湌) 원천(原川)과 나마(奈麻) 변산(邊山)을 붙잡아 머물게 하였던 병선(兵船) 낭장(郞將) 겸이대후(鉗耳大侯), 내주(萊州) 사마(司馬) 왕예(王藝), 본열주(本烈州) 장사(長史) 왕익(王益), 웅주도독부(熊津都督府) 사마(司馬) 예군(禰軍), 증산(曾山) 사마(司馬) 법총(法聰), 그리고 군사 170명을 보냈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려 죄를 빌었다.

“신(臣) 아무개는 죽을 죄를 짓고서 삼가 아룁니다. 옛날에 신이 위급하여 일이 마치 거꾸로 매달린 것 같았을 때 멀리서 들어서 건지는 은혜를 입어 겨우 찢어 죽는 것을 면하였습니다. 몸을 가루로 만들고 뼈를 바순다고 하더라도 큰 은혜에 보답하기는 부족하고, 머리를 깨뜨리고 티끌처럼 재를 만든다고 하더라도 어찌 자애로운 도움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깊은 원한이 있는 백제는 우리 나라에 가까이 다가와 황제의 군사를 끌어들여 신을 없애서 치욕을 갚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파멸의 상황에 겨를이 없어서 스스로 처지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흉악한 역적의 이름을 쓰게 되어 마침내 용서받기 어려운 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이 사실과 뜻을 아뢰지 못하고 먼저 형벌에 따라 죽임을 당한다면, 살아서는 천자의 명령을 거스른 신하가 되고 죽어서는 은혜를 저버린 귀신이 될까 두렵습니다. 삼가 일의 내용을 기록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잠시라도 귀기울여 들으셔서 근본 이유를 밝게 살펴주소서. 신은 전대(前代) 이래로 조공이 끊기지 않게 하였지만 최근에 백제가 두 번씩이나 조공을 어지럽게 하여 마침내 황제의 조정으로 하여금 조서(詔書)를 내고 장수에게 명령하여 신의 죄를 꾸짖게 하였으니, 죽어도 오히려 형벌에 남음이 있어서 남산(南山)의 대나무로도 신의 죄를 모두 기록할 수 없고 포사(褒斜)의 수풀로도 신의 죄를 물을 형틀을 만들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종묘와 사직을 웅덩이와 연못으로 만들고 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더라도 일의 정황을 듣고서 판단을 내려주신다면 달게 여기며 죽임을 받아 들이겠습니다. 신은 관을 실은 수레를 옆에 두고서 진흙을 바른 머리가 아직 마르지 않은 채 피눈물을 흘리며 조정의 처분을 기다려 삼가 형벌의 명령을 따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황제 폐하께서는 밝으심이 해와 달과 같아 용서의 빛이 굴곡진 곳까지 밝게 비추고, 덕은 천지와 하나되어 동물과 식물이 모두 양육의 은혜를 입었으며,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은 멀리 곤충에게까지 미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어짊은 날짐승과 물고기에까지 흘러내렸습니다. 만일 복종하면 놓아주는 용서를 내리시고 특별히 허리와 머리를 보전하게 하는 은혜를 내려 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그 때가 오히려 태어난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바라고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감히 품은 바를 말씀드리며 칼에 엎드려 죽을 생각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삼가원천(原川) 등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려 죄의 용서를 빌며 엎드려 칙명에 따르고자 합니다. 아무개는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며 죽을 죄를 지었고 또 지었습니다.” 아울러 은 3만 3천 5백 푼(分), 구리 3만 3천 푼, 침(針) 4백 개, 우황(牛黃) 1백 2십 푼, 금 1백 2십 푼, 40승포(升布) 6필, 30승포(升布) 6십 필을 바쳤다.

이 해에 곡식이 귀하여 사람들이 굶주렸다.

13년 봄 정월에 커다란 별이 황룡사(皇龍寺)와 재성(在城) 사이에 떨어졌다.

강수(强首)에게 벼슬을 내리고 사찬(沙湌)으로 삼아 해마다 조(租) 2백 섬을 주었다.

2월에 서형산성(西兄山城)을 늘려 쌓았다.

여름 6월에 호랑이가 대궁(大宮) 뜰에 들어왔기에 죽였다.

가을 7월 1일에 유신(庾信)이 죽었다.

아찬(阿湌) 대토(大吐)가 반란을 꾀하여 나라에 붙으려고 하였는데, 꾀한 일이 새어나와 목이 베여지는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을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

8월에 파진찬(波珍湌) 천광(天光)을 중시(中侍)로 삼았다.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늘려 쌓았다.

9월에 국원성(國原城) 옛날의 완장성(薍長城)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또는 질암성(迭巖城) 달함군(達含郡)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을 쌓았다.

왕이 대아찬(大阿湌) 철천(徹川) 등을 보내어 병선(兵船) 1백 척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지키게 하였다.

나라 군사가 말갈(靺鞨)과 거란(契丹)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邊)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의 목을 베었고, 나라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왕봉(王逢) 두 강에 빠져 죽은 자는 가히 셀 수가 없었다.

겨울에 나라 군사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공격하여 항복을 시켰고,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는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공격하여 없어지게 하였다.

비로소 외사정(外司正)을 두었다. 주(州)에는 두 사람, 군(郡)에는 한 사람이었다.

일찍이 태종왕(太宗王)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없앴다가 이 때 이르러 다시 두었다.

14년 봄 정월에 나라에서 숙위하던 대나마(大奈麻) 덕복(德福)이 역술(曆術)을 전해 배워 돌아와 새 역법(曆法)으로 고쳐 사용하게 하였다.

왕이 고구려의 배반한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에 살면서 사람을 시켜 지키게 하자, 나라 고종(高宗)이 크게 화를 내어 조서(詔書)로 왕의 관작을 깎아 없앴다. 왕의 동생인 우효위원외대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金仁問)나라의 수도(경사, 京師)에 있었는데, 신라의 왕으로 세우고 귀국하게 하였다.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雞林道) 대총관(大摠管)으로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이 보좌하게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와서 쳤다.

2월에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날짐승과 기이한 짐승을 길렀다.

가을 7월에 큰 바람이 황룡사(皇龍寺)의 불전(佛殿)을 무너뜨렸다.

8월에 서형산(西兄山)아래에서 군대를 크게 사열하였다. 

9월에 의안법사(義安法師)를 대서성(大書省)으로 삼았다.

안승(安勝)을 보덕왕(報德王)으로 봉(封)하였다. 10년에 안승(安勝)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였는데 지금 다시 봉하였다. 보덕(報德)이란 말이 명령을 따라 돌아온다는 것인지, 혹은 땅의 이름인지 알 수 없다.

영묘사(靈廟寺) 앞 길에 가서 군대를 사열하고, 아찬(阿湌)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보았다.

15년 봄 정월에 구리(銅)로 각 관청 및 주군(州郡)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내려 주었다.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렸다. 인궤는 병사를 이끌고 돌아가고, 조서(詔書)로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왕은 사신을 보내 특산물을 바치고 또한 사죄하였다. 황제는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 김인문(金仁問)은 오는 길에 되돌아갔는데,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고쳐서 봉하였다. 그러나 백제 땅을 많이 빼앗기에 마침내 고구려 남쪽 경계까지 주(州)와 군(郡)으로 삼았다. 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

가을 9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숙위학생(宿衛學生)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本國)에서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으므로, 풍훈(風訓)을 길을 이끄는 사람으로 삼아 천성(泉城)을 쳐들어왔다. 우리 장군인 문훈(文訓) 등이 맞서 싸워 이겼는데, 1천4백 명의 목을 베고 병선(兵船)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薛仁貴)가 포위를 풀고 도망가자 전마(戰馬) 1천 필도 얻었다.

29일에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 명을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도망가게 하고는 전마(戰馬) 30,380필을 얻었으며 남겨놓은 병기도 그 정도 되었다.

사신을 보내 나라에 들어가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城)을 설치하였고, 또한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말갈(靺鞨)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위협하고 노략질하자 성주(城主) 소나(素那)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나라 군사가 거란(契丹)과 말갈(靺鞨) 군사와 함께 와서 칠중성(七重城)을 둘러쌌지만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죽임을 당하였다.

말갈(靺鞨)이 또한 적목성(赤木城)을 에워싸서 무너뜨렸다. 현령(縣令) 탈기(脫起)가 백성을 거느리고 막아 지키다가 힘이 다하여 모두 죽었다.

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을 둘러싸고 쳐서 빼앗았는데, 현령(縣令)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우리 군사가 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싸움을 벌여 모두 이겼는데, 6천 4십 7명의 목을 베었고 말 2백 필을 얻었다.

16년 봄 2월에 고승(高僧) 의상(義相)이 왕명을 받들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였다.

가을 7월에 살별(혜성, 彗星)이 북하(北河)와 적수(積水)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길이가 6~7보쯤 되었다.

나라 군사가 와서 도림성(道臨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는데, 현령(縣令) 거시지(居尸知)가 죽임을 당하였다.

양궁(壤宮)을 지었다.

겨울 11월에 사찬(沙湌) 시득(施得)이 수군(병선, 船兵)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소부리주(所夫里州) 기벌포(伎伐浦)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은 22번의 싸움을 벌여 이기고서 4천여 명을 목베었다.

재상(宰相) 진순(陳純)이 벼슬에서 물러나기를 빌었지만 받아들이지 않고 안석(案席)과 지팡이를 주었다.

17년 봄 3월에 강무전(講武殿) 남문(南門)에서 활쏘기를 보았다.

비로소 좌사록관(左司祿館)을 설치하였다.

소부리주(所夫里州)에서 흰 매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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