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3(仁宗三) 18

 

〈경신〉 18년(1140) 봄 정월 계미. 금(金)에서 태주관내관찰사(泰州管內觀察使) 완안병(完顔昺)을 사신으로 보내어 와서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을유. 금(金) 사신에게 대관전(大觀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2월 임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치사(致仕)한 김약온(金若溫)이 사망하였다.

갑자.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하였다.

갑술. 진경보(陳景甫)를 상서우복야 상장군(尙書右僕射 上將軍)으로, 윤진(尹珍)을 병부상서 상장군(兵部尙書 上將軍)으로 삼았다.

3월 병자. 초하루 〈왕이〉 나가서 흥왕사(興王寺) 천복원(薦福院)에 거둥하였다.

정유.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여름 4월 을사. 초하루 임원애(任元敱)를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로, 이중(李仲)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최진(崔溱)을 우복야 판형부사(右僕射 判刑部事)로, 임원숙(任元淑)을 예부상서 첨서추밀원사(禮部尙書 簽書樞密院事)로 삼았다.

갑인. 왕이 새 궁궐로 돌아왔다.

정묘. 왕이 태묘(大廟)에서 친히 체제(禘祭)를 지내고 구묘(九廟)에 존호와 시호를 더하여 올렸으며, 또한 12릉(陵)에 사자를 보내어 대왕(大王)과 왕후(王后)의 존호와 시호를 더하여 올렸다. 궁궐로 돌아온 뒤 궐정(闕庭)에 거둥하여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짐은 역대 조종의 중대한 왕업을 계승하여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면서 감히 편안히 지내지 않았다. 생각하건대 덕이 부족하여[不類] 많은 어려운 때를 만났는데 지난번에는 서경 백성들이 아무 이유 없이 난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부득이하여 군대를 보내 죄를 묻게 되었고 조종께서 손을 빌려 힘을 보태주심에 죄인들을 주살하고 유배 보낼 수 있어 서경 지방은 다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지금 몸소 체향(禘享)을 지내고 존호와 시호를 더하는 아름다운 행사가 있었기에 많은 은택이 중외에 모두 베풀어지길 바란다. 공적인 죄로 유배형[公流]을 받은 죄수와 개인적인 죄로 도형[私徒]을 받은 죄수 이하는 모두 풀어주도록 할 것이며, 〈참형과 교형 등〉 이죄(二罪) 이상 죄인은 형을 면제하여 유배 보내고, 이미 유배 중인 자는 형량을 헤아려 형편이 좋은 가까운 곳으로 옮기도록 할 것이다[量移].”
라고 하였다.

5월 병자. 금(金) 동경(東京) 지예빈사사(知禮賓司事) 왕고(王杲)가 보빙사(報聘使)로 왔다. 

무술. 팽희밀(彭希密) 등에게 급제를 내렸다.

6월 갑진. 초하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무오. 왕이 대관전(大觀殿)에서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윤6월 정해. 금명전(金明殿)에서 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을 열고 비를 내려달라고 빌었다.

기축. 무당을 모아 다시 비를 빌었다.

신묘. 왕이 친히 법운사(法雲寺)에서 비를 빌었다.

임진.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정유. 선경전(宣慶殿)에서 초제(醮祭)를 지내어 비를 빌었다.

무술. 왕이 친히 외제석원(外帝釋院)에서 비를 빌었다.

가을 7월 경오.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8월 무인.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최유(崔濡)가 사망하였다.

정유.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하였다.

9월 무신. 왕이 안화사(安和寺)에 갔다.

임자. 왕이 보제사(普濟寺)에 행차하였다.

을묘. 죄수를 재심사하였다.

겨울 10월 무술. 명인전(明仁殿)에서 5일간 불정도량(佛頂道場)을 열었다.

경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박순충(朴純冲)을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왕의 생신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례하였다.

11월 정미.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 황주첨(黃周瞻)을 금(金)에 사신으로 보내어 신년을 하례하게 하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최함(崔諴)은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12월 병인. 이지저(李之氐)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김정순(金正純)을 병부상서(兵部尙書)로, 왕충(王冲)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았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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