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12년~14년
12년(993) 봄 3월 을미(乙未).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임금이 된 자는 하늘과 땅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해와 달을 형과 누이로 삼아서 때에 따라 의례(儀禮)를 만들어 효(孝)를 이루고 어버이를 공경해야 한다. 천자(天子)는 7묘(廟)를, 제후(諸侯)는 5묘를 세워 조종(祖宗)의 공덕[祖功宗德]을 기리며 좌소우목(左昭右穆)을 정하니, 큰 효도는 신명(神明)을 감동시키고 지극한 덕은 하늘과 땅을 움직인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는 큰 성인(聖人) 뒤에 또 성인이 나시어 그 밝음을 이어 거듭 밝힘으로써 큰 것을 지키고 공을 정하였으니, 고금(古今)을 뛰어넘는 일이다. 짐이 외람되게 고명(顧命)을 받아 왕위를 이어 지키게 되면서, 조선(祖先)을 받들어 따를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였다. 이에 작년부터 새로 종묘[閟宮]를 짓기 시작하여 건물이 이미 완공되었다. 제사[蒸嘗]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니, 은(殷)은 열두 명의 임금을 6대(代)로 삼았고 당나라는 열 명의 황제로 9실(室)을 삼았다. 『진서(晉書)』에서 이른 바, ‘형제를 곁에 함께 모시는 것은 예법(禮法)을 바꾼 것이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신주의 수대로 묘실(廟室)을 세워야지 묘실의 수로 신주를 한정해서는 안될 것이다. 형제를 한 줄에 모셔도 된다는 것은 예문(禮文)에도 있으니 마땅히 혜종(惠宗)·정종(定宗)·광종(光宗)·경종(景宗)의 네 임금은 한 사당에 같이 모셔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름 5월 서북계(西北界)의 여진(女眞)에서 거란(契丹)이 군사를 동원하여 침략하려 계획한다고 알려 왔으나, 조정(朝廷)에서 의논하기를 그들이 우리를 속인 것으로 여기고 방비태세를 갖추지 않았다.
가을 8월 갑술(甲戌). 이유현(李維賢)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이 달에 여진(女眞)이 거란(契丹)의 군대가 침략하였음을 다시 알려오자, 비로소 일의 위급함을 알고 각 도(道)에 병마제정사(兵馬齊正使)를 나누어 보냈다.
겨울 10월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상군사(上軍使)로, 내사시랑(內史侍郞) 서희(徐熙)를 중군사(中軍使)로, 문하시랑(門下侍郞) 최량(崔亮)을 하군사(下軍使)로 임명하여 북계(北界)에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란(契丹)을 방어하게 하였다.
윤10월 정해(丁亥). 왕이 서경(西京)으로 가서 안북부(安北府, 안주)까지 나아가 머물렀는데, 거란(契丹)의 소손녕(蕭遜寧)이 봉산군(蓬山郡)을 공격하여 파괴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더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서희(徐熙)를 보내 화의(和議)를 요청하니 소손녕(蕭遜寧)이 침공을 중지하였다.
13년(994) 봄 2월 소손녕(蕭遜寧)이 글을 보내 이르기를,
“요즈음 받든 우리 황제의 명령[宣命]에 말씀하시길, ‘다만 고려(高麗)와는 좋은 우호관계가 일찍부터 통하였고 국경이 서로 맞닿았다. 비록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김(事大)에 진실로 합당한 규범과 의례가 있지만, 그 처음과 끝을 살펴본다면 모름지기 오래도록 남겨야 한다. 만약 미리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사신이 도중에 막힐까 걱정이다. 따라서 고려와 서로 상의하여 길의 요충지에 성곽과 해자를 쌓아 만들도록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압록강(鴨綠江) 서쪽 마을에 5개의 성을 쌓아 만드는 것이 어떨까 하여 3월 초에 축성할 곳으로 가서 성 쌓는 공사를 착수할까 합니다. 삼가 요청하건대 대왕(大王)께서 미리 지휘하여 안북부(安北府)로부터 압록강 동쪽에 이르기까지 총 280리 사이에 적당한 지역을 돌아다니고 거리의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게 하시고, 아울러 성을 쌓을 일꾼들을 보내 같이 시작할 수 있도록 명령하여 주시며, 쌓을 성의 수가 도합 몇 개인지 빨리 회보(回報)하여 주십시오. 귀한 것은 거마(車馬)가 오가며 통함으로써 길이 조공(朝貢)할 수 있는 길을 여는 것과 영원히 우리 조정을 받들어 스스로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마련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거란(契丹)의 통화(統和) 연호를 처음 사용하였다.
여름 4월 갑진(甲辰). 태묘(太廟)에 체제(禘祭)를 지내고, 대종(戴宗)의 신위를 제5실(室)에 옮겼다. 공신(功臣) 배현경(裴玄慶)·홍유(洪儒)·복지겸(卜智謙)·신숭겸(申崇謙)·유금필(庾黔弼)을 태조(太祖)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하였고, 박술희(朴述熙)·김견술(金堅術)을 혜종(惠宗)의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왕식렴(王式廉)을 정종(定宗)의 묘정에 배향하였고 유신성(劉新城)·서필(徐弼)을 광종(光宗)의 묘정에 배향하였으며, 최지몽(崔知夢)을 경종(景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대사면령을 내리고 문무(文武) 관리에게는 관작(官爵)을 1급씩, 집사자(執事者)에게는 2급씩 하사하였으며, 백성에게는 사흘 동안 큰 잔치[大酺]를 베풀었다.
이 달에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를 거란(契丹)에 보내, 표문(表文)을 받들고 가서 거란(契丹)의 정삭(正朔)을 행하겠다고 알리고 포로[俘口]의 송환(送還)을 요청하였다.
6월 원욱(元郁)을 송(宋)에 보내 군사를 빌려 작년 전역(戰役)에 대하여 보복할 계획을 알렸다. 송(宋)은 북방 국경이 겨우 편안해졌는데 가벼이 움직이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다만 후한 예(禮)만 보이고 돌려보냈다. 이때부터 송(宋)과의 외교관계를 끊었다.
가을 8월 계사(癸巳). 왕이 시험장에 임어(臨御)하여 복시(覆試)를 시행하고, 최원신(崔元信)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이 해 거란(契丹)이 숭록경(崇祿卿) 소술관(蕭述管)과 어사대부(御史大夫) 이완(李涴) 등을 보내 조서(詔書)를 가져와 안무(按撫)하고 효유(曉諭)하였다.
이승건(李承乾)을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로 임명하였다가 곧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대신하게 하였다.
사신을 거란(契丹)에 보내 기악(妓樂)를 바쳤으나 이를 받지 않았다.
14년(995) 봄 2월 기묘(己卯).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천문(天文)을 보아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人文)을 보아 천하(天下)를 올바르게 다스릴 수 있으니 글이 지닌 시의(時義)가 크도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글을 업(業)으로 삼은 선비들이 겨우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각자 공무(公務)에 끌려 다니다가 원래의 업을 그만두는 것이다. 그 나이가 50세 이하로서 아직 지제고(知制誥)를 거치지 못한 자들은 한림원(翰林院)에서 출제하여 매달 시(詩) 3편과 부(賦) 1편씩 올리도록 하고, 지방의 문관(文官)은 스스로 시 30편과 부 1편씩 지어 연말[歲抄]에 계리(計吏)에게 부치도록 하며, 한림원(翰林院)에서 품제(品題)하여 보고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 달에 이주정(李周禎)을 거란(契丹)에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으며, 또 매(鷹)를 바쳤다.
여름 4월 정축(丁丑). 내사시랑(內史侍郞) 최량(崔亮)이 죽었다.
5월 무오(戊午). 교서(敎書)를 내려 말하기를,
“요(堯)·순(舜)의 제도와 주(周)·한(漢)의 의례는 모두 제후(諸侯)의 명칭을 바르게 정함으로써 임금[一人]의 경사(慶事)를 길이 받들었다. 지금 여러 관사(官司)를 보면 체계[事體]는 비록 예전(禮典)을 따랐다고는 하나, 걸어 붙인 이름[額名]은 자못 임시로 부르는 것이 있다. 일상의 법규[典常]를 상고(詳考)하여 옳고 그름을 나누고, 맞지 않는 이름[假號]은 모두 제거함으로써 널리 통용될 규범을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가을 9월 경술(庚戌). 10도(道)를 획정하였다.
신유(辛酉), 복시(覆試)를 치러 이자림(李子琳)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이 해에 이지백(李知白)을 거란(契丹)에 보내 방물(方物)을 바쳤다.
어린 아이 10인을 거란(契丹)에 보내 거란어(契丹語)를 익히게 하였다.
좌승선(左承宣) 조지린(趙之遴)을 거란(契丹)에 보내 청혼(請婚)하니, 동경유수(東京留守) 부마(駙馬) 소항덕(蕭恒德)의 딸이 혼인할 것을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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