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은 타임캡슐과 같다
아잔타 석굴은 내부의 벽화로 유명한데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북서부에 위치한 불교 동굴 사원이다. 29개의 석굴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지어진 전기 석굴과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지어진 후기 석굴이 있다. 사진은 아잔타 석굴 전경.
사람들은 추억 보존하기 위해
타임캡슐 땅에 묻지만 석굴은
과거 불교흔적 온전히 전한다
아잔타석굴에는 인도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풍부하다
무불상 시대부터 대승불교가
발전하던 시기의 벽화까지…
특히 ‘연화수보살도’가 유명
우리는 산의 입구에서 누군가 쌓아 올린 돌무더기를 보며 탑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나라의 지명 중에 영축산, 오대산, 낙산 등 불국토의 지명을 본떠서 붙인 경우도 허다하다. 대웅전 안에 석가모니불의 좌우보처가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로 바뀌어 간다.
무슨 이유로 사람들은 불교를 믿고 절에 가는 것일까? 이러한 소박한 질문에서 불교 신앙에 대한 여행이 시작된다. 석굴암의 본존불을 바라보며 지른 “아!”라는 탄성 한 마디는 어떠한 신앙도 뛰어넘는 절대의 경험을 느끼게 해줬다. 중국 산시성 윈강 석굴에서 만난 거대한 석가모니 불상이 시대를 뛰어넘어 그들의 믿음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수한 질문들 속에서 불교 신앙에 대한 문화적 접근을 시작하려고 한다.
한국에 불교가 시작된 것은 서기 372년이다.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은 승려 순도(順道)를 고구려에 보내서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접한 최초의 승려와 불상은 너무도 놀라운 것이었을 것이다. 흔히 한국불교사를 쓰는 입장에서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별다른 충돌이 없었지만, 신라에 이르러서는 기존 세력과 갈등을 겪었다고 기술한다.
역사의 기록에 별다른 기술이 없기에 이러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무난해 보이지만 고구려와 백제의 사람들도 불교를 아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머리를 깎고 낯선 불상을 가져온 그들의 모습에서 일반인들이 불교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상상하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상상이다. 불교에 대한 믿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어떤 식으로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게 앞서 불교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경주 남산을 보지 못하면 신라를 반도 보지 못했다는 말이 있다. 경주 남산은 그만큼 신라의 모습을 많이 담고 있다. 남산 자락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곳은 용장사지(茸長寺址)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는 동서 약 70m, 남북 40여m 되는 지역에 크고 작은 돌 축대가 남아 있는 절터이다. 조선 초 말년에 설잠(雪岑)이란 법명으로 활동한 김시습이 이 절에 기거하면서 <금오신화>를 썼다고 하니, 긴 세월 동안 용장사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몇 군데의 건축 터와 석대, 3기의 탑지, 보물 187호인 석불좌상과 보물 186호인 3층 석탑, 보물 913호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이 남아 있다. 이 중 목 없는 석불좌상이 미륵상으로 보인다. 불상이냐 보살상이냐?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용장사지의 석불좌상이 남아서 이야기 하는 것은 남산을 불국토로 만들었던 신라인들이 죽어서 다시금 용화세계로 향해 먼 훗날 모든 이들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용장사지는 이야기가 많은 절터라고 할 수 있다.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탑, 탑을 닮은 석불좌상 등 무수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지만, 다시금 여행의 자락에서 신라로 발걸음이 옮겨지거든 이야기를 하리라. 용장사와 신라인들의 불국정토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석굴은 타임캡슐과 같다. 사람들은 추억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서 타임캡슐을 땅에 묻지만, 석굴은 과거의 불교 흔적을 그나마 온전히 전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이슬람 침입 이후 수많은 불상이 훼손되거나 사라졌고, 실크로드에서도 국가의 흥망성쇠에 따라 석굴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중국은 삼무일종(三武一宗)의 폐불(廢佛)이라는 불교 탄압기를 거치면서 사라졌고, 공산당 집권 이래 ‘문화대혁명’에서 사라져 버린 문화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한국도 조선시대 유교 세력 밑에서 사라진 사찰과 불상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석굴은 그 많은 세월 동안 과거의 흔적을 간직해 그 자리에서 불교에 관한 이야기를 후세에 전한다.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됐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고타마 싯다르타가 태어난 정확한 위치는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깨달음을 얻었다는 보드가야나 설법지라는 사르나트, 돌아가신 쿠시나가라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있지만, 카필라바스투의 위치는 여러 가지 학설이 존재한다. 우리가 흔히 법당에서 접하는 부처님의 모습인 불상도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한 지 한참 지난 A.D 1세기나 돼서야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이 들어본 간다라 지역의 불상이나 마투라 지역의 불상은 오랜 세월이 지나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불상들이 유행하면서 실크로드와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불상의 기원에 관한 많은 책과 논문에서도 정확하게 언제 시작했는지 왜 만들었을까는 많은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흔적 중의 하나인 석굴을 통해 알아보고자 한다.
인도의 석굴은 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를 피하는 수행 기도처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인도에 석굴은 1200여개 정도가 있는데 그중에 불교석굴이 75%를 차지하고 있다. 시기적으로는 전기인 B.C 2∼1세기 사타바하나 시대의 석굴과 후기인 A.D 4∼5세기 굽타왕조의 석굴로 나눌 수 있다.
아잔타 제1굴 연화수 보살 벽화.
아잔타 석굴은 내부의 벽화로 유명한데 인도 마하라슈트라 주 북서부에 위치한 불교 동굴 사원이다. 29개의 석굴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약 1세기 동안 지어진 전기 석굴과 5세기에서 7세기에 걸쳐 지어진 후기 석굴이 있다. 인도의 풍속이나, 불교에 관한 것들이 풍부하고 다채로운 필치로 벽면만이 아니라 기둥, 대들보, 천장 등 광대한 공간의 구석구석까지 묘사되어 있다. 무불상 시대(부처님을 묘사하지 못하던 시대)의 것부터 대승불교가 발전하던 시기의 벽화까지 다양하다.
특히 연화수보살도가 유명하다. 8세기 들어 불교가 쇠퇴함에 따라 약 1000년 이상 방치되었는데 1819년 영국군 병사 존 스미스 (John Smith)에 의해 발견되었고 1893년 퍼어슨 (Person)이 조사 발굴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약 30개 되는 이 동굴들은 B.C 1세기에서 A.D 7세기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역시 차이티야(성소)와 비하라(수도원)의 두 가지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잔타에서 가장 유명한 벽화는 연화수 보살이다. 꽃을 들고 있다 해서 연화수라 하지만 손이 연꽃처럼 예쁘고 부드럽다는 뜻에서 연화수라 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손길을 연꽃에 비유한 것이다. 손에 연꽃을 들고 있다는 뜻의 범어 파드마파니 보디사트바(Padmapani -Bodhisattva)를 번역해 연화수보살이라고 한다. 어둠 속에서 자비로운 미소로 우리를 바라보는 모습에서 깊은 환희심을 느낀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많은 아픔들을 자비로운 마음으로 어루만져 주는 모습에서 우리들의 석굴 기행을 시작한다.
문무왕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외래교수 [불교신문 375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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