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남부여(南扶餘) 전백제(前百濟) 북부여(北扶餘) 이미 위에서 나왔다.
부여군(扶餘郡)은 전 백제(百濟)의 왕도(王都)이다.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百濟)의 성왕(聖王) 26년 무오(戊午, 548) 봄에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고 국호(國號)를 남부여(南扶餘)라고 했다”고 한다. 주(注)에서는 “그 지명(地名)은 소부리(所夫里)이니 사비(泗沘)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며 소부리(所夫里)는 부여(扶餘)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했는데, 이상은 주이다.
또 ≪양전장적(量田帳籍)≫에 의하면, “소부리군(所夫里郡) 전정주첩(田丁柱貼)”이라고 하였으므로 지금 부여군(扶餘郡)이고 말하는 것은 옛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백제(百濟) 왕의 성(姓)이 부씨(扶氏)였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혹 여주(餘州)라고도 말하는 것은, 군(郡)의 서쪽에 있는 자복사(資福寺) 고좌(高座)의 위에 수놓은 휘장(繡帳)이 있는데 그 수놓은 글에 말하기를, “통화(統和)15년 정유(丁酉, 997) 5월 일 여주 공덕대사(功德大寺) 수장(繡帳)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옛날에는 하남(河南)에 임주자사(林州刺史)를 두었는데 그때 도적(圖籍) 중에 여주(餘州)라는 두 글자가 있었으니 임주(林州)는 지금의 가림군(佳林郡)이고 여주(餘州)는 지금의 부여군(扶餘郡)이다.
≪백제지리지(百濟地理志)≫에는 ≪후한서(後漢書)≫에 있는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삼한(三韓)이 대개 78개 국(七十八國)인데 백제(百濟)는 그 가운데 한 나라이다.”
≪북사(北史)≫에서는 “백제(百濟)는 동쪽으로 신라(新羅)에 접하고 서남쪽은 큰 바다에 접하며, 북쪽은 한강(漢江)을 경계로 했는데, 그 군(郡)은 거발성(居拔城) 또는 고마성(固麻城)이라고 하며, 이 밖에 오방성(五方城)이 있다”고 하였다.
≪통전(通典)≫에서는 “백제(百濟)는 남쪽으로 신라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髙麗)에 이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혔다”고 하였다.
≪구당서(舊唐書)≫에서는 “백제(百濟)는 부여(扶夫)의 별종(別種)이다. 동북쪽은 신라(新羅)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서 월주(越州)에 이른다. 남쪽은 바다를 건너서 왜국(倭)에 이르고 북쪽은 고구려(髙麗)이다. 그 왕이 거처하는 곳에 동서(東西)의 두 성이 있다”고 하였다.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백제(百濟)는 서쪽으로 월주(越州)와 남쪽으로는 왜국(倭)과 경계하는데 모두 바다를 건너게 되며, 북쪽은 고구려(髙麗)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백제(百濟)의 시조는 온조(溫祚)이니, 그의 아버지는 추모왕(雛牟王)인데, 혹은 주몽(朱蒙)이라고도 한다. 주몽(朱蒙)은 북부여(北扶餘)에서 난리를 피하여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그곳 왕에게 아들이 없고 다만 딸이 세 명 있었는데, 주몽(朱蒙)을 보자 보통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둘째 딸을 아내로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부여주(扶餘州)의 왕이 죽자 주몽(朱蒙)이 왕위를 이어받았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는 비류(沸流)이고 다음은 온조(溫祚)다. 그들은 후에 태자(太子)에게 용납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여 명 신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들도 이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이 있는가 찾아보았다. 비류(沸流)가 바닷가에 살기를 바라니 열 명의 신하들은 간하기를, ‘오직 이 하남(河南)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漢水)를 띠며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비옥한 못을 바라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가 가로놓여 있어서 천험(天險)과 지리(地利)가 좀처럼 얻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니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비류(沸流)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弥雛忽)에 가서 살았다. 온조(溫祚)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여 열 명의 신하를 보필(輔弼)로 삼아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때가 한(漢)나라 성제(成帝) 홍가(鴻佳) 3년이었다. 비류(沸流)는 미추홀(弥雛忽)의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서 편안하게 살 수가 없었다. 위례성(慰禮城)에 와보니 도읍(都邑)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히 살고 있으므로 마침내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며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은 모두 위례성(慰礼城)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백성들이 올 때에 기뻐하였다고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라고 고쳤다.
그 세계(世系)는 고구려(髙句麗)와 마찬가지로 부여(扶餘)에서 나왔으므로 해(解)로써 성씨를 삼았다. 그 뒤 성왕(聖王) 때에 이르러 도읍을 사비(泗沘)로 옮기니 지금의 부여군(扶餘郡)이다. 미추홀(弥雛忽)은 인주(仁州)이고, 위례(慰礼)는 지금의 직산(稷山)이다.”
≪고전기(古典記)≫를 살펴 보면 이러하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는 전한(前漢) 홍가(鴻佳) 3년 계유(癸酉, 서기전 18년)에 졸본부여(卒夲扶餘)로부터 위례성(慰礼城)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왕이라고 칭하였다. 14년 병진(丙辰)에 도읍을 한산(漢山) 지금의 광주(廣州)으로 옮겨 389년을 지냈으며, 13대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인 함안(咸安) 원년(元年, 371)에 이르러 고구려(髙句麗)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도읍을 북한성(北漢城) 지금의 양주(楊州)로 옮겨 105년을 지냈다. 22대 문주왕(文周王)이 즉위하여 원휘(元徽) 3년 을묘(乙卯, 475)에는 도읍을 웅천(熊川) 지금의 공주(公州)로 옮겨 63년을 지내고, 26대 성왕(聖王) 때에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로 옮기고 나라 국호(國號)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여 31대 의자왕(義慈王)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
당(唐)나라 현경(顯慶) 5년에 이르러, 이 해는 의자왕(義慈王)이 왕위에 오른 지 20년이 되던 해이며,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이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百濟)를 쳐서 평정하였다. 백제(百濟)에는 본래 다섯 부(部)가 있어 37군 200여 성 76만 호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당(唐)나라는 그 땅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蓮)·덕안(德安) 등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그 추장(酋長)들을 도독부(都督府) 자사(刺史)를 삼았다. 얼마 안 되어 신라(新羅)가 그 땅을 모두 병합하고서 웅주(熊州)·전주(全州)·무주(武州) 등 세 주와 여러 군현을 두었다.
또 호암사(虎嵓寺)에는 정사암(政事嵓)이 있다. 국가에서 장차 재상(宰相)을 의논할 때에 뽑을 만한 사람 서너 명의 이름을 써서 상자에 넣고 봉하여 바위 위에 두었다가 얼마 후에 열어 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힌 자국이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또 사비의 물가변(泗沘河过)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소정방(蘇定方)이 일찍이 그 바위 위에 앉아서 물고기와 용(魚龍)을 낚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바위 위에는 용이 꿇어앉았던 자리가 있다고 하여 그 바위를 용암(龍嵓)이라고 한다.
또 군 안에는 세 개의 산이 있는데 일산(日山)·오산(吳山)·부산(浮山)이라고 한다. 백제(百濟)가 전성(全盛)하던 때에는 각각 신인(神人)이 그 산 위에 살았는데, 날아서 서로 왕래하기를 아침 저녁(朝夕)으로 끊이지 않았다.
또 사비(泗沘)의 절벽(崖)에 또 바위 하나가 있어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백제 왕(百濟王)이 왕흥사 (王興寺)에 가서 예불(禮佛)하려고 할 때는 먼저 이 돌에서 부처를 바라보고 절을 하니 그 돌이 저절로 따뜻해졌으므로 돌석(㷝石)이라고 한다.
또 사비하(泗沘河)의 양쪽 언덕은 마치 그림 병풍과 같아서 백제 왕(百濟王)이 매양 그곳에서 잔치를 열고 노래하고 춤추었으므로 지금도 대왕포(大王浦)라고 부른다.
또 시조(始祖) 온조왕(温祚王)은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로서 몸이 크고 성품이 효도와 우애가 있었으며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잘하였다.
또 다루왕(多婁王)은 너그럽고 후하여 위엄과 인망이 있었다.
또 사비왕(沙沸王) 또는 사이왕(沙伊王)은 구수왕(仇首王)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했으나 나이가 어려서 정사를 보살필 수가 없었으므로 즉시 폐하고 고이왕(古爾王)을 세웠다. 혹은 낙초(樂初) 2년 기미(己未)에 사비왕(沙沸王)이 죽자 고이왕(古爾王)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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