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종(穆宗) 6년~12년
6년(1003) 봄 정월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옛날 우리 태조(太祖)께서 전쟁[干戈]을 이미 끝내고 학교[庠序]를 크게 여니, 왕실(王室)의 멀고 가까운 자손(子孫)들이 책을 읽으며 도(道)를 물었고, 누추한 집의 미천한 자제(子弟)도 책상을 짊어지고 스승을 좇았으므로 여러 대를 거친 이래 재주 있는 선비가 모자라지 않았다. 내가 외람되게 보잘것없는 몸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크고 어려운 일을 지키게 되니, 참된 유학(儒學)의 도를 널리 보급하여 지나간 성인(聖人)의 생각을 숭상하려 한다. 다만 학생을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 많지 않고, 옛 학문을 좋아하여 열심히 배우려는 사람도 대체로 적다. 여러 고을에 있는 학교[黌校] 중에 혹은 사소한 이익으로 인하거나 혹은 이단(異端)을 따라가기도 하므로, 스승의 가르침은 점점 더 게을러지고 후학(後學)의 성적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제 어진 이를 받아들이는 문호(門戶)를 열고서 착한 이를 등용하는 길을 넓히려고 하니, 3경(京)과 10도(道)의 여러 관리는 내가 타이르는 말을 체득(體得)하여 예업(藝業)을 권장하도록 하라. 문학(文學)·유학(儒學)·의학(醫學)·점복(占卜)을 배우려는 무리에게 명령하니 경전(經典)에 밝고 널리 통달한 스승에게 나아가도록 하고, 박사(博士)와 선생 중에 생도(生徒)를 장려하고 권면(勸勉)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름을 적어 보고하라.”라고 하였다.
2월 신유(辛酉). 교서(敎書)를 내려 이르기를,
“요(堯)임금의 당(唐)은 고신씨(高辛氏)의 아들 8명[八元]의 도움으로 잘 다스려졌고 주(周)는 무왕(武王)의 신하 10명[十亂]으로 흥성(興盛)하였으니, 나라를 다스리는 바탕이 되는 것은 오직 어진 사람뿐이다. 나는 어려서 어버이의 가르침을 잃었고 자라서는 스승의 교훈이 없었다. 조정에 임하여 일을 대할 때 오직 두렵고 두려울 뿐이다. 지난해 이래로 여러 번 하늘과 땅에 변괴(變怪)가 나타나고 또 변경(邊境)에 근심이 많으므로, 다만 깊이 자신을 꾸짖는 마음이 깊을 뿐 어찌 감히 남을 탓할 생각이 있겠는가?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해보며 때때로 책서(策書)를 읽어 보았더니, 송공(宋公)이 착한 말을 하니 요망한 별이 물러나 사라졌고, 수(隋)의 임금이 덕정(德政)을 닦자 인근의 도적들이 침략을 쉬었다 한다. 이로써 작은 선행이라도 능히 하늘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킴을 알았다. 자기의 사욕(私慾)을 억누르고 스스로 부지런해야 할뿐 어찌 감히 잘못을 꾸미거나 간언(諫言)을 막아서야 되겠는가? 이제 보니 위로는 재상[台輔]들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官僚)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직간(直諫)하는 말이 없었으며 다만 아첨하는 말만 있을 뿐이다. 아아! 말을 해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내가 마땅히 스스로 부끄러워하겠지만, 나라가 위태로운데도 제대로 붙들지 못하였다면 누가 그 허물을 담당하겠는가? 경관(京官)으로 5품 이상인 자들은 각자 봉사(封事)를 올려 모두 약석(藥石)이 될 만한 말을 진술하여 함께 나라의 일을 돕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 해 태후(太后) 황보씨(皇甫氏)가 김치양(金致陽)과 정(情)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를 왕의 후사(後嗣)로 삼으려고 모의하였고, 대량원군(大良院君) 왕순(王詢)을 핍박하여 승려로 만들었다.
7년(1004) 봄 3월 과거법(科擧法)을 개정하였다.
여름 4월 황주량(黃周亮)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6월 기미(己未). 문하시중(門下侍中) 한언공(韓彦恭)이 죽었다.
겨울 11월 갑인(甲寅). 왕이 호경(鎬京)에 가서 제례(祭禮)를 지냈으며, 장형(杖刑) 이하의 죄를 사면하고 기로(耆老)들을 대접하였으며, 명산[方嶽]과 주진(州鎭)의 신령[神祗]에게 훈호(勳號)를 더하였다.
8년(1005) 봄 정월 동여진(東女眞)이 등주(登州)를 침략하여 주진(州鎭)의 부락(部落) 30여 곳을 불태우자 장수(將帥)를 보내 그들을 막았다.
3월 기유(己酉). 지방관(外官)을 정리하였다.
여름 4월 계유(癸酉). 최충(崔冲)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이 해 송(宋) 온주(溫州)의 문사(文士) 주저(周佇)가 내투(來投)하자 그를 예빈주부(禮賓注簿)로 임명하였다.
9년(1006) 6월 무술(戊戌). 천성전(天成殿)의 치미(鴟尾)에 번개가 내리쳤다. 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하며 스스로를 꾸짖고 사면령을 내렸으며, 효자(孝子)·순손(順孫)·의부(義父)·절부(節婦)들에게 모두 은상(恩賞)을 내리고 국내의 신령들[神祗]에게는 훈호(勳號)를 더하였다. 문무관(文武官) 3품 이상은 훈호(勳號)를 더하고 4품 이하는 품계(品階)를 1급(級)씩 덧붙였으며, 9품 이상으로 벼슬길에 오른 지 만 20년이 된 자는 개정된 관복(官服)을 착용하게 하였다. 또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승려로서 대덕(大德) 이상에게는 법호(法號)를 더하였으며, 60세 이상인 승려는 차등을 두어 승직(僧職)을 더하였다.
이 해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10년(1007) 봄 2월 거란(契丹)이 야율연귀(耶律延貴)를 보내 왕에게 수의보방추성봉성공신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守義保邦推誠奉聖功臣 開府儀同三司 守尙書令) 겸 정사령 상주국(政事令 上柱國)을 더하여 책봉(冊封)하고, 식읍(食邑) 7,000호와 식실봉(食實封) 700호를 더하였다.
진관사(眞觀寺) 9층탑을 창건하였다.
여름 6월 조원(趙元)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가을 7월 무인(戊寅). 평장사(平章事) 한인경(韓藺卿)을 양주(楊州)에, 이부시랑(吏部侍郞) 김낙(金諾)을 섬으로 유배보냈다.
겨울 10월 무신(戊申). 왕이 호경(鎬京)에 행차하여 제례(祭禮)를 지내고 유배형(流配刑) 이하의 죄수를 사면하였으며, 국내의 신령들[神祗]에게 훈호(勳號)를 더하였다. 이 해 호경(鎬京)에 지진(地震)이 일어났다.
11년(1008) 봄 3월 손원선(孫元仙)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겨울 10월 왕이 호경(鎬京)에 가서 제례(祭禮)를 지냈다.
12년(1009) 봄 정월 경오(庚午). 왕이 숭교사(崇敎寺)에 갔다가 돌아오는데, 도중에 폭풍 때문에 일산(日傘) 자루가 부러졌다.
임신(壬申), 왕이 상정전(詳政殿)에 임어(臨御)하여 관등(觀燈)을 하고 있는데, 대부(大府)의 기름 창고에 불이 나고 번져서 천추전(千秋殿)을 태웠다. 왕이 궁궐 건물과 창고가 잿더미가 된 것을 보고 비탄해 하다가 병이 나서 정무(政務)를 보지 않았다.
왕사(王師)와 국사(國師) 두 승려와 태의(太醫) 기정업(奇貞業), 태복(太卜) 진함조(晉含祚), 태사(太史) 반희악(潘希渥), 재신(宰臣)인 참지정사(叅知政事) 유진(劉瑨), 중추원사(中樞院使) 최항(崔沆), 급사중(給事中) 채충순(蔡忠順) 등이 은대(銀臺)에서 직숙(直宿)하였다. 지은대사(知銀臺事) 이주정(李周禎)과 우승선(右承宣) 이작인(李作仁), 폐신(嬖臣)인 좌사낭중(左司郞中) 유충정(劉忠正), 합문사인(閤門舍人) 유행간(庾行簡) 등은 안에서 직숙(直宿)하였다.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과 중랑장(中郞將) 유종(柳琮)·탁사정(卓思政)·하공진(河拱辰)은 근전문(近殿門)에서 늘 직숙(直宿)하였으며 형부상서(刑部尙書) 진적(陳頔)도 안에 들어와 직숙(直宿)하였다. 호부시랑(戶部侍郞) 최사위(崔士威)는 태정문별감(太定門別監)이 되어 모든 궁궐 문을 폐쇄하고 엄중히 경계하면서 오직 장춘문(長春門)과 태정문(太定門)만 열었다. 이어 장춘전(長春殿)과 건화전(乾化殿)에서 구명도량(救命道場)을 열었다.
왕이 여러 날 몸이 편치 않자 늘 내전(內殿)에만 있으면서 여러 신하를 만나기 싫어하였다. 재신(宰臣)들이 매우 두려워하여 침전(寢殿)에 들어가서 문병하기를 요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왕은 채충순(蔡忠順)·최항(崔沆)과 더불어 몰래 후사(後嗣) 문제를 의논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를 보내 신혈사(神穴寺)에서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맞아오게 하였다. 서경도순검사(西京都巡檢使) 강조(康兆)가 무장한 병력[甲卒]을 거느리고 도착하여 드디어 왕을 폐위시킬 음모를 꾀하였다.
2월 무자(戊子). 왕에게 용흥사(龍興寺)나 귀법사(歸法寺)로 나가 있을 것을 요청하였다.
기축(己丑). 햇빛이 붉은 장막을 드리운 것과 같았다. 강조(康兆)의 군사들이 궁문(宮門)으로 마구 들어오자, 왕이 모면할 수 없음을 깨닫고 태후(太后)와 함께 목 놓아 울며 법왕사(法王寺)로 출어(出御)하였다. 잠시 후 황보유의(皇甫兪義) 등이 대량원군(大良院君)을 받들고 도착하여 드디어 왕위에 올렸다. 강조(康兆)는 왕을 폐위시켜 양국공(讓國公)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 김치양(金致陽) 부자(父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였다. 왕이 선인문(宣仁門)으로부터 나올 때에 모시는 신하들이 처음에는 모두 걸어가며 따르다가 여기에 이르자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나타났다. 귀법사(歸法寺)에 도착하자 어의(御衣)를 벗고 음식의 격식을 낮추어 올렸다. 강조(康兆)가 최항(崔沆) 등을 불러 관직을 나누어주자, 왕이 최항(崔沆)에게 이르기를, “요즈음 부고(府庫)에 화재가 일어났는데도 변란이 갑자기 일어났으니, 모두 내가 덕이 없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다시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다만 바라는 것은 시골로 돌아가 늙는 것이니 그대는 새 임금에게 이 뜻을 아뢰고 잘 보좌(輔佐)하도록 하라.”라고 하고 드디어 충주(忠州)로 향하였다. 태후(太后)가 밥을 먹고자 하면 왕이 몸소 소반(小盤)과 사발을 받들었고, 태후(太后)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말고삐를 잡았다. 가다가 적성현(積城縣)에 이르자 강조(康兆)가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인 후 왕이 자결하였다고 보고하였으며, 문짝을 취하여 만든 관에 넣어 객관(客館)에 임시로 안치하였다. 왕은 왕위에 있는 지 12년이었고 나이는 30세였다.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 어려서부터 임금의 도량이 있었고 궁술(弓術)과 기마(騎馬)를 잘 하였다. 술을 즐기고 사냥을 좋아하여 정사(政事)에 뜻을 두지 않았고, 총애하는 자들[嬖倖]만 믿고 가까이하다가 화(禍)를 당하였다. 한 달을 넘겨 적성현(積城縣)의 남쪽에서 화장(火葬)하고 능호(陵號)를 일러 공릉(恭陵)이라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선령(宣靈), 묘호(廟號)를 민종(愍宗)이라 하였는데 모두 강조(康兆)가 찬정(撰定)한 것이다.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통분(痛憤)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현종(顯宗)만 알지 못하다가 거란(契丹)이 죄를 물을 때에야 비로소 이를 알게 되었다. 현종(顯宗) 3년(1012)에 도성(都城)의 동쪽으로 무덤을 옮기고 능호를 고쳐 의릉(義陵)이라 하였으며, 시호를 선양(宣讓), 묘호를 목종(穆宗)이라 하였다. 같은 왕 5년(1014)에 시호에 효사(孝思)를 더하고, 18년(1027)에 위혜(威惠)를 더하였으며, 문종(文宗) 10년(1056)에 극영(克英)을 덧붙이고, 고종(高宗) 40년(1253)에 정공(靖恭)을 더하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기를, “경보(慶父)는 노(魯)에서 예(禮)를 범하였고 여불위(呂不韋)는 진(秦)에 화(禍)을 떠넘겼다. 제(齊) 환공(桓公)이 애강(哀姜)을 죽이고 진시황(秦始皇)은 노애(嫪毐)를 거열(車裂)하였지만, 어찌 그 만세(萬世)를 내려갈 수치(羞恥)에서 구하겠는가? 목종(穆宗)은 옛 일[前轍]을 경계하지 않고 처음에 막는 것을 게을리 하다가 모자(母子)가 함께 재앙을 받았으며 사직(社稷)이 거의 망하는 데 이르렀다. 아아! 목종[宣讓]에게는 불행이었으나 오히려 불행이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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