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벌국(骨伐國)
삼한시대의 소국으로, ‘벌(伐)’은 ‘부리(夫里)’·‘불’과 함께 취락·성(城)을 뜻하는 옛말의 한자표기이며, ‘벌’을 ‘화(火)’로 표기하여 ‘골화국(骨火國)’이라고도 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나오는 진한 호로국(戶路國)에 비정되기도 한다.
영천시 화산면과 신녕면 등지에서는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과(銅戈)가 발견되었는데, 그 지역에 분포되어 있던 다수의 읍락집단(邑落集團)들이 통합되어서 골벌국을 구성한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많은 청동기 일괄유물이 발견된 금호면일대로 추정된다.
한편, 영천 지역에서 출토되는 청동기 유물의 수량과 형태로 미루어 골벌국은 서력기원 뒤 상당기간 동안 경주의 사로국(斯盧國), 대구의 작은 나라 등과 밀접한 교역관계를 맺으면서 대등한 정치집단으로 성장한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에 236년(조분이사금 7) 골벌국왕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신라는 그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주어 안착시켰는데, 영천의 골화신(骨火神)이 경주의 나력신(奈歷神), 영일의 혈례신(穴禮神)과 함께 신라에서 행하던 대사(大祀)의 3선(仙)이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골벌국의 지배세력은 신라의 성장과정에서 핵심세력의 하나로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신라는 그 지역에 임고군(臨皐郡) 임천현(臨川縣)을 두었다.
골화는 본래 골화소국(骨火小國) 혹은 골벌국(骨伐國)이었던 곳을 신라가 흡수하여 현(군)을 두었던 곳으로, 산이름이었을 뿐 아니라 성과 현(군)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골화와 관련된 지명이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우선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 조분이사금 7년(236)조에는 봄 2월에 “골벌국왕(骨伐國王)” 아음부(阿音夫)가 무리를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집과 토지를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삼국사기』 지리지에도 보인다. 즉 『삼국사기』 권34 잡지3 지리1 신라 양주 임고군(臨皐郡)조에는 임고군이 본래 절야화군이었다는 내용과 함께 임고군의 영현으로 임천현(臨川縣)이 보이는데, 이에 따르면 조분왕 때에 “골화소국(骨火小國)”을 쳐서 얻어 현(縣)을 설치하였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으며,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영주(永州)에 합쳐져 속했다고 한다.
두 기록을 비교해보면 골벌국(骨伐國)은 곧 골화소국(骨火小國)과 같은 것이며 조분이사금 때에 신라의 영역에 편입되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전자의 기록인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는 골벌국이 신라에 스스로 항복하였다고 했으나, 후자의 기록인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신라가 골벌국 즉 골화소국을 쳐서 복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이외에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4 지증마립간 5년(503)조에는 “골화성(骨火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 권37 잡지6 지리4 삼국유명미상지분(三國有名未詳地分)조에는 “골화국(骨火國)”이라는 국명이 전하는데, 이 역시 골벌국․골화소국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