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선릉(宣陵)
선릉(宣陵)
9대 성종(成宗)
-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9호
- 조성시기 : 1495년(연산군 1) 4월 6일
- 능의구성
선릉은 동원이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원이강릉이란 하나 이상의 능이 같은 능호를 사용하지만, 각각 다른 언덕에 조성된 능을 말한다. 선릉의 왼쪽 언덕에는 성종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의 능,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成宗)의 능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웠다.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에 따라 세조의 광릉 이후 조영된 왕릉에는 세우지 않았던 병풍석을 성종의 선릉에 다시 세운 것이다.
그 밖의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장명등의 양식은 태종의 헌릉을 본떴으며, 문석인과 무석인의 얼굴은 극히 사실적이나 몸집이 크고 입체감이 없다. 왼쪽 언덕의 왕비 능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만 돌려져 있고, 석주의 윗부분은 초기 난간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다. 성종릉의 문무석인이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릉의 문무석인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 능의역사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38세의 나이로 성종이 승하하였고, 1495년(연산군 1) 1월 14일 묘호를 성종, 능호를 선릉이라 하여 같은 해 4월 6일 지금의 선릉 자리인 광주부 서면 학당리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35년 후인 1530년(중종 25) 8월 22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경복궁에서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고, 같은 해 10월 29일 선릉에 예장되었다.
그 후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그 첫 수난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 일어났다. 『선조실록』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능에도 화재가 발생하는 등 여러 차례의 수난을 겪었으나 정비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 성종(成宗) 생애이야기
성종은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와 세자빈 한씨(훗날 소혜왕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 7월 30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이 되기 전에 의경세자가 20세로 요절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뛰어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의경세자의 동생이자 성종의 숙부인 예종이 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즉위 14개월 만에 승하하자 1469년 11월 28일 성종이 그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7년 동안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을 받다가 20세가 되는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했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 반포했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때의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사림세력을 등용,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켰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재위 25년 동안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왕비 공혜왕후 승하 후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씨를 계비로 삼았다가 행실을 문제 삼아 폐비 후 사사하였는데, 이는 훗날 연산군 폭정의 계기가 되었다.
1494년(성종 25) 12월 24일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보령 38세로 승하했다.
- 일화
성종은 백성들이 사는 것을 둘러보기 위해 자주 궐 밖을 나가 몰래 다니기를 일삼았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왕이 궐 밖을 다니며 겪은 일화들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왔다.
어느 해 겨울, 성종이 여느 때처럼 미행을 나갔을 때, 남산골 초라한 오막살이에서 글 읽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다. 담은 무너지고 서까래가 썩어가는 누추한 곳이었는데, 『춘추좌전』을 읽는 소리가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성종은 등불이 꺼져 불을 얻고자 한다는 핑계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글을 읽던 선비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가 지은 문집을 읽어본 성종은 선비의 해박함과 그 문집의 명문에 깜짝 놀랐다. 훌륭한 학식을 갖춘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고 어려운 살림을 하는 것이 안타까웠던 성종은 선비 몰래 쌀과 고기를 그 집에 보내고, 예정에 없던 과거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선비의 문집에서 본 글을 과제로 내걸고, 선비가 과거에 응시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선비의 문집에 있던 글이 제출되자, 성종은 더 살펴볼 것도 없이 그 글을 장원급제를 시켰다.
그런데 글을 지은 사람의 이름이 그 선비의 이름이 아니었다. 이상하게 여겨 장원급제자를 들이라 하였는데, 주인공은 선비가 아닌 새파란 젊은이였다. 자초지종을 묻자 젊은이는 “그 글은 스승의 글이었으며, 스승께서 이번 과거를 꼭 보시려고 했으나, 며칠 전 굶주리다가 갑자기 먹은 고기 때문에 크게 병이 나셨다.”고 답하였다. 성종은 안타까움에 크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생애이야기
정현왕후 윤씨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62년(세조 8) 6월 26일 태어났다. 1473년(성종 4) 6월 궁중에 뽑혀 들어와 숙의에 봉해지고, 1479년(성종 10)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1월 8일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의 아버지 윤호는 당시 정계에 떠오르는 소장파 샛별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외척 한명회를 견제할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고, 이러한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후궁 중 왕비에 책봉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폐비 윤씨의 비극적인 최후를 바라본 정현왕후는 성종에게 매우 관대하였으며, 이에 성종은 “투기하지 않는 사람이 드문데, 다행히 어진 왕비를 얻어 마음이 평안하다.”고 칭찬하였다.
정현왕후는 훗날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과 신숙공주를 낳았는데, 공주는 일찍 죽었다. 연산군 때를 거쳐 아들인 중종이 왕위에 오른 뒤 1530년(중종 25) 8월 22일 경복궁에서 춘추 69세로 승하하여 10월 29일 선릉에 예장했다.
- 일화
정현왕후 윤씨는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비된 이후, 중전의 자리에 올라 원자인 연산군을 친아들처럼 키우게 되었다. 연산군 역시 정현왕후 윤씨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연산군은 즉위 후 성종의 묘지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폐비 윤씨의 아버지 윤기무(尹起畝)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고는, 자신이 친어머니로 알고 있는 정현왕후 윤씨의 아버지 윤호(尹壕)를 윤기무로 잘못 표기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만큼 폐비 윤씨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당시 이 질문에 승지들이 윤기무와 폐비 윤씨에 대해 답변하였고, 연산군은 그 때야 비로소 자신의 친어머니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연산군일기』1495년(연산군 1) 3월 16일자 기사에는 “왕이 비로소 윤씨(폐비 윤씨)가 죄로 폐위되어 죽은 줄을 알고, 수라를 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연산군일기』1504년(연산군 10) 3월 20일자 기사에는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죽음에 연루된 귀인 정씨와 엄씨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뒤 장검을 들고 정현왕후의 처소로 쳐들어가 “어서 밖으로 나오라”며 횡포를 부린 기록이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정현왕후를 해치지 않았고, 정현왕후의 아버지 윤호가 폐비 윤씨의 복위 문제를 앞장서 반대하는 시점에서도 정현왕후에 대한 예우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2.순릉(順陵)
순릉(順陵)
- 위치 : 경기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지정번호 : 사적205호
- 조성시기 : 1474년(성종 5) 6월 7일
- 능의구성
순릉은 성종의 원비(元妃) 공혜왕후(共惠王后) 한씨(韓氏, 1456∼1474)의 무덤으로 공혜왕후는 왕비로 봉해진 후 5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전체적인 상설제도는 공릉과 같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는 석물이 많이 있다. 순릉의 장명등은 공릉의 것과는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문무석인은 좌우 1쌍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릉의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정자각의 오른쪽에 있는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내부에는 공혜왕후의 비가 있다. 비에는 전서(篆書)로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쓰여 있고, 1817년(순조 17)에 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순릉의 금천교가 원형을 잘 보전하고 있으며 현재의 진입 모습은 변형된 것이다.
- 능의역사
공혜왕후는 1474년(성종 5) 4월 15일 승하하여, 시호를 공혜, 능호를 순릉이라 하고 같은 해 6월 7일 현재의 위치에 안장하였다.
- 공혜왕후(共惠王后) 한씨(韓氏) 생애이야기
공혜왕후(共惠王后) 한씨(韓氏)는 본관(本貫)이 청주(淸州)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여(女)로서 세조(世祖) 2년 (1456년) 10월 11일 한성부(漢城府) 동부(東部) 연화방(蓮花坊) 사제(私第)에서 탄생(誕生)하였으며, 모친(母親)은 여흥부부인 민씨(驪興府夫人 閔氏)이고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 한씨(章順王后 韓氏)의 매(妹)이다.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되었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하였다.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하여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가가 전한다.
왕후는 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조금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숙경하였다.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잘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불러 보고서 혼인을 정하였다. ...... 왕후를 들여와 뵈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왕후는 나이가 어렸으나 노성한 사람처럼 엄전했으며, 늘 가까이 모시되 경근하기가 갈수록 지극하니 이 때문에 권우가 날로 더해갔다.
- 일화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이다.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 바로 옆의 공릉에 잠든 장순왕후가 바로 셋째 딸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가 된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으로서,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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