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상(朴堤上)


박제상(朴堤上) 혹은 모말(毛末)은 시조(始祖)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고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세손이다. 할아버지는 아도(阿道) 갈문왕(葛文王)이고, 아버지는 파진찬(波珍湌) 물품(勿品)이다. 제상(堤上)삽량주간(歃良州干)으로 임금을 섬겼다.

이보다 앞서 실성왕(實聖王) 원년 임인(壬寅, 402)에 왜국(倭國)과 강화(講和)하였는데, 왕(王)나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볼모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은 일찍이 나물왕(奈勿王)이 자기를 고구려(髙句麗)에 볼모로 보낸 것을 원망하여, 그의 아들에게 감정을 풀고자 하는 생각이 있었다. 때문에 거절하지 않고 미사흔(未斯欣)을 보냈다.

또 11년 임자(壬子, 412)에는 고구려(髙句麗) 또한 미사흔(未斯欣)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삼고자 하였다. 대왕(大王)은 또 복호(卜好)를 보냈다.

눌지왕(訥祇王)이 즉위하자 말 잘하는 사람을 얻어 가서 맞이해 올 것을 생각하였다. 수주촌간(水酒村干) 벌보말(伐寶靺)과 일리촌간(一利村干) 구리내(仇里迺), 이이촌간(利伊村干) 파로(波老)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말을 듣었다.

불러서 묻기를,

“나(吾)의 동생 둘이 왜(倭)고구려(高句麗) 두 나라에 볼모가 되어, 여러 해가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의 정이라서 그리운 생각이 그치지 않소. 살아서 돌아오기를 원하는데,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세 사람이 똑같이 대답하기를,

“신들은 삽량주간(歃良州千) 제상(堤上)이 강직하고 용감하며 꾀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전하의 근심을 풀어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상(堤上)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고 세 신하의 말을 알려주며 가 주기를 청하였다. 제상(堤上)이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어리석고 변변하지 못하나, 감히 명령을 공경하여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마침내 사신의 예로써 고구려(髙句麗)에 들어갔다. 왕에게 말하기를

“저는 이웃 나라와 교제하는 도는 성실과 신의뿐이라고 들었습니다. 만일 볼모를 서로 보낸다면 오패(五覇)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니, 참으로 말세(末丗)의 일입니다. 지금 우리 임금(寡君)의 사랑하는 아우가 여기에 있은 지 거의 10년이 되었습니다. 우리 임금(寡君)은 형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와준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 대왕(大王)께서 호의로써 그를 돌려보내 주신다면 소 아홉 마리에서 털 하나가 떨어지는 정도(九牛之落一毛)와 같아서 잃을 것이 없으며, 우리 임금(寡君)은 대왕(大王)을 덕스럽다고 함이 한량이 없을 것입니다. 왕은 그것을 생각하여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승락한다.”라고 말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곧 귀국하자, 대왕(大王)이 기뻐하고 위로하며,
“내가 두 아우 생각하기를 좌우의 팔과 같이 하였는데, 지금은 단지 한 쪽 팔만을 얻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제상(堤上)이 아뢰기를,
“저는 비록 열등한 재목이나,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으니 끝내 명령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고구려(髙句麗)는 큰 나라이고 왕 또한 어진 임금(賢君)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신의 한 마디의 말로 고구려(髙句麗) 왕을 깨우칠 수 있었습니다. 인(人)의 경우는 말로 달랠 수 없습니다. 마땅히 거짓 꾀를 써서 왕자를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신이 저 곳에 가면 청컨대 제가 나라를 배반했다는 말을 퍼뜨려, 저들이 듣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妻子)를 보지 않고 율포(浦)에 다다라 배를 띄워 로 향하였다.
그 아내가 그 소식을 듣고 달려 나가 포구(浦口)에 이르러 배를 바라다보며 대성통곡하면서,
“잘 다녀오시오.”라고 하였다. 제상(堤上)이 돌아다보며,
“내(我)가 왕의 명을 받아 적국(敵國)으로 들어가니, 그대는 다시 볼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하였다.

마침내 곧바로 왜국(倭國)으로 들어가서 마치 배반하여 온 자와 같이 하였다. 왕(王)이 그를 의심하였다. 백제인(百濟人)으로 전에 (倭)에 들어간 자가 신라(新羅)고구려(髙句麗)와 더불어 왕의 나라의 침략을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다. (倭)가 마침내 군사를 보내 신라(新羅) 국경 밖에서 정찰하고 지키게 하였다. 마침 고구려(髙句麗)가 쳐들어 와서 (倭)의 순라군(巡邏軍)을 포로로 잡아 죽였다. (王)은 이에 백제인(百濟人)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新羅) 왕이 미사흔(未斯欣)제상(堤上)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제상(堤上)을 정말로 나라를 배반했다고 여겼다.

이에 군사를 내어 장차 신라(新羅)를 습격하려 하였다. 겸하여 제상(堤上)미사흔(未斯欣)을 장수로 임명하고 아울러 그들을 향도(嚮導)로 삼아, 해중(海中) 산도(山島)에 이르렀다. (倭)의 여러 장수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신라(新羅)를 멸망시킨 후에 제상(堤上)미사흔(未斯欣)의 처자(妻孥)를 잡아 돌아오자고 하였다. 제상(堤上)이 그것을 알고 미사흔(未斯欣)과 함께 배를 타고 놀며 고기와 오리(魚鴨)를 잡는 척 하였다. 인(人)이 그것을 보고 다른 마음이 없다고 여겨 기뻐하였다.
이에 제상(堤上)미사흔(未斯欣)에게 몰래 본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다. 미사흔(未斯欣)이,
“제가 장군을 아버지처럼 받들었는데, 어찌 혼자서 돌아가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제상(堤上)은,
“만약 두 사람이 함께 떠나면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미사흔(未斯欣)제상(堤上)의 목을 껴안고 울며 작별을 고하고 귀국하였다.
제상(堤上)은 방 안에서 혼자 자다가 늦게 일어나니, 미사흔(未斯欣)을 멀리 가게 하려고 함이었다. 여러 사람이, “장군은 어찌 일어나는게 늦습니까?”라고 물었다. “어제 배를 타서 몸이 노곤하여 일찍 일어날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곧 나오자, 미사흔(未斯欣)이 도망한 것을 알았다. 마침내 제상(堤上)을 결박하고 배를 달려 추격하였다. 마침 안개가 연기처럼 자욱하고 어둡게 끼어 있어 멀리 바라볼 수가 없었다.
제상(堤上)을 왕이 있는 곳으로 돌려보냈더니, 곧 목도(木)로 유배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사람을 시켜 땔나무에 불을 질러 전신을 불태우고, 후에 그의 목을 베었다.

대왕(大王)이 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 하고 대아찬(大阿湌)을 추증하였고 그 가족에게는 후하게 물품을 내렸다. 미사흔(未斯欣)으로 하여금 제상(堤上)의 둘째 딸을 맞아 아내로 삼게 하여 그에게 보답하였다.

이전에 미사흔(未斯欣)이 돌아올 때, 6부(六部)에 명령하여 멀리까지 나가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곧 만나게 되자 손을 잡고 서로 울었다. 마침 형제들이 술자리를 마련하고 즐거움이 최고였을 때 왕은 스스로 노래를 짓고 춤을 추어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지금 향악(郷樂)의 우식곡(憂息曲)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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