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릉(陵)

 경릉(陵)

추존왕 덕종(德宗)

- 위치 :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龍頭洞)

- 지정번호 : 사적 제198호

- 조성시기 : 1457년(세조 3)

- 능의구성

      경릉은 추존왕 덕종(德宗)과 그의 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의 능이다. 동원이강릉의 형태로 조영되었다. 능침의 배치는 왕이 우측에, 왕비가 좌측에 모셔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릉에서는 왼편에 왕릉이, 오른편에 왕비릉이 있다. 왕릉은 난간석이나 망주석 등이 없고 석양과 석호도 2쌍이 아닌 1쌍만 설치되어 있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있을 때 죽었고, 부왕인 세조가 간소한 장례 의례에 준해 사대석(莎臺石) 등을 설치하지 말 것을 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왕비는 생전에 덕종의 추존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성종대에 이르러 왕릉의 규범에 따라 덕종의 능침에도 의물을 가설하고자 하였으나, 덕종의 비이며 당시 대왕대비였던 소혜 왕후가 석물을 가설치 말라 하여 그 모습 그대로 남게 되었다.
왕릉과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모두 신장이 매우 크고 당당해보이도록 제작되었는데, 마모가 심해 현재는 그 윤곽만 살필 수 있다.

 

- 능의역사

   1457년(세조 3) 의경세자가 요절하자 그 해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성종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해인 1472년(성종 3)에 아버지인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숭하고 능호를 경릉이라 하였으며, 어머지 수빈을 왕비에 봉하고 인수왕대비라고 하였다. 그리고 1476년(성종 7)에는 묘호를 덕종이라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에는 소혜왕후가 승하하여 경릉의 오른편 언덕에 안장하였다.

 

- 덕종(德宗) 생애이야기

      의경세자는 1438년(세종 20) 9월 15일 수양대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445년(세종 27) 7세 때 도원군에 봉해졌으며,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1455년(세조 1) 7월 26일 세자에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예절이 바르고 글 읽기를 즐겼으며 서예에도 능했으나 1457년에는 병세가 악화되어 21명의 승려가 경회루에서 공작재를 베풀고 병의 치유를 빌었는데, 이 때 신숙주, 한명회 등도 함께 참여하여 세자의 완쾌를 빌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2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 일화

     추존왕 덕종의 아버지 세조는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 단종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렸다. 따라서 늘 이에 대한 마음의 짐이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러한 세조의 업보로 인해 그의 아들들이 단명하였다는 이야기를 주고 받곤 하였다. 의경세자의 죽음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세조가 영월에 귀양 보낸 단종에게 사약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잠이 든 날 밤, 그의 꿈에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그녀는 분노한 얼굴로 나타나 세조를 꾸짖었다.
“너는 흉악하고 표독스럽게도 내 아들의 왕위를 빼앗고,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벽지로 내쫓더니 이제는 목숨까지 끊으려고 하는구나! 무슨 원한으로 이러는 것이냐? 네가 나의 아들을 죽이니, 나 역시 네 자식을 살려두지 않겠다.”
꿈에서 깬 세조는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동궁의 내시가 급히 달려와 세자가 위독하다는 말을 전한다. 세조는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의경세자는 이미 세상을 뜬 후였다고 한다.
현덕왕후의 저주 때문에 세자가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분노한 세조는 단종 복위 사건을 빌미로 현덕왕후를 폐위한 뒤 능을 파헤쳐 바닷가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 생애이야기

      소혜왕후는 1437년(세종 19) 좌의정 한확의 딸로 태어났으며, 1455년 세자빈에 간택되었다. 남편인 의경세자는 20세에 요절하였는데, 아들 성종이 즉위한 후 1471년(성종 2)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왕대비가 되었다.
그녀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었을 뿐만 아니라 효성이 지극했으므로 세조가 ‘효부’라는 도장을 만들어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불심이 깊어 불경을 언해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교육을 위해 『명심보감』등의 유교서적을 재편집하고 국문으로 번역해서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였다.

 

- 일화

     소혜왕후는 1504년(연산군 10) 4월 27일에 68세로 승하하였는데, 이는 손자인 연산군의 폭행에 기인한 죽음이었다고 전한다. 연산군이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가 모함을 받아 폐위된 후 사사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며 관련자들에게 대대적인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병상에 누워 있던 소혜왕후는 그러한 손자를 꾸짖었는데, 연산군이 이에 반발하며 그녀를 머리로 받았다고 한다. 소혜왕후는 이러한 충격으로 며칠 후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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