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묘
부인유씨 묘
우측문인석
좌측망주석
우측망주석
장명등
남양주 광해군 묘 사적363호
소 재 지;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337-4
조선 15대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과 문성군 부인 유씨(文成郡夫人柳氏)의 무덤이다. 봉분이 두개인 쌍분이며, 무덤 주변에는 석물들이 있다. 광해군(光海君)은 선조(宣祖)의 차자(次子)이며 후궁(後宮) 공빈김씨(恭嬪金氏)의 소생(所生)이다. 선조(宣祖) 8년(1575)에 태어났으며 휘(諱)는 혼(琿)이다. 형(兄)인 임해군(臨海君) 대신 세자(世子)로 책봉되고 1608년 즉위(卽位)하였다. 즉위초에는 당쟁(黨爭)의 폐를 알고 당쟁을 억제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이에 휩쓸려 임해군(臨海君), 영창대군(永昌大君), 김제남(金悌男) 인목대비(仁穆大妃)의 부(父) 등을 역모(逆謀)로 몰아 죽이고,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 경희궁(慶熙宮))에 유폐시키는 등 패륜행위(悖倫行爲)가 많았으며 정치(政治)도 문란해져서 이귀(李貴), 김류(金瑬), 최명길(崔鳴吉), 김자점(金自點) 등에 의해 폐위(廢位)되고 능양군(綾陽君) 종(悰)을 받들어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은 대궐 뒷문으로 피신하여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서 체포되어 서인(庶人)으로 내리는 동시에 강화(江華)로 귀양보내졌다. 그후 다시 제주도(濟州道)로 유배시켰는데 인조(仁祖) 19년(1641) 7월에 사망하자 그곳에 묻혔다가 인조(仁祖) 21년(1643)에 지금의 묘소(墓所)에 천장(遷葬)되었다. 문성군부인유씨(文成郡夫人柳氏)는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유자신(柳自新)의 딸로 선조(宣祖) 31년(1598)에 태어났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卽位)하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고 광해군(光海君)과 같이 폐위(廢位)되어 강화(江華)로 함께 유배(流配) 당하였으며 유씨(柳氏)는 이곳에서 인조원년(仁祖元年, 1623년) 10월 8일 사망하였다. 인조원년(仁祖元年) 10월 30일 양주군(楊州郡) 적성동에 장사(葬死)했다가 광해군사후(光海君死後) 같은 묘역(墓域)에 천장(遷葬)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은 재위 15년 동안 임진왜란 이후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적 편찬과 대동법 실시, 국방력 강화 등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다. 기록은 광해군묘비명(光海君墓碑名)이 '광해군지묘(光海君之墓)'이고 비후면(碑後面)에 '신사칠월초일일병졸어제주명철조삼일(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命輟朝三日)'이라 새겨져 있다.
※명칭변경; 광해군 묘 → 남양주 광해군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