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사막길에서 중국으로 ① 둔황
남로와 북로가 갈리는 동서 교류 요충지

① 둔황을 상징하는 시내 비천상 ② 여행자를 반기는 사주 시장 ③ 옥문관 ④ 월아천
‘크게 번성한다’는 뜻의 둔황
중국의 서쪽 끝 중국을 중심으로 본다면 변경에 해당하는 둔황(돈황, 敦煌)은 신비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돈황이라고 흔히 부르지만, 이제는 병음 표기에 의해서는 둔황이라고 해야 한다. 갈 때마다 여행자를 반기는 사주 시장도 있고, 도시를 상징하는 비천상이 반긴다. 사주 시장은 자칫하면 여행자의 주머니를 노린다. 물가가 제멋대로인데 잘 모르는 사람은 호되게 당할 수 있다.
고비 사막에 있는 둔황은 란저우에서 시작된 하서주랑이 끝나고 실크로드의 남로와 북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이 때문에 중국어로 ‘크게 번성한다’라는 뜻의 이름처럼 당나라 때까지 지정학적 요충지로 번영을 누렸다.
포플러나무로 둘러싸인 도심은 ‘녹주(绿洲)’라 불리는 오아시스이지만, 외곽으로 나가면 ‘사주(沙洲)’라 불리는 자갈 사막과 황금빛 모래사막이 끝도 없이 펼쳐진다. 둔황을 상징하는 관문이 두 개가 있다. BC111년 한의 무제는 최 서부의 중요한 군사 요충지인 둔황에 하서사군(河西四郡)의 하나인 돈황군을 설치하고, 외곽에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의 두 관문을 만들었다.

여행자를 반기는 사주 시장.

옥문관=위키디피아 제공.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옥문관’
옥문관(중국어 간체자: 玉门关, 정체자: 玉門關, 병음: Yùmén Guān)은 만리장성의 서쪽의 끝이다. 둔황시의 서북쪽으로 98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옥문관은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던 곳이다.
양관(중국어 간체자: 阳关, 정체자: 陽關)은 중국의 지명으로, 둔황에서 남쪽으로 75km 떨어진 관문이다. 둔황 북쪽의 옥문관과 함께 둔황 이관(二關)으로 불렸다. 한무제 때에 세워진 방어 요새로 옥문관과 함께 서역으로 통하는 문호로서, 옥문관을 지나면 북도(北道)로, 양관을 지나면 남도(南道)로 통하였다.
예전에는 시내에서 130km 떨어진 류위안 역(柳园站, 류위안 잔)에서 둔황 시내로 들어와야 했었지만, 지금은 둔황호라고 불리는 특급열차가 서안에서 둔황으로 이동시켜준다. 둔황은 공항도 있기는 하지만 권하지는 않는다. 새로 재개장했지만, 오히려 불편하다.
외래문화와의 결합 또는 접점
중국학자 유진보(劉進寶)는 ‘둔황의 예술 및 문화는 서쪽에서 온 것도 아니고, 동쪽으로 간 것도 아니라, 중국의 오래된 전통문화가 둔황이라는 특수한 지리 환경 속에서 외래문화와 서로 결합해 만들어진 산물’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유진보의 지적을 잘 들여다보면 ‘특수한 지리 환경’이라는 지역적 특수성을 우선 이야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지적하고 있는 ‘외래문화와의 결합’이라는 점은 동일 문장 속에서 서쪽에서 온 것도, 동쪽으로 간 것도 아니라는 본인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외래문화란 서쪽에서든 동쪽에서든 바로 이 지역에 전파 혹은 유입된 그 어떤 것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러한 외래문화가 중국 전통문화와 결합하였다. 다시 말해서 둔황 지역은 서양의 문화와 중국의 문화가 만나는 대표적인 접점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둔황은 하서사군(河西四郡) 가운데 사주(沙州)에 해당하며, 하서 회랑 지대의 가장 서쪽 끝에 있다. 동서 교류의 요충지로 잘 알려진 둔황은 주로 동서 교류의 교차점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교차점이니만큼 이 지역의 역사 또한 혼란스러움으로 인식되는 경우도 많은데, 둔황에 대한 본격적인 역사 서술이 보이는 <후한서(後漢書)>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왕망(王莽)의 난에도 하루에 시장이 네 차례 섰다.”

월아천.
<후한서> 기록에 나타난 둔황
이미 전한 시대에 중원에서 하서 지역으로 이주한 이들이 존재했고,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혼란스러웠던 중원 지역보다 둔황이 훨씬 안정적인 지역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돈황군의 설치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이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대략 기원후 100년을 전후한 시점에 설치되었다는 것은 공히 인정되는 사실이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상당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던 지역이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이와 같이 정치, 사회가 안정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리적인 원인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후한서>의 기사도 확인할 수 있다. <후한서>에서 하서는 풍요롭고 강을 끼어 견고하며, 장액의 속국은 정예 기병 만여 기를 거느리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단 급한 일이 발생하면 강나루만 철저히 막으면 되기 때문에 스스로 방비하기 충분해 종족을 퍼뜨릴 만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5호16국 시대와 오량 국가의 설립
그러나 돈황을 중심으로 5호16국 시대를 맞이하면서 오량(五凉) 국가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서량(西涼), 북량(北涼), 남량(南涼), 전량(前涼), 후량(後凉)으로 이루어진 5개 국가는 한족을 비롯해 흉노족 등의 각 민족들이 지배하는 형국이었다. 이 가운데서 전량의 경우 영녕(永寧) 초에 부사로 임명된 장궤(張軌)가 인재 양성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오량 문화의 발전에서 한진(漢晋)의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도 영가의 난 때 중앙의 인사들이 중앙을 피해 하서 지방으로 갔고, 장씨는 예로써 그들을 맞이하고 등용했음이 묘사되어 있다. 양주는 자손들이 지속적으로 벼슬을 함으로써 인재가 많은 곳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중국 역사상 가장 복잡다단한 시기에도 오히려 안정을 누렸음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역사적 분석을 진인각(陳寅恪)이 시도하였는데, 중원 지방이 전쟁터로 변했을 때 오로지 전량 장씨 이후로 하서 지방이 잘 다스려졌던 점을 첫 번째 원인으로 들고 있다. 두 번째로는 본토의 학술이 보존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난을 피해 온 유학의 인재들이 학문을 전수시킬 수 있는 시간이 길어짐으로써 점차 이 지역만의 문화 및 학술적 특징을 나타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동서 문화 교류의 중추 역할지
이같이 하서의 전형성과 대표성을 지니고 문화 및 교육 등에 큰 영향을 미친 문인학사가 둔황에서 나오는 경향에 대해 진원(陳垣) 역시 돈황에 대한 역사, 지리적 분석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한대 이래 돈황 문화는 매우 발달해 서역과 경락(京洛)의 출입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큰길이었으며 실제로 중서 문화 교류의 중추 역할지였다”라고 밝히고 있어 이른 시기부터 하서사군, 특히 둔황 일대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문무왕 동국대 와이즈캠퍼스 외래교수.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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