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권(券第四) 


의해(意解) 제5(第五) 


원광서학(光西學)


(唐) ≪속고승전(續高僧傳)≫ 제13권에 실려 있다. 신라(新羅) 황륭사(皇隆寺)의 석(釋) 원광(光)의 속성(俗姓)은 박씨(朴氏)이고 본래 삼한(三韓)에 살았다. 변한(卞韓)·진한(辰韓)·마한(馬韓)으로 원광(圓光)은 곧 진한(辰韓) 사람이다. 집안은 대대로 해동(海東)에서 이어져 조상의 전통을 받들어 길게 이어왔고 비범한 기량을 널리 펼치고 문장을 탐애하여 도학과 유학을 섭렵하고 자사(子史)를 연구하여 문장은 삼한(三韓)에 떨쳤으나 박학함은 오히려 중원(中原)에 부끄러웠다. 드디어 부모와 벗과 헤어져 바다를 건너기로 마음을 먹어 나이 25세에 배를 타고 금릉(金陵)에 이르니 (陳)의 치세로 문(文)의 나라라고 칭하여서 전에 의문이 들었던 것을 자문하고 상고하고 진실된 뜻을 알 수 있었다. 처음 장엄사(莊嚴寺) 민공(旻公) 제자의 강의를 들었고 본래 세상의 전적(典籍)을 두루 섭렵하여 이치를 말함에 신비한 것을 궁구하였고, 불법을 들음에 미쳐서는 도리어 썩은 풀과 같이 여겼다. 명교(名教)를 헛되이 찾아 실로 생애를 위태롭게 하여서 이에 (陳)의 황제에게 도법(道法)에 귀의하기를 청하니 칙명으로 허락하였다.
이미 이에 처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고 강사를 돌아다니며 고명한 계책을 다 갖추고 미묘한 언어를 습득하였고 날짜를 허비하지 않았다. 고로 성실(成實)열반(涅槃)을 얻어 마음에 쌓아두고, 삼장(三藏)과 석론(釋論)이 찾아낸 바를 얻었다. 후에는 또 (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염정(念定)을 서로 따르고 각관(覺觀)을 잊음이 없었다. 사문의 무리들이 임천(林泉)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아울러 ≪사함(四含)≫을 모두 섭렵하고 공효(功效)가 팔정(八定)에 들어갔으며 명선(明善)을 쉽게 습득하고 통직(筒直)이 어그러지지 않았다. 평상시 갖고 있는 마음에 몹시 맞아서 드디어 이곳에서 생을 마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인사(人事)를 끊고 성인의 자취를 두루 유람하며 청소(靑霄)를 생각하였고 영원히 속세를 멀리하였다.
이때에 어떤 신사(信士)가 산 아래 살고 있었는데 원광(圓光)에게 나와서 강의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끝내 맞이하려 힘쓰므로 드디어 그 뜻을 따랐다. 처음에 ≪성실론(成實論)≫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般若經)≫을 강의했는데 모두 사해(思解)가 뛰어나게 통하니 좋은 질문을 주고 받고, 겸하여 아름다운 수사로써 말과 뜻을 엮으니 듣는 사람들은 매우 기뻐하였으며 그 마음에 들어맞았다.
이로부터 예전의 법에 따라 중생을 개도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매번 법륜(法輪)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문득 세간을 기울어지게 하였다. 비록 이는 이역(異域)에서의 통전(通傳)이지만, 도에 젖어 싫어하고 꺼리는 것이 없으므로 명망이 널리 퍼져 영표(嶺表)까지 전파되니 덤불을 헤치고 바랑을 지고 이르는 자가 서로 고기비늘처럼 잇달았다.
때마침 (隋)나라가 천하를 통치하니, 그 위엄이 남쪽 나라에까지 미쳤다. 진(陳)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隋)나라 군사가 양도(揚都)에까지 들어오니 드디어 난병(亂兵)에게 사로잡혀 장차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수(隋)의 대장(大將)이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고 달려가 그를 구하려 하니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圓光)이 탑 앞에 있는데 결박되어 있어서 장차 죽음을 당하려 하는 것만 보았다. 그 기이함을 이상하게 여겨 곧 풀어서 놓아주었다. 그 위태로움에 임하여 감응이 이른 것이 이와 같았다.
원광(圓光)은 학문이 오(吳)·월(越)을 통달해서 곧 주(周)와 진(秦)의 문화를 보고자 개황(開皇) 9년(589)에 수(隋)나라의 수도에 유학(遊學)하였다. 마침 불법의 초회(初會)를 당해 섭론(攝論)이 비로소 일어나니 문언(文言)을 받들어 지니고 미서(微緖)를 떨쳐 이었다. 또한 혜해(慧解)를 달려 이름을 수(隋)나라 수도에까지 펼쳤다.
학문이 이미 이루어지자 동쪽으로 가서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신라(新羅)가 멀리에서 이를 듣고 황제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자주 청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위로를 더해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원광(圓光)이 갔다가 돌아온 것이 수년이 되니 늙은이도 아이도 서로 기쁜 마음으로 받들었다. 신라왕(新羅王) 김씨(金氏)는 대면하고 공경하여 성인과 같이 받들었다.
원광(圓光)은 성품이 허한(虛閑)하고 심정은 널리 사랑하는 것이 많았으며 말을 할 때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결코 노한 빛을 띠지 않았다. 그리고 상표문(牋表), 계서(啓書) 오고가는 국서는 그의 심중에서 나왔으며 하나라도 극진히 받들어 모두 다스리는 방향을 맡겼으며 도화(道化)하는 것을 물었다. 사정은 금의환향(錦衣還鄕)한 것과 달랐으나 실정은 중국의 국정을 돌아보고 온 것과 같았다. 기회를 타서 훈계를 하여 지금에도 모범을 드리웠다.
나이가 이미 많아지자 수레를 타고 궁궐에 들어갔다. 의복과 약·음식을 왕이 손수 마련하고 옆에서 돕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복을 혼자 받으려고 하였으니 그 감복하고 공경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장차 생을 마치기 전에 왕이 친히 손을 잡고 위문하며 누차 법을 남기고 겸하여 백성을 구제할 것을 부탁하니, 원광(圓光)이 상서로움을 말하여 그 공덕이 바다 구비에까지 미치었다.
그가 건복(建福) 58년(680)에 약간 근심을 느꼈다. 7일이 지나 계(誡)를 남겼는데 대단히 맑았고, 살고 있는 황륭사(皇隆寺) 안에서 꼿꼿이 앉아 죽음을 맞았다. 나이가 99세였으니 곧 당(唐)나라 정관(貞觀) 4년(630년)이다. 마땅히 14년이라 해야 한다. 죽음을 맞이할 때 절의 동북쪽 허공에서 음악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기이한 향기가 절에 가득 차니 도인과 속인들이 슬퍼하며 경사스럽게 여겼으며 그 영험한 감응을 알았다. 드디어 교외(郊外)에 장사를 지내니 나라에서 우의(羽儀)와 장례용구(葬具)를 지급하여 왕의 장례와 같이 하였다.
후에 속인(俗人)이 아이가 태내에서 사산된 것이 있었는데, 그 지역의 속설에 “복이 있는 사람의 무덤에 그것을 매장하면 자손이 끊기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에 은밀히 무덤의 옆에 묻으니 그날 이 태아의 시신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던져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공경하지 않던 자도 모두 숭앙하게 되었다.
제자 원안(圓安)이 있었는데 정신이 지혜롭고 기지가 빼어났다. 성품이 유람하는 것을 좋아하여 도를 구하는 것을 바랐다. 드디어 북쪽으로 환도(丸都)로 가고 동쪽으로 불내(不耐)를 보고 또 서쪽으로 연(燕)과 위(魏)를 지나 후에 황제가 있는 수도에까지 갔다. 지방의 풍속을 꿰뚫고 여러 경론(經論)을 찾아 대강(大綱)을 섭렵하고 섬세한 뜻까지 통달하였다. 늦어서야 심학(心學, 불교)에 귀의했는데 세속 사람보다 자취가 높았다. 처음 수도의 절에 있었는데 순박한 덕행으로 유명해져서 특진(特進) 소우(蕭瑀)가 주청하여 남전(藍田)에 조영된 진량사(津梁寺)에 머물게 하였으며 수행 중에 필요한 4가지 물건을 공급함에 육시(六時)에 끊김이 없었다.
원안(圓安)은 일찍이 원광(圓光)에 대해 서술하여 말하였다. “본국왕(夲國王)이 병환이 나서 의원이 치료하여도 낫지 않아 원광(圓光)이 입궁할 것을 청하여 별성(別省)에 안치하고 밤에 2시간씩 심법(深法)을 설하여 계(戒)를 받고 참회하게 하니, 왕이 크게 신봉하였다. 어느 날 초저녁에 왕이 원광(圓光)의 머리를 보니 금빛이 빛나고 일륜(日輪) 모양이 몸을 따라서 이르렀다. 왕후(王后)와 궁녀(宫女)가 함께 그것을 보았다. 이로 말미암아 거듭 승심(勝心)을 발하여 굳이 병실에 머물게 하였더니 오래지 않아 드디어 차도가 있었다. 원광(圓光)진한(辰韓)·마한(馬韓) 안에서 정법(正法)을 두루 폈는데, 해마다 두 번 강론을 하여 후학(後學)을 양성하였다. 보시로 받은 재화는 절을 짓는 데 충당하여 남은 것은 오직 의복과 바리뿐이었다. ≪달함(達函)≫에 수록되어 있다.
동경(東亰) 안일호장(安逸戸長) 정효(貞孝) 집에 있는 고본(古夲)수이전(殊異傳)≫에 실린 원광법사전(圎光法師傳)에 말한다. “법사(法師)의 속성(俗姓)은 설씨(薛氏)로 왕경인(王亰人)이다. 처음 중이 되어 불법(佛法)을 배웠고 나이 30세에 조용히 머물면서 도를 닦을 것을 생각하여 홀로 삼기산(三岐山)에 살았다.
4년 후 한 비구(比丘)가 와서 거처와 멀지 않은 곳에 별도로 난야(蘭若)를 만들고 2년을 거하였는데 사람됨이 강맹(強猛)하고 주술(呪述)을 잘 하였다. 법사(法師)가 밤에 홀로 앉아 경전을 독송하는데 홀연히 신비로운 소리가 그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잘하는도다. 잘하는도다. 너의 수행이여! 무릇 수행하는 자는 비록 많으나 법대로 하는 자는 드물다. 지금 옆에 사는 비구(比丘)를 보니 빠르게 주술(呪述)을 닦지만 얻는 바가 없으니 시끄러운 소리는 남의 정념(靜念)을 괴롭히고, 사는 곳은 내가 지나는 길로 매일 가고 오고 하는데 약간 미운 마음이 생긴다. 법사(法師)는 나를 위하여 말해서 옮겨가게 하라. 만약 오래 거하면 내가 문득 죄업을 만들까 두렵다.” 다음날 법사(法師)가 가서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에 신의 말을 들었는데, 비구(比丘)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 재앙이 있을 것이다.” 비구(比丘)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수행이 지극한 자가 어찌 마귀에 현혹되는 바가 되는가? 법사(法師)는 어찌 여우 귀신(狐鬼)의 말을 걱정하는가?” 그날 밤에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내가 말한 일에 대해 비구(比丘)가 어찌 대답하였는가?” 법사(法師)는 신이 노할까 두려워 대답하였다. “아직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굳이 말한다면 어찌 감히 듣지 않겠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내가 이미 다 들었다. 법사(法師)는 어찌 말을 더하는가? 단지 잠자코 있어 내가 하는 바를 보아라.” 드디어 작별하고 갔다. 밤중에 우뢰와 벼락 같은 소리가 나서, 다음날 그것을 보니 산이 무너져 비구(比丘)가 있었던 난야(蘭若)를 메우고 있었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法師)가 보니 어떠한가?” 법사(法師)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보니 심히 놀랍고 두렵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내 나이는 거의 삼천년에 가깝고 신통력이 가장 성하니 이 작은 일이 어찌 놀래기에 족하겠는가. 또한 장래의 일도 알지 못하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은 도달하지 않는 바가 없다. 지금 생각건대 법사(法師)가 오직 이 곳에 거한다고 하더라도 비록 스스로 이로운 행동은 있을 것이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공(功)은 없을 것이다. 현재 고명(高名)을 드높이지 않으면 미래에 승과(勝果)를 얻지 못할 것이다. 어찌 중국(中國)에서 불법(佛法)을 채득하여 동해(東海)에서 몽매한 중생을 이끌지 않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중국(中國)에서 도(道)를 배우는 것은 본디 바라는 바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 능히 스스로 통하지 못할 뿐입니다.” 신이 중국(中國)으로 들어갈 때 하는 바의 계책을 자세히 알려주니 법사(法師)는 그 말에 따라 중국(中國)으로 갔다. 11년을 머물렀는데 삼장(三藏)을 널리 통달하였고 겸하여 유학(儒學)을 배웠다.
진평왕(真平王) 22년 경신(庚申, 600)법사(法師)가 장차 지팡이에 의지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려 하여 이에 중국(中國) 조빙사(朝聘使)를 따라 귀국하였다. ≪삼국사(三囯史)에는 다음해 신유(辛酉)에 왔다고 한다. 법사(法師)가 신에게 감사하고자 하여 전에 살던 삼기산(三岐山)의 절에 이르니 밤중에 신이 또 와서 그 이름을 부르며 말하였다. “바다와 육지의 길 사이를 갔다 돌아오니 어떠한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신의 큰 은혜를 입어 평안히 돌아오기를 마쳤습니다.” 신이 말하였다. “나 또한 신에게 계(戒)를 받아 세세생생에 서로 구제하는 약속을 맺었다.” 또한 부탁하여 말하기를 “신의 진용(真容)을 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신이 말하였다. “법사(法師)가 만약 나의 모습을 보고자 한다면 내일 아침에 동쪽하늘 끝을 보라.” 법사(法師)가 다음날 그곳을 바라보니 큰 팔이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신이 또 와서 말하였다. “법사(法師)는 내 팔을 보았는가?” 대답하여 말하였다. “이미 보았는데 매우 기이하였습니다.”인하여 이 골짜기를 비장산(臂長山)이라고 불렀다. 신이 말하였다. “비록 이 몸이 있으나 무상(無常)의 해(害)는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오래되지 않아 그 고개에 몸을 버릴 것이다. 법사(法師)는 와서 멀리 떠나는 혼을 전송하라.” 약속한 날짜를 기다려가서 보니 한 검은 늙은 여우(老狐)가 있었는데 검기가 칠흑 같았다. 단지 헐떡거리다가 숨을 쉬지 않고 조금 뒤에 죽었다.
법사(法師)가 처음 중국(中國)에서 돌아오니 신라(新羅)의 왕과 신하가 법사(法師)를 공경하며 스승으로 삼았다. 항상 대승경전(大乗経典)을 강론하였다. 이때 고구려(高䴡)·백제(百濟)가 항상 변경을 침입하니 왕이 그것을 매우 근심하여 (隋)나라에 병사를 청하고자 법사(法師)에게 걸사표(乞師, 乞兵表)를 지을 것을 부탁하였다. 당(唐)이라고 써야 마땅하다. 황제(皇帝)가 이를 보고 30만 병사로 고구려(高䴡)를 친히 정벌하였다. 이로부터 법사(法師)가 유학(儒學)에도 두루 통달함을 알게 되었다.
향년(享年) 84세에 입적하였고 명활성(明活城) 서쪽에 장사지냈다.”
또한 ≪삼국사(三國史)≫ 열전(列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어진 선비 귀산(貴山)이라는 자는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같은 마을 추항(箒項)과 벗이 되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군자(士君子)와 더불어 교유하고자 기약하였으나 먼저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지키지 않으면 곧 모욕당함을 면치 못할 것이다. 현자(賢者)의 곁에서 도를 묻지 않겠는가?”하였다. 이때 원광법사(光法師)수(隋)나라에 갔다 돌아와 가슬갑(嘉瑟岬)에 머문다는 것을 들었다. 혹은 가서(加西) 또는 가서(嘉栖)라고도 하는데 모두 방언이다. 갑(岬)은 세상에서 말하기를 고시(古尸)라고 하므로 혹은 고시사(古尸寺)라고도 하는데 갑사(岬寺)와 같은 말이다. 지금 운문사(雲門寺) 동쪽 9천 보 가량에 가서현(加西峴)이 있는데 혹은 가슬현(嘉瑟峴)이라고도 한다. 현의 북쪽 골짜기에 그 절터가 있으니 바로 이것이다. 두 사람은 문에 나아가 고하여 말하였다. “속사(俗士)는 몽매하여 아는 바가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씀 내리셔서 평생 동안의 교훈으로 삼게 해주십시오.”
원광(圎光)이 말하였다. “불교(佛敎)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으니 그것은 10가지로 구별되어 있다. 너희들은 다른 이들의 신하와 자식된 자이니 능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世俗)의 5개(五戒)의 계율이 있으니 첫 번째는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事君以忠), 두 번째는 효로 부모를 섬긴다(事親以孝), 세 번째는 친구와 사귐에 믿음이 있게 한다(交友有信), 네 번째는 전투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臨戰無退), 다섯 번째는 살생을 함에 가림이 있게 한다(殺生有擇)이다. 너희들은 그것을 행함에 소홀함이 없게 하라.” 귀산(貴山) 등이 말하였다. “다른 것은 곧 이미 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른바 살생을 함에 가림이 있게 하라는 것은 특히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원광(圎光)이 말하였다. “육재일(六齋日)과 봄과 여름에는 살생을 하지 않으니 이것이 때를 가리는 것이다. 가축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말, 소, 닭, 개를 말하는 것이다. 세물(細物)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고기가 한 점도 족하지 않다는 것이니 이것이 생물을 가린다는 것이다. 이 또한 오직 그 쓰이는 바만 하고 많이 죽이는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는 세속(世俗)의 좋은 경계이다.” 귀산(貴山) 등이 말하였다. “지금 이후로 받들어 잘 펼치고 감히 어기지 않겠습니다.” 후에 두 사람이 군사(軍事)를 따랐는데 모두 국가에 큰 공이 있었다.
또한 건복(建福) 30년 계유(癸酉, 613), 곧 진평왕(真平王) 재위 35년이다. 가을에 수(隋)나라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이르니 황룡사(皇龍寺)에 백좌도량(百座道場)을 설하고 여러 고승(高徳)에게 청하여 경전을 강설하였는데 원광(圎光)이 가장 윗자리에 위치하였다.”
논하여 말한다. 원종(原宗)이 불법을 일으킨 이래 진량(津梁)은 비로소 설치되었으나 당오(堂奧)는 아직 겨를이 없었다. 그러므로 마땅히 귀계멸참(歸戒滅懺)의 법으로써 우매하고 미혹한 중생을 깨우쳐야 한다. 그래서 원광(圎光)은 살고 있는 가서갑(嘉栖岬)에 점찰보(占察寶)를 설치하여서 항규(恒規)로 삼았다. 이때에 어떤 단월니(檀越尼)가 점찰보(占察寶)에 밭을 헌납하였는데 지금 동평군(東平郡)의 밭 100결이 이것이고 옛 장적이 아직 남아 있다.
원광(圎光)은 성품이 허정(虛靜)함을 좋아하고 말할 때 항상 미소를 머금었고 얼굴은 노한 빛이 없었다. 연랍(年臘)이 이미 많이 들어 궁에 수레를 타고 들어갔는데 당시 여러 선비들 중 덕의(徳義)가 속하는 바도 감히 그의 위로 나가지 못하였다. 문장의 넉넉함은 한 나라가 쏠리는 바였다. 나이 80여 세로 정관(貞觀) 연간에 죽었다. 부도(浮啚)삼기산(三岐山) 금곡사(金谷寺)에 있다. 지금 안강(安康)의 서남 골짜기다. 또한 명활산(明活)의 서쪽이다.
당전(唐傳)에 황륭사(皇隆寺)에 입적하였다고 하는데 그 지명이 분명하지 않고 황룡(皇龍)의 오자로 의심된다. 분황(芬皇)이 왕분사(王芬寺)로 쓰인 예와 같다. 위의 당전(唐傳)·향전(傳) 두개의 문장에 의거하면 다만 성씨(姓氏)가 박(朴)·설(薛)이며 출가(出家)가 동·서라서 두 사람 같아 감히 자세히 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둘 다 싣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러 전기(傳記)에는 모두 작갑(鵲岬)·이목(璃目)과 운문(雲門)의 사실은 없다. 그러나 향인(鄕人) 김척명(金陟明)이 잘못으로 떠도는 이야기를 가지고 원광법사전(光法師傳)을 윤문(潤文)하여 짓고, 함부로 운문개산조(雲門開山祖)인 보양법사(寶壤法師)의 사적을 합해 기록하여 하나의 전으로 만들었다. 후에 해동승전(海東僧傳)을 편찬한 자는 잘못된 것을 계승하여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사람들이 많이 미혹되었다. 인하여 여기에서 분명히 나누고, 한 글자라고 가감(加减)하지 않고 두 전기의 문장을 자세히 싣는다.
진(陳)나라와 수(隋)나라 시대 해동(海東)의 사람이 바다를 건너 도를 물은 자가 드물었고 설사 있더라도 크게 떨치지 못했으나 원광(圎光) 이후에 이르러서는 뒤를 이어 서쪽으로 공부하러 가는 자가 끊이지 않았으니 원광(圎光)이 이에 길을 연 것이다.
찬(讃)하여 말한다.
바다를 건너 처음으로 중국 땅의 구름을 뚫었네(航海初穿漢地雲).
몇 사람이 내왕하며 맑은 덕을 풀었는가(㡬人来徃挹清芬).
옛 자취는 청산에 남았네(昔年蹤迹青山在).
금곡과 가서의 일은 가히 들을 수 있네(金谷嘉西事可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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