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3(仁宗三) 24

〈병인〉 24년(1146) 봄 정월 정축. 금(金)에서 위주방어사(衛州防禦使) 완안승(完顔昇)을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인. 왕이 태자에게 명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정습명(鄭襲明)을 데려다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의 강론을 듣도록 하였다.

임오. 금(金)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윽고 〈왕이〉 편찮았다.

정해. 〈참형과 교형〉 이죄(二罪) 이하의 죄인에게 사면령을 내렸다.

신묘. 왕의 병이 위독해지자 복자(卜者)가 말하기를, “이자겸(李子謙)의 〈원한이〉 높아서 입니다.”라고 하니, 내시(內侍) 한작(韓綽)을 보내어 이자겸(李子謙)의 처자(妻子)를 인주(仁州)로 옮겨 거처하게 하였다.

임진. 백관이 보제사(普濟寺)로 가서 〈왕이 회복하기를〉 기도하고 2,000명에게 반승(飯僧)하였다.

갑오. 또 시왕사(十王寺)에서 기도하였다.

기해. 종묘와 사직에서 기도하였다.

2월 계축. 연등회에서 풍악 연주를 중지시켰다.

을묘. 평장사(平章事) 임원애(任元敱)와 백관이 선경전(宣慶殿)에 모여 황천 상제(皇天上帝)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천의(天意)는 멀고도 그윽한 지라 진실로 평하거나 헤아리기가 어려우나, 인간은 미천하지만 믿음과 성의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번번이 견마(犬馬)의 마음을 다하여 우러러 신명(神明)의 성찰을 욕되게 합니다. 옛날 무왕(武王) 재위 때 병이 들어 낫지 않자, 주공(周公)이 글을 지어 몸소 대신 병을 앓겠다고 하늘에 청한 바 있으니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더라도 충의(忠義)는 같습니다. 이것이 신들이 피눈물을 흘리며 글을 써서 하늘에 호소하여 천명을 청하는 까닭입니다.
바라옵건대 창천(蒼天)께서는 부디 지극한 정성을 굽어 살피셔서 우리 왕의 병을 신들의 몸에 옮기시고 왕의 수명을 더해주셔서 종묘가 의탁할 바가 이루어지도록 해주십시오. 그리하면 신들이 어찌 감히 스스로 새로운 길을 밟고 기왕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지 않겠습니까? 임금을 이끄는 데에는 선(善)을 권하고 사(邪)를 막을 것이며 백성을 위하는 데에는 이익을 높이고 해악을 없앨 것입니다. 탐오하는 행위를 하지 않고 속이고 기롱하는 꾀를 내지 않을 것이며 청렴결백하게 근면을 다함이 죽든 살든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어떤 날이라도 이 맹세를 어긴다면 반드시 신명으로부터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병진. 무당들이 이르기를, “척준경(拓俊京)의 원한〉이 높아서입니다.”라고 하므로, 척준경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추복(追復)하고 그 자손을 소환하여 벼슬을 주었다.

무오. 사면령을 내렸다.

기미. 진강백(晋康伯) 왕연(王演)이 사망하였다.

경신. 무당의 말을 따라 내시(內侍) 봉열(奉說)을 보내어 김제군(金堤郡)에 새로 쌓은 벽골지(碧骨池)의 제방을 트게 하였다.

갑자. 왕의 병이 크게 심해지자 태자 왕현(王晛)에게 전위(傳位)하면서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은 덕이 부족함에도 외람되이 큰 왕업을 이은 후 마치 깊은 못가에 서 있는 듯, 썩은 새끼로 말을 모는 듯[臨深馭朽] 위태로워서 나라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더니, 하늘이 크게 벌을 내려 병이 낫지 않아 위로는 천심(天心)이 두렵고 아래로는 민망(民望)에 부끄러워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쉴 겨를 없이 그 허물됨을 면하고자 생각하였다. 국가 정무와 만기(萬機)는 오랫동안 지체되어서는 안되며, 신기(神器)와 대보(大寶)를 맡는 자리 역시 잠시라도 비울 수 없다.
태자 왕현(王晛)은 짐의 적장자로 밝은 지혜[重離之明)와 크고 선한 덕[元良之德]이 있어 위아래를 바로잡을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선왕(先王)이 가까운 이에게 사랑을 베풀어 먼 데 이르게 한 계책[立愛之模]을 생각하며 옛날 〈하·은·주〉 3대 때 아들에게 왕위를 전한 뜻에 따라 그에게 중임을 부여하여 삼한(三韓)의 땅을 다스리게 하려하니, 반드시 전장(典章) 같은 것을 잘 살펴 많은 공적을 이루도록 할 것이다. 이제부터 이왕의 군국(軍國) 사무는 모두 사군(嗣君)의 처단을 받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정묘. 유조(遺詔)를 남겨 말하기를,
“짐은 황천(皇天)이 돌보아주는 명에 힘입어 열성(列聖)께서 남기신 위업을 이어 삼한(三韓)을 다스린 지 25년이 되었다. 이번에 근심이 쌓여 걱정이 되고 병이 되어 수십 일이 지났으나 심해질 뿐 낫지 않다가 마침내 크게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아! 성철(聖哲)의 도(道)는 그 존망(存亡)을 아는데 있고 부처와 노자는 생사(生死)가 하나라 하였으니, 이는 대저 반드시 이르게 되는 일이며 자연의 이치이다. 죽을 자는 변화에 순응하여 머물지 않아야 하며, 산 자는 슬픔을 억누르고 효를 다해야 하는 것이니, 이는 천하의 달도(達道)이다.
아아! 왕태자 왕현(王晛)이 가진 충효의 아름다움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로 일찍부터 이루어졌으며 덕과 업적은 융성하여 인망(人望)에 충분히 족하니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하다. 상복(喪服)은 하루를 한 달로 쳐서 행하고[以日易月] 산릉(山陵)의 제도는 검약함을 힘써 따르도록 하라. 성현의 훌륭한 법도를 뒤따라 행하여 조종이 이룬 영광을 욕되게 함이 없도록 하라. 문무백관은 한마음으로 덕을 이루도록 하여 국정에 큰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이며 왕실을 잘 지켜야 할 것이다. 중외에 이를 포고하여 모두가 짐의 뜻을 알게 하라.”
라고 하였다.
마침내 왕이 보화전(保和殿)에서 훙서하자 건시전(乾始殿)으로 옮겨 빈소를 마련하였다. 재위는 24년간이었으며 향년 38세였다. 시호(諡號)를 공효(恭孝), 묘호(廟號)는 인종(仁宗)이라 올렸으며 도성 남쪽에 장사지내고 능은 장릉(長陵)이라 하였다. 고종(高宗) 40년(1253)에 시호를 더하여 극안(克安)이라 하였다.

사신(史臣) 김부식(金富軾)이 찬하여 말하기를,
“인종(仁宗)은 젊어서부터 재예(才藝)가 많고 음률에 밝았으며 서화를 좋아하고 책을 보기를 즐겨하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간혹 가다가는 아침에 이르기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 즉위에 미쳐서는 명경과(明經科) 출신 신숙(申淑)이 매우 가난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불러 내시(內侍)로 삼았으며 『춘추(春秋)』와 경전(經傳)을 배웠다. 성품은 또한 검약하여 일찍이 병이 들었을 때 재추가 내전(內殿)에 들어가 문병한 적이 있었는데 임금의 침석(寢席)은 황주(黃紬)로 테두리를 하지 않았고 침의(寢衣)에도 비단 장식이 없었다.
왕위에 오른 초년에는 궁중에 환관과 내료 등의 무리가 매우 많았으나 매번 조금만 죄를 지어도 쫓아내면서 다시 채우지 않도록 하니 말년에 이르러서는 불과 몇 사람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루에 두 번 시사(視事)하였는데 혹시 업무보고가 지체되면 반드시 하급관리로 하여금 재촉하였고 덕으로 은혜를 베풀어 백성을 편안하게 할 뿐 병사를 일으켜 쓸데없는 일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금(金)이 갑자기 세력을 떨치게 되자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면서까지 표문을 올려 칭신(稱臣)하였고 예로 북사(北使)를 대접하길 매우 공손히 하니 이 때문에 북인(北人) 〈즉 금 사람〉들도 모두 공경하고 좋아하였다. 글 짓는 신하가 왕명으로 글을 지을 때 혹 북조인 금을〉 호적(胡狄)이라 하면 곧바로 두려워하면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신하로서 대국을 섬기면서 오만하게 이같이 부를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렇게 매년 즐거이 맹서하니 변경에는 아무런 우환이 없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이자겸(李資謙)이 멋대로 하는 바람에 궁중에 변란이 생겨 유폐되는 욕을 겪었지만 그가 외조부라 하여 곡진하게도 그 생명을 온전하게 해 주었다. 또 척준경(拓俊京)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도 잘못한 점은 버리고 공적을 참작해 목숨을 보전하게 하였으니, 이를 통하여 왕의 도량이 너그럽고 넓었음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까닭에 왕이 훙서하자 안팎에서 애모하였으며 비록 북인(北人)들이더라도 이를 듣고는 탄식하고 슬퍼하였는데, 〈이에〉 묘호(廟號)를, ‘인(仁)’이라 일렀으니 또한 마땅하지 않는가. 애석한 것은, 묘청(妙淸)이 도읍을 옮기자 한 말에 현혹되어 결국 서경인의 반란을 초래하였고 군대를 일으켜 해를 이어서야 겨우 이들을 평정하였으니 이 일이 바로 성덕(盛德)에 있어 누가 되는 일이었다.”
라고 하였다.

사신(史臣) 김신부(金莘夫)가 말하기를,
“예종(睿宗) 말년 지나치게 처족[房帷]에게 마음을 쏟자 외가의 탐오하고 방자한 행동이 지나치게 되었다. 인종(仁宗)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재상 한안인(韓安仁) 등이 길게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고 몰래 그 권력을 빼앗으려 하였으나 성급한 분노가 사단을 일으켜 도리어 유배와 살육을 입게 되었고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이 발호하게 만듦으로써 그 해독은 삼한에 흐르게 되었다. 심지어는 왕이 탄 수레[黃屋]에 활을 쏘고 침전을 불살랐으며 지존을 위협하여 사저(私第)에 안치하고는 왕의 좌우 신하를 살육하고 아울러 국권을 빼앗았다. 조종의 왕업이 거의 땅에 떨어질 뻔하였으니 가히 거울 삼을만한 한 일이었다.
또한 정심(淨心) 〈즉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의 음양설(陰陽說)에 미혹되어 결국 서경(西京) 반역이 있게 되었으니 어째서인가? 대저 〈인종의〉 천성이 하나같이 자애롭기만 하여 우유부단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죄를 형벌로 다스리는 것이 병오년(丙午年, 1126) 역도의 무리들에게 맞지 않았으며 서경 반란 백성들에 대한 처치도 공정하지 않았다. 또한 불교를 깊이 믿어 더욱 백성들에게 폐해를 늘리기만 하였으니 애석하도다! 그러나 쓸데없이 유람이나 잔치를 즐겨 벌이지 않은 것, 환시(宦寺)를 줄인 것, 공검(恭儉)을 생활화한 것, 성신(誠信)으로 교린(交隣)한 것은 비록 옛날의 제왕(帝王)이더라도 어찌 더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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