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양이목(寶壤梨木)


석(釋) 보양전(寶壤傳)에는 그의 고향과 씨족(氏族)을 싣지 않았다. ≪청도군사적(淸道郡司籍)≫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천복(天福) 8년 계유(癸酉) 태조 즉위 26년 정월 모일에 청도군(清道郡) 경계 마을의 심사(審使) 순영(順英)과 대내말(大乃末) 수문(水文) 등의 주첩(柱貼) 공문(公文)에 운문산(雲門山) 선원(禪院) 장생(長生) 남쪽은 아니점(阿尼岾), 동쪽은 가서현(嘉西峴)이라고 했고, 그 사원의 삼강전(三剛典) 주인(主人)은 보양화상(寶壤和尙)이고, 원주(院主)현회장로(玄會長老), 정좌(貞座)현양상좌(玄兩上座), 직세(直歲)는 신원선사(信元禪師)라고 하였다. 위의 공문 청도군(清道郡)의 「도전장전(都田帳傳)」에 의거하였다.
또한 개운(開運) 3년 병진(丙辰, 946)에 운문산(雲門山) 선원(禪院) 장생표탑(長生標塔) 공문 한 통에 장생(長生)이 열하나이니, 아니점(阿尼岾), 가서현(嘉西峴), 묘현(畝峴), 서북매현(西北買峴) 혹은 면지촌(面知村), 북저족문(北猪足門) 등이라 하였다.
또 경인년(庚寅年)의 ≪진양부첩(晉陽府貼)≫에는 5도 안찰사(五道按察使)가 각 도의 선교(禪敎) 사원의 창건 년월, 형지(形止)를 살펴서 장적을 만들 때에 차사원(差使員) 동경장서기(東京掌書記) 이선(李僐)이 살펴서 기록하였다고 한다.
정풍(正豊) 6년 신사(辛巳, 1161) 대금(大金)의 연호이니 고려(夲朝) 의종(毅宗) 즉위 16년이다. 9월의 ≪군중고적비보기(郡中古籍裨補記)≫에 따르면 청도군(清道郡) 전 부호장(前副戸長) 어모부위(禦侮副尉) 이칙정(李則楨)의 집에 옛사람의 소식과 우리말로 전하는 기록이 있었고, 치사(致仕)한 상호장(上戶長) 김양신(金亮辛)·치사(致仕)한 호장(戶長) 민육(旻育)·호장(戶長) 동정(同正) 윤응(尹應)·전기인(前其人) 진기(奇) 등과 당시 상호장(上戶長) 용성(用成) 등의 말이 적혀 있는데, 당시 태수(太守) 이사로(李思老)·호장(戶長) 양신(亮辛)은 나이 89세이었고 나머지 무리는 모두 70세 이상이었으며 용성(用成)은 나이가 60세 이상이라고 하였다. 운운(云云)한 것은 다음에는 따르지 않는다.
신라(新羅)시대 이래로 청도군(清道郡)의 사원 작갑사(鵲岬寺) 이하 중소 사원(寺院)삼한(三韓)의 병란 중에 대작갑(大鵲岬), 소작갑(小鵲岬), 소보갑(所寶岬), 천문갑(天門岬), 가서갑(嘉西岬) 등 5갑(五岬)이 모두 훼손되어 5갑(五岬)의 기둥만 모아 대작갑사(大鵲岬)에 두었다.
조사(祖師) 지식(知識)이 중국(大國)에서 법을 전해 받고 돌아오는데 서해(西海) 중간에 이르니, 윗 글에는 보양(寶壤)이라 하였다. 용(龍)이 맞이하여 용궁에 들여서 경전을 염송하게 하고 금라가사(金羅袈裟) 1령을 베풀어주고 겸하여 아들 이목(璃目)을 시봉하여 쫒아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말하였다. “지금 삼국(三國)이 혼란하여 아직 불법(佛法)에 귀의(歸依)한 군주(君主)가 없었다. 만약 내 아들과 함께 본국(夲國)에 돌아가서 작갑(鵲岬)에 절을 세우고 거하면, 도적을 피할 수 있고 수년이 지나지 않아 또한 물리칠 수 있고, 반드시 불법(佛法)을 지키는 어진 군주(君主)가 나와 삼국(三國)을 평정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골짜기에 이르니 홀연히 노승(老僧)이 나타났는데 스스로를 원광(光)이라 칭하였고, 인궤(印櫃)를 품에 안고 있다가 꺼내주고 사라졌다. 살펴보건대, 원광(光)(陳)나라 말에 중국(中國)들어가 개황(開皇) 연간에 본국으로 돌아와서 가서갑(嘉西岬)주석하고 황륭사(皇隆)에서 죽었다. 계산하면 청태(淸泰) 연간 초엽에 이르니 무려 300년이다. 지금 여러 갑사(諸岬)들이 모두 없어진 것을 슬퍼하고 보양(寶壤)이 와서 장차 일어날 것을 기쁘게 바라보고 고로 그것을 알린 것이다.
이에 보양(寶壤)이 장차 폐사를 일으키려 북쪽 고개에 올라 바라보니 뜰에 5층의 황색 탑(五層黄塔)이 있었다. 내려와 그것을 찾으니 곧 흔적이 없었다. 다시 가서 바라보니 까치(鵲) 무리가 땅을 쪼고 있으므로 이에 해룡(海龍)이 한 작갑(鵲岬)의 말을 기억하고는 그곳을 파보니 과연 남겨진 벽돌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었고 그것을 모아 높게 쌓아 탑을 이루고 남긴 벽돌이 없었으니 이곳이 전시대의 가람터(伽藍墟)인 것을 알았다. 절을 창건하는 것을 마치고 주석하고 작갑사(鵲岬寺)라 이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조(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하고 법사()가 여기에서 절을 창건하고 거한다는 것을 듣고 이에 5갑(五岬)의 밭 5백결(五百結)을 합하여 절에 헌납하였다. 청태(淸泰) 4년 정유(丁酉, 937)에 편액을 내려 운문선사(雲門禪寺)라 하고 가사(袈裟)의 영음(䕃)을 받들게 하였다.
이목(璃目)은 항상 절 옆의 작은 못에 있으며 남몰래 교화를 도왔고, 문득 어느 해에 가뭄이 들어 밭의 곡식이 말라 타들어가자 보양(寶壤)이목(璃目)에게 비를 내리게 했더니 한 지역에서 족함을 고하였다. 천제(天帝)는 직무를 수행하지 못했다고 장차 주살하고자 하니 이목(璃目)법사()에게 위급함을 고하였다. 법사()가 책상 아래에 숨겨주니 조금 뒤에 천사(天使)가 뜰에 와서 이목(璃目)을 내어놓기를 청하였다. 법사()가 뜰 앞의 오얏나무(梨木)를 가리키자 이에 그것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오얏나무(梨木)가 꺾여 넘어졌는데 용(龍)이 그것을 쓰다듬자 곧 살아났다. 일설에는 법사()가 주문을 외우자 살아났다고 한다. 그 나무는 근년에 땅에 쓰러져서 어떤 사람이 빗장 몽치(椎)로 만들어 선법당(善法堂)과 식당(食堂)에 두었고, 그 몽치() 자루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처음 법사()당(唐)에 갔다 돌아와 먼저 추화군(推火郡)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마침 태조(太祖)가 동쪽을 정벌하여 청도(淸道)의 경계에 이르렀는데, 산적(山賊)이 견성(犬城)에 모여 있었는데 교만하여 격살하지 못하였다. 산봉우리가 물줄기에 임하여 가파르게 서 있어서 지금 세상에서 그것을 나쁘게 여겨 이름을 견성(犬城)으로 고쳤다. 태조(太祖)가 산 아래에 이르러 법사()에게 쉽게 제압하는 방법을 물으니 법사()가 답하여 말하였다. “무릇 개(犬)의 본성은 밤의 일은 맡고 낮의 일은 맡지 않아서 앞을 지키고 그 뒤를 잊고 있으니 마땅히 낮에 그 북쪽을 쳐야 합니다.” 태조(太祖)가 그를 따르니 과연 항복하였다. 태조(太祖)가 그 신통한 지략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현(縣)의 조(租) 50석을 지급하여서 향화(香火)를 이바지하게 했다. 이로써 절에 이성(二聖)의 진용(眞容)을 안치하였고 인하여 봉성사(奉聖寺)라 이름하였다. 후에 작갑사(鵲岬寺)로 옮겨가서 절을 크게 세우고 죽었다.
법사()의 행장(行状)은 옛 전승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민간에 이르기를 “석굴사(石崛寺)의 비허사(備虛師) 혹은 비허(毗虛)와 형제가 되는데, 봉성(奉聖)·석굴(石崛)·운문(雲門) 세 절은 봉우리를 이어 쭉 늘어져 있어서 서로 왕래하였다”라고 한다. 후대의 사람이 ≪신라이전(新羅異傳)≫을 고쳐 쓰면서 작탑(鵲塔)과 이목(璃目)의 일을 원광(圎光)의 전기 속에 함부로 기록하였고, 견성(犬城)의 일은 비허전(毗虛傳)에 걸어놓았으니 이미 잘못된 것이다. 또한 ≪해동승전(海東僧傳)≫을 쓴 사람은 그것을 따라 잘못 썼다. 그 때문에 보양(寶壤)은 전(傳)이 없어 후대 사람들을 의심하고 그르치게 하였으니 무망(誣妄)함을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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