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成宗) 15년~16년
15년(996) 봄 3월 거란(契丹)이 한림학사(翰林學士) 장간(張幹)과 충정군절도사(忠正軍節度使) 소숙갈(蕭熟葛)을 보내 왕을 책봉(冊封)하며 말하기를,
“한(漢)은 호한(呼韓)을 중히 여겨 그 지위를 열후(列侯)나 왕의 위에 두었고, 주(周)는 웅역(熊繹)을 존중하여 대대로 땅을 봉하였다. 내가 옛날을 본받아 임금이 되어 먼 나라에까지 은혜를 넓히려고 한다. 동쪽 바다 저 바깥에 있으며 북극(北極)에 순응하여 와서 왕이 되어 세월이 여러 번 옮겨가도 산 넘고 물 건너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실제로 책봉하는 의례(儀禮)를 거행하여 내부(內附)해 온 정성을 표창해야 할 것이다. 이에 옛날부터 전한 법식을 취하여 제왕이 내리는 예수(禮數)를 공경스럽게 베풀고자 한다. 아아! 그대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치(王治)는 그 땅이 메기가 사는 골짜기[鯷壑, 고려의 별칭]에 있으면서 다른 나라들[蕃隅]을 위세로 눌렀다. 선인(先人)의 뛰어난 공훈(功勳)을 이어받아 군자(君子)의 옛 나라를 다스리니, 글은 예법(禮法)이 있으며 지혜는 만물이 변화하는 세세한 부분도 다 알았다. 사대(事大)의 의례가 능히 온전하였으며 조절하는 요체(要體)가 모두 도왔다. 압록강(鴨綠江)이 서쪽 경계이나 일찍이 그 험한 지세를 믿는 마음이 없었으며, 황제가 있는[鳳扆] 북쪽을 우러러보며 때를 맞추어 조공(朝貢)을 보냈다. 그대의 충성과 공경함을 말하고 생각하자면 마땅히 높은 관작(官爵)에 봉하여 1품의 귀한 자리에 올리고 바로 홀로 앉는 영예로운 직위를 받아야 한다. 이에 국왕의 작위를 주어 더욱 나라의 은혜를 나타내려고 그대를 책봉하여 개부의동삼사 상서령 고려국왕(開府儀同三司 尙書令 高麗國王)으로 삼는다. 아아! 동해(東海)와 태산(泰山)의 바깥 지역에서는 오직 그대만이 홀로 존귀하며, 진한(辰韓)과 변한(卞韓)의 지역은 오직 그대만이 온전히 가지는 것이다. 이 부귀(富貴)를 지켜 나가면서 저 가득 차 기울음을 경계할 것이며, 소인(小人)의 꾀를 쓰지 말고 큰 임금의 명령을 어기지 마시오. 그대의 일을 공경히 닦음으로써 우리 조정(朝廷)의 법에 합치되도록 하고, 태평성대(太平聖代)에 같이 올라 큰 명령을 드날린다면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장간(張幹) 등이 개경(開京) 서쪽 교외에 이르러 단(壇)을 쌓고 책명(冊命)을 전하니, 왕이 예를 갖추어 책명을 받고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렸다.
한언경(韓彦卿)을 거란(契丹)에 보내 폐백(幣帛)을 바쳤다.
여름 4월 신미(辛未). 철전(鐵錢)을 주조(鑄造)하였다.
가을 7월 을사(乙巳). 왕욱(王郁)이 사수현(泗水縣)에서 죽었다.
겨울 12월 정사(丁巳). 곽원(郭元) 등을 급제(及第)시켰다.
16년(997) 가을 8월 을미(乙未). 왕이 동경(東京)에 가서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고 호종(扈從)한 신료(臣僚)와 군사(軍士)들에게 차등 있게 물품을 하사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에게 각각 훈계(勳階)를 더하고 의부(義夫)·절부(節婦)·효자(孝子)·순손(順孫)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워주고 물품을 하사하였다. 드디어 사면령을 반포하였다.
9월 드디어 왕이 흥례부(興禮府)로 가서 태화루(太和樓)에 임어(臨御)하여 여러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바다 속에서 큰 물고기(大魚)를 잡았다.
왕이 병들었다.
기사(己巳). 왕이 동경(東京)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겨울 10월 무오(戊午). 왕의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개령군(開寧君) 왕송(王誦)을 불러 친히 맹세의 말[誓言]을 내려 왕위를 전한 후에 내천왕사(內天王寺)로 거처를 옮겼다. 평장사(平章事) 왕융(王融)이 사면령을 반포(頒布)하자고 청하였으나, 왕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어찌 죄 있는 자들을 풀어주면서까지 억지로 목숨 늘리는 것을 구하겠는가? 또 나의 뒤를 이은 사람이 무엇으로 새로운 은혜를 펴리오.”라고 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훙서(薨)하니 나이는 38세이고, 왕위에 있은 지 16년이었다. 시호(諡號)를 문의(文懿)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이라 하였으며, 남쪽 교외에 장사지내고 능호(陵號)을 강릉(康陵)이라 하였다. 목종(穆宗) 5년(1002)에 시호에 강위(康威)를 더하고, 현종(顯宗) 5년(1014)에 장헌(章獻)을 더하였으며, 같은 왕 18년에 광효(光孝)를 더하고, 문종(文宗) 10년(1056)에 헌명(獻明)을 더했고, 고종 40년(1258)에는 양정(襄定)을 덧붙였다.
이제현(李齊賢)이 찬술(贊)하여 말하기를,
“성종(成宗)은 종묘(宗廟)를 세우고 사직단(社稷壇)을 설치하였으며, 교육 재정[贍學]을 확보하여 선비를 양성하고 복시(覆試)를 시행하여 어진 이를 구하였다. 지방 수령을 독려(督勵)하여 백성을 구휼(救恤)하였고, 효자(孝子)와 절부(節婦)에게 선물을 하사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였다. 매번 손수 써서 내린 편지마다 말뜻이 간곡하였으며 백성의 풍속을 올바르게 바꾸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거란(契丹)이 우리나라를 집어삼켜 씹어 먹을 뜻이 있어 장수를 보내 침략해오자, 일찌감치 서경[西都, 평양]에 가서 안북부(安北府)까지 진군(進軍)하였으니 곧 구준(寇準)이 전연(澶淵)에서 보인 계책(計策)이었다. 당시 방어선[關防]을 절령(岊嶺)으로 옮기고 쌓아둔 곡식을 대동강(大同江)에 버리려고 하였던 것은 당시 어리석은 신하들의 의논일 뿐이지 반드시 성종의 본래 뜻은 아니었다. 일찍이 만일 최승로(崔承老)의 글을 보고 기뻐하며 그 뜻을 풀어보았다면, 허상(虛像)을 버리고 실질(實質)에 힘쓰며, 옛 것을 좋아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이치를 구하고, 행함에 게으름이 없으면서 빨리 가고자 함을 경계하며,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얻어 자기로 미루어 남에게 이를 수 있고, 제(齊)가 변하여 노(魯)에 이르고 노가 변하여 왕도(王道)에 이르렀던 것을 바랄 수 있었다. 소손녕(蕭遜寧)이 다투어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지 않는다는 무함(誣陷)으로 명분 없는 군대를 일으켰겠는가? 이지백(李知白)이 어찌 감히 고유의 풍속[土風]을 고치지 않는 것을 적을 물리치는 계책으로 삼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아직 채 늙기도 전에 후계자[繼嗣]를 세운 것은 국가를 위한 생각으로 가장 잘한 일이었으며, 죽음에 다다라서도 사면령 내리기를 아낀 것은 사생(死生)의 이치에 통달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른바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불어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아! 현명하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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