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천여년 전 서울 도심에 조성한 마애부처님
문명대 교수, 1100년 전후인
고려 초 남경(南京) 건설하면서
이를 수호하고자 조성 추정
북악산길 도로개설로 인해
수맥 끊기고 도로확장 공사로
곳곳에 균열발생 보존대책 요구
북한산의 지산인 안암산 바위에 천년의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모습.
천만 인구에 육박하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세계적인 도시다. 거대한 국립공원인 북한산과 한강을 끼고 있어 산과 강이 있는 서울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다. 이러한 서울 도심중심지에 조성한 지 천년이 되어가는 마애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경하면서도 경이롭다.
그중 한 곳인 북한산의 지산인 안암산 바위에 조성한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을 찾아갔다. 지하철 6호선 안암역에 내려 개운사 부속암자인 보타사(성북구 개운사길 60-46)로 향한다. 이곳은 고려대학교와 인접한 지역이라 주변은 원룸이 즐비하다.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대학생들로 보이는데 외국인들도 상당히 눈에 띈다. 중국어를 구사하는가 하면 러시아어도 들리고, 인도어도 들리고, 영어도 들린다.
비가 오려는 음산한 가을 그윽한 날 찾아서인지 잔뜩 찌푸린 날씨는 회색 도시의 을씨년스러움을 더했다. 예전 중앙승가대학이 자리했던 개운사를 지나 우측으로 들어가니 대원암이라는 암자가 나온다. 이곳은 근대 한국불교의 교육장으로서의 역사가 깊은 곳이다.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에는 조선불교계의 가장 높은 어른인 교정(敎正, 요즘의 종정)을 맡았던 박한영스님이 대원불교강원 강주로 있으면서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교장을 맡아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인연 맺은 스님들로는 만해스님을 비롯해 청담, 운허, 운기스님과 최남선, 정인보, 서정주, 이병기, 신석정, 조지훈, 김달진 등 시대의 선각자들이 즐비하다. 특히 이곳에서는 탄허스님이 화엄경 80권을 번역해 <신화엄경합론>을 펴낸 곳이기도 하다.
상전벽해가 된 대원암 뒤편에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이 암벽에 자리하고 있다. 사찰정비 공사로 진입이 힘들었다. 가설공사를 해 놓은 계단을 우회해 걸어 올라 보타사에 도착했다. 단풍이 잎을 떨군 어수선한 보타사는 주변정리로 분주했다. 사찰 마당에서조차 바닥을 다지는 기계소리가 요란했고, 곳곳에 널브러진 공사자재가 어수선했지만 사찰 정면 암벽에 당당하게 좌정한 마애보살좌상은 방문객을 압도했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1992년 6월 서울문화사학회가 정기답사 때 학계에 보고됐다.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 각각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공식으로 요청해 서울시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가 2014년 7월에 보물로 승격했다.
높이 5m에, 폭이 4.3m나 되는 거대한 이 마애불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양쪽에는 구슬을 꿴 듯한 영락이 귀걸이처럼 늘어져 있다.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통통하고 갸름한 상호는 조성 당시인 고려시대 장인의 후덕한 모습을 닮았다. 이마는 좁으나 양미간에는 동그란 백호를 도드라지게 표현해 옹졸해 보이지 않는다.
활처럼 휘어진 눈썹과 약간 치켜올린 긴 눈은 노란 바탕에 검은 눈동자가 조금은 날카롭지만 위엄이 느껴지고, 오똑한 코와 적당한 콧방울이 어우러져 당당해 보인다. 상호와 비례가 적당한 인중은 뚜렷하고 미소를 띌듯말듯한 입 모양은 얼굴 전체에 비해 조금 작게 표현해 무덤덤하지만 속정깊게 중생을 굽어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불신(佛身)은 암벽 면을 따라 자연스럽게 새겼는데 양어깨를 덮은 천의(天衣)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가슴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다. 길상좌를 취한 큼직한 두 발은 옷 밖으로 드러냈으며, 발목 주변에만 사선 주름을 간결하게 처리했고 나머지 부분은 여백으로 남아 있다.
이 마애불을 연구한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옥천암 마애불과 함께 서울의 쌍벽을 이루는 마애존상이자 고려시대 남경(南京)을 수호하고자 조성한 마애제석천상”으로 보았다. 문 교수는 “관음보살상은 손에 보병(寶甁) 혹은 부들가지가 있어야 하고 보관에 불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다”는 입장이다. 특히 문 교수는 “마애불 오른쪽 명문에 ‘도리천’ 이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어 대게 1100년 전후인 고려 초 숙종 때인 1090년 경부터 1150년 경까지 남경을 건설하면서 조성한 마애존상으로 본다”고 밝혔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 상호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왕실을 지켜주는 제석천은 삼국시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왕실 안에 내(內)제석원이 있었고 왕실 밖에 외(外)제석원이 있었는데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왕실 밖인 남경을 지켜주기 위해 조성했을 것으로 보았다. 남경(수도 개성의 남쪽)인 서울의 경복궁을 중심으로 북악산 서북쪽 끝에 여성적인 모습이 보이는 옥천암 마애불을 조성하고, 대척점인 동북쪽에 남성적인 보타사 마애불을 조성해 남경을 수호하려 했다는 설이다.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일제강점기에는 칠성암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조선시대 말에 백색의 호분을 발라 관음신앙의 성격이 가미되었는데 ‘보타사(普陀寺)’라는 사찰명은 여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천년세월을 지켜온 보타사 마애보살좌상은 올해 들어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음이 드러났다. 과거에는 마애보살좌상을 친견하고 약수를 마셨다고 했는데 지금은 뒤편에 개설된 북악산길 도로로 인해 수맥이 끊기고 1999년 도로확장을 위한 암벽 발파 공사로 인해 상호와 목부분까지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보존대책이 요구되고 있다. 중생들을 어루만져 준 마애부처님을 이제는 중생들이 보호해 주어야 할 때가 됐다.
여태동 기자 [불교신문 37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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