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상(塔像) 제4(第四)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


옥룡집(玉龍集)≫과 「자장전(慈藏傳)」, 그리고 제가(諸家)의 전기(傳紀)에는 모두 이렇게 말한다. “신라(新羅)의 월성(月城) 동쪽 용궁(龍宮) 남쪽에 가섭불(迦葉佛)의 연좌석(宴坐石)이 있는데 그 땅은 곧 전불(前佛) 시대의 절터(伽藍)이고,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땅은 곧 일곱 절(七伽藍)의 하나이다.”
국사(國史)를 살펴보면, 진흥왕(興王) 즉위 14년 개국(開國) 3년 계유(癸酉, 553) 2월에 월성 동쪽에 신궁(新宮)을 세우는데 그곳에 황룡(黃龍)이 나타나 왕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고쳐서 황룡사(皇龍寺)라고 했다. 연좌석(宴坐石)은 불전(佛殿)의 뒷쪽(後面)에 있었다. 일찍이 한 번 봤는데 돌의 높이는 5, 6척이나 둘레는 겨우 3주(三肘)이고 우뚝하게 서 있으며 그 위는 편편하다. 진흥왕(興王)이 절을 세운 이후로 두 번이나 화재를 겪어 돌에 갈라진 곳이 있어서 절의 중이 여기에 쇠를 붙여서 보호하였다.
이에 찬(讚)하여 말한다.
불교의 침체함은 얼마인지 기억할 수 없는데(惠日沉輝不記年)
오직 연좌석만은 의연하게 남아 있구나(唯餘宴坐石依然)
상전이 변해 몇 번이나 창해가 되었는데(桑田㡬度成滄海)
애뜻하게도 우뚝한 채 그 자리에 남았구나(可惜巍然尚未遷)
이윽고 몽고(蒙古)의 큰 병란 이후에 불전과 탑은 모두 불타버리고(旣而西山大兵已後殿塔煨燼)
이 돌도 역시 흙에 파묻혀서 겨우 땅과 같이 편편해졌다.(而此石亦夷没而僅與地平矣)
아함경(阿含經)≫을 살펴보면, 가섭불(迦葉佛)은 현겁(賢劫)의 세 번째 부처(三尊)이고 사람의 수명이 2만 세(二萬歳)일 때에 세상에 나타났다고 한다. 이에 의거하여서 증감법(増减法)으로 계산하면 매양 성겁(成劫)의 처음에는 모두 수명이 무량세(無量歲)였다. 점점 줄어들어 8만 세(八萬歳) 때에 이르면 주겁(住劫)의 처음이 된다. 이로부터 또 100년마다 1세(一歳)씩 줄어들어 수명이 10세(十歳) 때에 이르면 1감(減)이 되고, 또 늘어나서 사람의 수명이 8만 세(八萬歳)가 되면 1증(增)이 된다. 이와 같이 하여 20번 줄이고, 20번 늘이면 한 주겁(住劫)이 된다. 이 한 주겁(住劫) 중에 천불(千佛)이 세상에 나타나는데, 지금의 본사(師)인 석가불(釋迦佛)은 네 번째 부처(四尊)이다. 네 번째 부처(四尊)는 모두 제9감(第九減) 중에 나타난다. 석가세존(釋迦世尊)의 100세(百歳) 때부터 가섭불(迦葉佛)의 2만 세(二萬歳)까지는 이미 200만여 세(二百萬餘歳)나 된다. 만약 현겁(賢劫) 처음의 첫째 부처(一尊)인 구류손불(拘留孫佛) 때까지는 또 몇 만 세(㡬萬歳)가 된다. 구류손불(拘留孫佛) 때로부터 위로 겁(劫)의 처음 무량세(無量歳) 때까지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석가세존(釋迦世尊)으로부터 아래로 지금의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 1281)까지는 이미 2,230년이고, 구류손불(拘留孫佛)로부터 가섭불 (迦葉佛) 때를 지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곧 몇만 세(㡬萬歳)이다.
본조(朝)의 명사(名士) 오세문(吳世文)이 ≪역대가(歷代歌)≫를 지었는데, 대금(大金) 정우(貞祐) 7년 기묘(己卯, 1219)에서 거슬러 헤아려 4만 9,600여 세(四萬九千六百餘歳)에 이르면 바로 반고씨(盤古氏)의 천지개벽(開闢)한 무인년(戊寅年)이 된다고 했다.
또 연희궁(延禧宮) 녹사(錄事) 김희령(金希寧)이 찬술한 ≪대일역법(大一法)≫에 천지개벽(開闢)한 상원(上元) 갑자(甲子)로부터 원풍(元豊) 갑자(甲子, 1084)에 이르기까지 193만 7천 6백 41세(一百九十三萬七千六百四十一歳)라고 하였다.
또한 ≪찬고도(纂古圖)≫에는 천지개벽(開闢)에서부터 획린(獲麟, 기원전 477)까지 276만세(二百七十六萬歳)라고 하였다.
여러 경전(諸經)을 살펴보면, 또한 가섭불(迦葉佛) 때부터 지금까지 이 돌의 나이가 되니 오히려 겁초(劫初)에 천지개벽(開闢) 때로 보면 어린애(兒子)에 불과하다. 삼가(三家)의 말이 오히려 이 어린 돌(兒石)의 나이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 천지개벽(開闢)의 설(說)에 있어서는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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