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대왕(金傅大王)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의 시호는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2년 정해(丁亥, 927) 9월에 백제(百濟)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해서 고울부(高府)에 이르니 경애왕(景哀王)이 우리 태조(太祖)에게 구원을 청했다. 장수에게 명하여 정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군(救援兵)이 미처 이르기도 전에 견훤(甄萱)이 겨울 11월에 왕경(王京)으로 쳐들어갔다. 왕은 비빈(妃嬪)·종척(宗戚)들과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열고 즐겁게 놀고 있었기 때문에 적병이 오는 것도 알지 못하다가 창졸(倉卒)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王)과 비(妃)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宗戚) 및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며, 귀천(貴賤)을 가릴 것 없이 모두 땅에 엎드려 노비(奴婢)가 되기를 빌었다. 견훤(甄萱)은 병사들을 놓아 공사(公私) 간의 재물을 약탈하고 왕궁(王宮)에 들어가서 거처하였다. 이에 좌우 사람을 시켜 왕을 찾게 하니 왕(王)과 비첩(婢妾) 몇 사람이 후궁에 숨어 있었다. 이를 군중(軍中)으로 잡아다가 왕은 억지로 자결(自決)해 죽게 하고 왕비(王妃)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놓아 왕의 빈첩(嬪妾)들을 모두 욕보였다. 왕의 족제(族弟)(傅)를 세워 왕으로 삼으니 왕은 견훤(甄萱)에 의해 즉위한 셈이다. 전왕(前王)의 시체를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했다. 태조(太祖)가 사신(使臣)을 보내어 조문하고 제사하였다.

이듬해 무자(戊子, 928) 봄 3월에 태조(太祖)는 50여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신라의 서울에 이르니 왕은 백관(百官)과 더불어 교외에서 맞이하여 대궐로 들어가 서로 대하여 정리와 예의를 다하고 임해전(臨海殿)에서 잔치를 열었다. 술이 얼근하자 왕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 화란을 불러 일으켰고(吾以不天侵致禍亂), 견훤(甄萱)은 불의한 짓을 마음껏 행하여 우리 나라를 망쳐 놓았으니(甄萱恣行不義喪我國家) 이 얼마나 통탄할 일인가(何痛如之)” 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우니 좌우 사람들도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태조(太祖) 역시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여기에서 수십 일을 머무르다가 돌아갔는데, 휘하의 군사들은 엄숙하고 조용했으며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다.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서로 경하(慶賀)해 말하기를, “전에 견훤(甄萱)이 왔을 때는 마치 늑대와 범(犲虎)을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王公)을 만나니 마치 부모를 대한 것 같다”고 하였다. 8월에 태조(太祖)는 사자를 보내서 왕에게 금삼(錦衫)과 안장을 얹은 말(鞍馬)을 주었고, 아울러 여러 관료(群僚)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물건을 주었다.
청태(淸泰) 2년 을미(乙未, 935) 10월에 사방의 토지가 모두 남의 나라 소유가 되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가 외로우니 스스로 지탱할 수가 없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국토(國土)를 들어 고려 태조(太祖)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옳으니 그르니 하여 의논이 시끄럽고 끝나지 않았다. 왕태자(王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은 반드시 하늘의 명에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의사(義士)들과 함께 민심(民心)을 수습해서 힘이 다한 뒤에야 그만둘 일이지 어찌 천년의 사직(社稷)을 가벼이 남에게 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 같으니 형세는 보전될 수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또한 약해질 수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肝腦塗地)은 나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를 시켜서 국서(國書)를 가지고 태조(太祖)에게 가서 항복하기를 청했다. 태자(太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바로 개골산(皆骨山)으로 들어가서 삼베 옷을 입고 풀을 먹다가 생애를 마쳤다. 막내 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승려가 되어 이름을 범공(梵空)이라 했는데, 그 뒤로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있었다고 한다.
태조(太祖)는 신라(新羅)의 국서를 받자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서 맞이하게 했다. 왕은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太祖)에게 귀순했다. 향거(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에 뻗쳤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담과 같이 늘어섰다. 태조(太祖)는 교외에 나가서 영접하여 위로하고 대궐 동쪽의 한 구역 지금의 정승원(正承院)을 주고, 장녀(長女)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그의 아내로 삼았다. 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다른 나라에 와서 살았으므로 난새(鸞)에 비유하여 공주의 칭호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쳤으며, 시호(諡號)를 효목(孝穆)이라 했다. 왕을 봉(封)하여 정승(正承)을 삼으니 자리는 태자(太子)의 위에 있었으며 녹봉(祿俸) 일천 석을 주었다. 시종(侍從)과 관원(官員)·장수(將帥)들도 모두 채용해서 쓰도록 했으며, 신라(新羅)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여 공(公)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며 항복해 오니 태조(太祖)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써 그를 대접하고 사람을 시켜 말했다. “지금 왕이 내게 나라를 주시니 그 은혜를 받음이 큽니다. 원컨대 왕의 종실(宗室)과 혼인을 해서 장인과 사위(甥舅)의 의(誼)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伯父) 억렴(億廉)에게 딸이 있는데 덕행(德行)과 용모(容貌)가 모두 아름답습니다. 왕의 아버지 효종(孝宗) 각간(角干)은 추봉(追封)된 신흥대왕(神興大王)의 아우이다. 이 사람이 아니고는 내정(內政)을 다스릴 사람이 없습니다.” 태조(太祖)가 그녀에게 장가를 드니 이가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金氏)이다 우리 왕조(王朝)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지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신성왕후(神成王后) 이씨(李氏)는 본래 경주(慶州)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합주(陜州)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태조(太祖)가 그 고을에 갔다가 그를 왕비(王妃)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그를 합주군(陜州君)이라고도 했다. 그의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이며, 3월 25일이 기일(忌日)로, 정릉(貞陵)에 장사지냈다. 아들 하나를 낳으니 안종(安宗)이다.” 이밖에 25비주(妃主) 가운데 김씨(金氏)의 일은 실려 있지 않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論)도 역시 안종(安宗)을 신라(新羅)의 외손(外孫)이라고 했으니 마땅히 사전(史傳)을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太祖)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政承公)의 딸을 맞아 왕비를 삼으니, 이가 헌승황후(憲承皇后)이다. 이에 정승공(政承公)을 봉해서 상부(尙父)로 삼았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 무인(戊寅, 978)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부(尙父)로 책봉(冊封)하는 고명(誥命)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칙(詔勅)을 내리노니 희주(姬周)가 나라를 처음 세울 때는 먼저 여상(呂尙)을 봉했고 유한(劉漢)이 나라를 세울 때에는 먼저 소하(蕭何)를 봉했다. 이로부터 온 천하(寰區)가 평정되었고 널리 기업(基業)이 열렸다. 용도(龍圖) 30대를 세우고 인지(麟趾)는 4백년을 이으니, 해와 달이 거듭 밝고 천지가 서로 조화되었다. 비록 무위(無爲)의 군주(君主)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역시 보좌(輔佐)하는 신하로 말미암았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觀光順化衛國功臣) 상주국(上柱國) 낙랑왕정승(樂浪王政承) 식읍(食邑) 팔천호(戶) 김부(金傅)는 대대로 계림(鷄林)에 살고 벼슬은 왕의 작위(爵位)를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을 업신여길 만하고 문장(文章)은 땅을 진동할 만한 재주가 있었다. 부(富)는 오랫동안 계속되었고 귀(貴)는 모토(茅土)에 거(居)했으며 육도삼략(六韜三略)은 가슴 속에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縱五申)은 손바닥 위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太祖)는 비로소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우호(友好)를 닦으시니 일찍부터 선대의 여풍(餘風)을 알았고 이내 부마(駙馬)의 인의(姻誼)를 맺어 안으로 대절(大節)로 수답(酬答)했다. 나라는 이미 통일되고 군신(君臣)이 완전히 삼한(三韓)에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규범(規範)은 빛나고 높았다.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의 칭호를 더해 주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호(號)를 주니, 훈봉(勳封)은 전과 같고 식읍(食邑)은 전후를 아울러 1만 호(戶)가 되었다. 유사(有司)는 날을 가려서 예(禮)를 갖추어 책명(冊命)하니 일을 맡은 자는 시행하도록 하라.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대광내의령 겸 총한림(大匡內議令 兼 摠翰林) 신(臣) (翮, 王融)이 선(宣), 봉(奉), 행(行) 이같이 칙(勅)을 받들었으니 첩(牒)이 이르거든 봉행(奉行)하시오.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
시중(侍中) 서명(署名), 시중(侍中)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서명(署名), 군부령(軍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무서(無署), 병부령(兵部令) 서명(署名),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署名), 광평시랑(廣評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無署), 내봉시랑(內奉侍郞) 서명(署名), 군부경(軍部卿) 무서(無署), 군부경(軍部卿) 서명(署名), 병부경(兵部卿) 무서(無署), 병부경(兵部卿) 서명(署名)
추충신의 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상부도성령(尙父都省令)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都王) 식읍일만호(食邑一萬戶) 김부(金傅)에게 고(告)하노니, 이같이 칙(勅)을 받들었으니 부신(符信)이 이르거든 봉행(奉行)하시오.
주사(主事) 무명(無名), 낭중(郎中) 무명(無名), 서령사(書令史) 무명(無名), 공목(孔目) 무명(無名). 개보(開寶) 8년(975) 10월 일에 내린다.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新羅)의 박씨(朴氏)와 석씨(昔氏)는 모두 알에서 나왔다. 김씨(金氏)는 황금(黃金) 궤(櫃) 속에 들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하며 혹은 황금수레(金車)를 타고 왔다고 하니 이것은 더욱 기괴하여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사실이라고 한다.
이제 다만 그 시초를 살펴보면 위에 있는 이는 그 자신에게는 검소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너그러웠다. 그 관직을 설치하는 것은 간략히 했고, 그 일을 행하는 것은 간소하게 했다. 성심껏 중국(中國)을 섬겨서 육로와 해로로 조빙(朝聘)하는 사신이 서로 잇달아 끊어지지 않았다. 항상 자제(子弟)들을 중국(中國)에 보내어 숙위(宿衛)하게 하고 국학(國學)에 들여보내 공부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성현(聖賢)의 풍습과 교화를 이어받고 미개한 풍속을 변혁시켜서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다. 또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를 평정하고, 그 땅을 얻어서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가히 성세(盛世)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불법(佛法)을 숭상하여 그 폐단을 알지 못하고서 마을마다 탑과 절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백성들은 모두 중이 되어 병졸과 농민이 점점 줄어들어서 나라가 날로 쇠퇴해 가니 어찌 문란해지지 않으며 멸망하지 않겠는가. 이때에 경애왕(景哀王)은 더욱 음란하고 놀기에만 바빠 궁녀(宮女)들과 좌우 근신(近臣)들과 더불어 포석정(鮑石亭)에 나가 놀며 술자리를 베풀고 즐기다가 견훤(甄萱)이 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저 문 밖의 한금호(韓擒虎)와 누각(樓閣) 위의 장려화(張麗華)와 다를 것이 없었다.
경순왕(敬順王)이 태조(太祖)에게 귀순(歸順)한 것은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또한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다. 만일 힘껏 싸우고 죽기로 지켜서 고려 군사에게 저항했더라면 힘은 꺾이고 기세는 다해서 반드시 그 가족을 멸망시키고 죄 없는 백성들에게까지 해가 미쳤을 것이다. 이에 고명(告命)을 기다리지 않고 부고(府庫)를 봉하고 군현(郡縣)을 기록하여 귀순했으니 그가 조정에 대하여 공로가 있고 백성들에게 덕이 있는 것이 매우 컸다.
옛날 전씨(錢氏)가 (吳越)의 땅을 (宋)나라에 바친 일을 소자첨(蘇子瞻)은 충신(忠臣)이라고 했으니, 이제 신라(新羅)의 공덕(功德)은 그보다 훨씬 크다고 하겠다. 우리 태조(太祖)는 비빈(妃嬪)이 많고 그 자손들도 또한 번성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外孫)으로서 왕위(王位)에 올랐으며, 그 뒤에 왕통(王統)을 계승한 이는 모두 그의 자손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그 음덕(陰德)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이미 땅을 바쳐 나라가 없어지자 아간(阿干) 신회(神會)는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왔는데 도성(都城)이 황폐한 것을 보고 서리리(黍離離)의 탄식함이 있어 이에 노래를 지었으나 그 노래는 없어져서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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