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약용작물, 인삼

인삼은 일찍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해 온 특산 농작물이다. 위로는 국가의 귀중한 재화(財貨)이자 왕실의 약재로 쓰였고, 아래로는 민간에 공급되어 만병을 다스리는 영약으로 두루 이용되었다. 인삼의 뛰어난 효능은 삼국시대부터 널리 알려져 있었고 중국·일본을 비롯한 주변국 간 교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다. 특히 고려 말에 이르러 유통량이 매우 증가했으며 조선시대에는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고려인삼’의 확고한 위상이 정립되었다.

 

역사 속 인삼은 본래 지금의 산삼을 이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다 밭에 씨를 뿌려 기르는 재배법이 민간에 널리 확산되면서 산에서 나는 인삼과 구분할 필요가 생겼고 처음에는 이를 가삼(家蔘)이라 불렀다. 깊은 산중에서 채취하던 인삼이 농사 영역으로 편입되고 인삼 재배의 실마리가 마련된 이후 산출지와 재배 장소에 따라 산삼·산양삼·인삼으로 부르게 되었다.

 

인삼 재배는 조선 후기의 산물이다. 그 배경에는 야생의 인삼이 희소해진 데다 감영(監營)의 관속(官屬)과 이익을 독점한 상인배의 극심한 농간이 있었다. 온갖 삼폐(蔘弊)로 심지어 임금에게 진상하는 인삼조차 가삼 혹은 가짜 삼을 바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처럼 부족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인삼의 물량 확보가 절실해졌고 그 방안으로 17~18세기부터 산삼 씨앗을 채취해 밭에 뿌려 기르는 재배삼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개성 지역이 인삼 재배로 유명세를 탄 것도 이 무렵이다.

 

인삼 재배의 확산과 더불어 조선 후기 중국 간 홍삼 무역이 크게 성행했다. 홍삼은 만병을 다스리는 영약으로 알려져 날개 돋친 듯이 팔려 나갔다. 이 시기 홍삼 무역에서 천재적인 수완으로 큰 부를 축적한 거상(巨商) 임상옥(林尙沃, 1779~1855)의 일화에서 당시 홍삼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1821년 임상옥은 변무사(辨誣使)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들어가 홍삼 무역에 나섰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청나라 상인들이 홍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물건을 싸게 사려고 불매동맹(不買同盟)을 밀약한 것이었다. 청나라 상인들은 홍삼을 헐값에 처분하겠다는 임상옥의 제안을 기다렸지만, 조선의 사신 행렬이 돌아갈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다급해진 쪽은 오히려 청나라 상인들이었다. 사람을 보내 넌지시 사정을 알아보니 임상옥은 객사 마당에 가져온 홍삼을 모두 쌓아 놓고 불태우는 중이었다. 놀란 청나라 상인들이 객사로 몰려갔을 때 이미 홍삼의 절반은 못 쓰게 된 상태였다. 이유를 묻자 임상옥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만리타국에 힘들게 가져온 귀한 홍삼을 제값도 못 받고 파느니 차라리 불태워 없애는 것이 낫소.” 청나라 상인들은 태도를 바꾸어 불에 탄 홍삼까지 훨씬 비싼 가격으로 사들였다.

만병통치의 신초, 인삼 재배와 가공

인삼은 두릅나무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학명은 ‘Panaxginseng C.A.Meyer’이다. 여기에서 ‘Panax’는 그리스어로 ‘모든 것’을 의미하는 ‘Pan’과 ‘치료한다’는 뜻을 지닌 ‘Axos’가 결합한 단어이다. 즉, 모든 병을 치료한다는 만병 통치의 의미이다. ‘인삼(人蔘)’이라는 명칭은 뿌리 모양이 사람 형상을 닮은 데서 비롯되었다.

 

인삼의 주요 산지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 베트남이며 서양에서는 미국, 캐나다 등이다. 산출지에 따라 우리나라의 고려인삼(Korea ginseng), 중국의 전칠삼(田七蔘), 일본의 죽절삼(竹節蔘), 북미의 화기삼(花旗蔘), 베트남의 녹린산삼 등으로 구분한다.

 

인삼의 종류는 가공 여부에 따라 수삼(水蔘)·백삼(白蔘)·숙삼(熟蔘)으로도 구분한다. 수삼은 밭에서 캐낸 인삼을 말리거나 가공하지 않은 생삼(生蔘)이다. 백삼은 수삼의 잔뿌리를 제거하고 껍질을 벗겨낸 다음 햇볕에 말린것이다. 흔히 건삼(乾蔘)으로 불리는데 보관시설이 변변치 않던 시대에 수확한 인삼은 주로 백삼으로 유통되었다. 농가에서는 인삼을 캐는 즉시 대나무 칼을 이용해 껍질을 벗겨낸 후 말려 백삼을 만들었다. 백삼은 접는 방식과 형태에 따라 다시 직삼(直蔘)·곡삼(曲蔘)·반곡삼(半曲蔘)으로 나뉜다. 직삼은 수삼을 곧게 펴서 말린 것이고, 곡삼은 꼬리부터 둥글게 말아 올려 건조한 삼이다.

 

반곡삼은 직삼과 곡삼의 중간 형태로 몸통은 그대로 두고 지근(枝根)을 살짝 구부려서 말린다. 그 밖에 수삼에서 떼어낸 잔뿌리를 말린 미삼(尾蔘)도 있다. 1950년 무렵까지도 백삼은 개성의 직삼과 금산의 곡삼이 양대 산맥을 형성했고, 풍기에서는 반곡삼의 명맥을 이어 왔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개성과 교류가 단절되면서 금산의 곡삼이 한때 우리나라 백삼시장을 석권할 정도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숙삼은 수삼을 가마솥에 넣어 증기로 쪄서 말린 삼이다. 서긍(徐兢)의 『고려도경』에는 “인삼은 생삼과 숙삼, 두 가지가 있는데 생삼은 여름이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쪄서 익힌 숙삼만 못하다”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파삼(把蔘)·포삼(包蔘)·홍삼(紅蔘) 등의 명칭을 사용했으며 현재는 홍삼으로 불린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첫 농경 지식 유산

오랜 역사를 통해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도 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온 인삼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약용문화의 상징이다. 2020년 11월 20일 문화재청은 무형문화재위원회의 최종심의를 통해 지정을 결정했고 같은 해 12월 1일 ‘인삼재배와 약용문화’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했다. 2016년 무형문화재 범주가 농경·어로 등에 관한 전통지식 등으로 확대된 이후 농업 관련 분야에서 최초로 지정된 국가무형문화재이다. 지정 이유로는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가 오랜 역사성과 학술적 연구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와 관련해 다양한 문화가 전승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수많은 공동체와 관련 집단이 존재하고 세대 간 공유해 온 전통지식이 유지되고 있는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보유자나 보유단체를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종목으로 지정된 것 또한 무형유산의 전승주체로서 ‘사람·집단·공동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뜻깊다.

 

인삼 재배와 약용문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통문화의 한 영역인 농경문화를 적극적으로 보전, 전승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재배 농가를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는 인삼 재배와 온 국민이 향유하고 있는 약용 문화가 계속해서 우리 공동체 전체의 소중한 무형유산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글, 사진. 강성복(민속학자, 충청민속문화연구소 소장)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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